2번째 기업, 3번째 면접
업계 혼동, 준비 미흡
무차별적으로 난사했던 이력서 중 하나에 답이 온다. 이름은 꽤 친숙한, 매출이 조 단위인 건설사다. 매출 1000억 규모 회사를 마지노선으로 잡은 그의 입장에서 조 단위 매출은 감사할 따름이지만, 문제는 직무다. 그는 1번째 회사에 탈락한 충격으로 인해 한동안 직무를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지원했다. 2번째 회사는, 그가 직무를 가리지 않았던 이 기간 동안 지원한 회사다. 그가 2번째 회사에 지원한 직무는 바로 '주택영업'이다.
공고에는 정확한 직무 설명이 나와있지 않다. 2번째 기업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몇 줄이나마 설명이 적혀 있다.
재개발, 재건축 수주 및 관리 / 조합 및 조합원 관리
잘은 모르겠지만, 썩 만만치 않은 직무일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애초에 공고를 보았을 때, 그가 넣을 수 있는 직무가 주택영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전부 설계, 시공 등 건축학과 관련 직무였다. 평소라면 아예 지원을 않았겠지만, 1번째 회사를 최종 탈락한 충격에 그는 우선 이력서를 들이밀어 놓았다. 하지만 최종 탈락의 충격이 조금씩 가시면서, 그는 건설사 주택영업 직무에 지원한 것이 점점 후회된다. 해외영업과 기획 직무를 위주로 잡았던 그의 기존 목표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뭄에 콩 나듯 서류 합격을 했으니, 그는 면접에 참석한다.
직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그는 재무제표도 제대로 보지 않고 면접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연히, 면접에서의 집중도도 떨어졌고 기억도 흐릿하다.
면접 볼 회사에 도착하자, 그의 몸은 긴장으로 굳기 시작한다. 아무리 마음에 없는 직무와 회사라고 해도, 면접을 앞둔 면접자의 신체는 비상사태에 돌입한다. 더군다나 그는 2번째 기업에 별 관심이 없다는 핑계로 면접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면접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이, 그의 긴장과 경직을 더욱 증폭시킨다.
2번째 기업은 사내에 공간이 모자라는지, 별도의 대기실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면접실 앞, 그러니까 직원들이 일하고 있는 사무실 복도에 앉아 있다. 복도에는 띄엄띄엄 의자를 가져다 놓아, 면접자들이 앉도록 해놓았다. 그는 속으로, 이러한 환경도 면접자의 패기와 담력을 시험하려는 건설사의 면접 절차인가 생각한다.
가라앉아 있는 사무실 분위기와는 달리, 안내하는 직원의 말투는 친절하다. 아마 인사팀일 듯한데, 인사팀 직원 또한 다른 직원들이 모두 입고 있는 건설사 점퍼를 입고 있다. 말투는 친절하지만, 덩치가 크고 인상도 강하다. 덩치가 크고 인상이 강한 인사과 직원은 친절한 말투로, 현재 채용이 급해서 1번의 면접으로 당락을 결정한다고 한다. 또한, 현재 인원이 필요한 직무가 많아 주택영업이 아닌 다른 직무로 배정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는 속으로, 주택영업이 아닌 다른 직무로 배정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엔 그의 준비가 너무도 허술했으며,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다.
면접실 바로 앞에 대기하면서, 면접실 내부의 소리가 근근이 들린다.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리고, 면접자들이 밖으로 나온다. 인사팀 직원은 그와 다른 한 명의 면접자를 면접실로 안내한다. 자리에 앉기 전에, 1번인 '하얀 얼굴' 씨가 차렷-경례를 해서 인사하라고 말한다.
2번째 기업 주택영업
: 인력이 급히 필요해서, 이번에는 1번의 면접만으로 바로 채용을 결정하겠다고 고지함.
면접자 : 원래 3명이었으나 1명이 불참하여 2명, 모두 남성
다른 인원의 불참으로 인해 1번 면접자가 되어버린 그
모 대학교 부동산학과를 나온, 뿔테 안경을 낀 면접자2
면접관 : 4명, 모두 남성이며 건설사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회사 점퍼를 입고 있다.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40대 면접관 1
질문과 면접을 주도하는, 아저씨 같은 면접관 2
가만히 있다가 이따금씩 질문하는, 푸근한 아저씨 같은 면접관 3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안경 낀 면접관 4
그 : 차렷, 경례!
면접자 2인 : 안녕하십니까!
면접관 2 : 아 그래요. 앉아요. 편하게 있어요, 편하게.
면접관 1 : 그런데... 자리가 하나 비네요?
면접관 2 : 아, OOO 씨가 안 왔나 보군요. 그냥 이대로 진행하죠.
(이력서를 보며) 하얀.. 얼굴 씨? 하얀 얼굴 씨부터 자기소개해주세요.
그 : 알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2번째 기업 주택 영업 직무에 지원한 하.얀. 얼.굴. 입니다! (그는 군대에서처럼, 이름이 또박또박 들리게 끊어서 말한다) 저는 두 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히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실천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홀리데이에서...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공놀이를 통해...
이상, 두 가지 강점을 바탕으로 2번째 기업에 기여하고 싶은 지원자 하. 얀. 얼. 굴.입니다. 감사합니다!
면접자 2 : 안녕하십니까! 2번째 기업 주택 영업 직무에 지원한 면. 접. 자. 2입니다. 저도 두 가지 키워드를 통해 저를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소통과 열정을....
그는 면접자 2의 자기소개 틀이, 그가 썼던 틀과 너무나도 유사하여 약간 놀란다. 알맹이와 단어만 조금 다를 뿐, 틀과 형식은 거의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면접관 2 : 허허 잘 들었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있으세요. 우리 회사를 지원한 이유가 있을까요? 하얀 얼굴 씨부터
그 : 저는 어릴 적부터 공간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을 직접 만드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호주에서도 건설 현장 일도 해보고, 아르바이트도 철거 일을 해보았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직접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실물 경제에 관심이 크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접자 2 : 저는 2번째 기업의 광고를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2번째 기업의 건축물 광고를 보며, 안에 거주하는 사람과 자연을 어우러지게끔 하는 건축물이라는 생각을 받았습니다. 광고를 보며 2번째 기업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이렇게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잡X레닛에서, 2번째 기업의 광고는 자체 제작이 아니라 외주를 준 것이니 면접에서 언급하지 말라는 후기를 본 기억이 있다. 면접자 2의 답변을 들으며, 그는 면접자 2가 실수한 것이라 생각한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실물 경제에 관심이 많다고 했는데, 어떠한 쪽에 관심이 있나요? 그러니까, 지금 이력서를 넣고 있을 것 아닙니까. 어느 쪽으로 이력서를 넣고 있나요?
그 : 네, 저는 제조업에 관심이 많아 제조업 쪽으로 넣고 있습니다. (기어코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그는 건설업이 제조업에 포함되는 것인 양 혼동하여 이렇게 답한다.)
면접관 2 : 제조? 우리 회사는 제조가 아니라 건설업인데, 왜 제조업을 안 넣고 건설사에 지원했죠?
그 : 아... 제조와 건설을 모두 넣고 있습니다. 손으로 만드는.... 실질적인 것을 좋아하는... 저의 관심으로 제조업과 건설업을 모두 넣고 있다고 말씀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2번째 기업의 재무제표를 보며 튼실한 기업이라고 생각해서 지원했습니다.
면접관 3 : (불쑥 끼어들어) 재무제표를 봤다고 했는데,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말해보세요.
그 : 2번째 기업의 매출은 X조가 넘으며, 자산은 XX억, 부채는 XX억, 자본은 XX억입니다.
면접관 3 : 제대로 안 본 거 같은데? (웃음)
...
제조업과 건설업 혼동,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재무제표 어필이 탄로 나면서 그의 합격이 요원해진다. 그는, 마지막 말에서 어떻게든 만회해보고자 노력한다.
면접관 2 :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해보세요.
그 : 네. 면접을 보면서 면접관님들께 저에 대한 확신을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당시의 경험을 통해 건설에 대한 관심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는 호주 멜버른에서 건물을 철거하며, 호주 단독 주택의 구조를 살펴본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철근 콘크리트, 단열재, 창호로 마감을 하는 구조이지 않습니까? 호주 단독주택의 경우는 목구조를 올리고 벽돌로 목구조를 살짝 덮어 마감을 하기 때문에 집이 춥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 건설에 대한 자부심과 관심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건설에 대한 관심과 저의 열정을 바탕으로 2번째 기업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 알고 있는 것, 주워들은 것을 짜내고 조합하여 멋있어 보이게 만든다. 어떻게든 어필해서 면접관들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힘겹고 눈물겨운 노력이다. 그는 마지막 말을 하며 면접관들을 돌아본다. 면접관들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다.
면접이 끝났다. 그는 함께 면접을 본 면접자 2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 자세한 면접 상황을 모르는 인사팀 직원은, 변함없이 친절한 말투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인력이 급해서, 합격하게 되면 당장 며칠 뒤인 월요일부터 출근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사팀 직원의 말만 들으면 이미 합격한 것 같지만, 그는 자신이 면접에서 죽을 쒔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인사팀 직원의 말을 듣고 있자니 붙은 마냥 기분이 좋다.
면접비 봉투를 받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함께 면접을 본 면접자 2는 그보다 조금 어리며 꽤나 쾌활하다. 어느 쪽으로 가시냐며, 꼭 같이 붙어서 함께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에게 말한다. 너무 쾌활한 말에, 그도 웃음이 난다. 학과를 물어보니, 면접자 2는 OO대학교 부동산학과 학생이라고 말한다. 진로를 확실히 정한 친구로군,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그는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면접을 망친 것은 확실한데, 그래도 자신의 열정과 패기를 보고 뽑아주지 않을까? 인사팀 직원 말대로 인력은 부족한데, 면접에 오지 않는 인원이 많아 그가 뽑히지 않을까? 뽑힌다면 주택영업이 아닌 다른 직무로 배정되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김칫국을 사발째로 들이키고 있었지만, 바로 다음날 김칫국 사발은 산산이 부서진다. 그의 핸드폰에는, 의심의 여지없는 '불합격' 메시지가 도착한다. 썩 기분이 좋진 않지만, 그래도 1번째 기업 최종 탈락 때의 충격보다는 훨씬 견딜 만하다. 함께 면접을 봤던 면접자 2가 합격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