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번째 기업으로부터 서류 합격 메일이 도착한다. 면접에 참석하라는 안내 메일이다. 그는 취업이 꽤나 절박한 상태지만, 그러한 그에게도 5번째 기업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이유는 5번째 기업의 복잡한 사연 때문이다.
5번째 기업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기업으로, 조선업과 중공업을 주로 영위했다. 같은 업계의 여러 업체들을 인수하고 합병하여 몸집을 키운 5번째 기업은, 그 몸집이 기업집단에 이르러 재벌 10위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로 덩치가 컸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TV에서 5번째 기업의 광고를 본 기억이 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임에도, 광고가 길고 임팩트가 있었다. 수평선이 펼쳐진 대양 위에, 붉고 거대한 배 한 척이 파도를 가르며 항해한다.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엄숙한 목소리가 말한다. "5번째 기업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정확하진 않으나 대략 이런 느낌의 광고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벌 10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던 5번째 기업은, 조선업계가 불황에 빠지면서 그대로 곤두박질친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몰랐으나, 면접을 위해 5번째 기업을 조사하면서 조금씩 실상을 파악한다. 인수합병으로 몸집 키우기에 치중하던 5번째 기업은, 조선업계가 호황일 때는 괜찮았으나 조선업계가 불황에 접어들자 무리한 인수합병의 리스크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 재벌이라고까지 불리던 몸집은 잘게 잘게 쪼개져 해체되었다.
그에게 서류합격 연락을 한 5번째 기업은, 잘 나가던 시절이 아니라 잘게 쪼개진 후의 5번째 기업이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새로 입사하는 신입사원 기수 전체 인원을 배를 태워 중국까지 다녀오게끔 하는 연수 일정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는 합격하더라도, 그가 중국에 배를 타고 다녀올 일이 없다. 그는 중국에 배를 타고 다녀오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다만, 그가 합격하게 된다면 몸담게 될 기업이 성장세였으면 좋겠다. 성장세가 아니라면 안정적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혹여나 망할까 걱정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다. 그가 서류 합격했을 당시 5번째 기업의 신용 등급은 CC다. 신용 등급은 AAAA부터 R까지 11개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CC는 아래에서 4번째 단계다. CC 등급의 정의는, '상거래를 위한 신용능력이 매우 낮으며, 거래의 안정성이 낮은 기업' 이다. 취업이 고프고 절박한 그의 입장에서도, 5번째 기업의 서류 합격 메일이 그다지 기쁘지 않은 이유다.
그는 5번째 기업의 채용 공고에서, 그가 유일하게 지원할 수 있는 회계 직무를 지원했다. 직무는 회계, 소속팀은 재무로 되어 있다. 합격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왠지 마음이 답답하다. 재무 상태가 건전하지 않을 것 같은 회사에서 회계 직무로 일을 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래도 신규 직원을 채용하는 걸 보니, 월급은 밀리지 않겠지. 기업에서 일해본 적도 없는 새파란 취업준비생, 완연한 외부자의 근거 없는 망상이었다.
면접 당일, 그는 5번째 기업에 도착한다. 그의 섣부른 예상과는 달리, 5번째 기업의 사옥은 깔끔하고 훌륭한 축에 속한다. 그를 안내하는 인사팀 직원들에게서도, 이전 기업들과 같은 당당함과 패기가 느껴진다. 그는 입을 다물고 대기실에서 대기한다.
외부 정보들과 뉴스로 인해 끼고 있던 색안경은 벗어났으나, 5번째 기업의 면접 진행 방식은 그에게 다시금 의문을 자아낸다. 면접 대기실에 면접자들이 하나둘 도착하더니 총 6명이 된다. 그는 다 같이 들어가는 것인가 생각했으나, 인사팀 직원의 안내는 예상 밖이다. 인사팀 직원은, 면접은 한 번에 한 명씩만 진행되며 이외 인원들은 계속해서 대기하라고 말한다. 순서에 따라, 최장 2시간 반까지 기다릴 수 있다며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럴 거면 애초에 한 명씩 면접 시간에 맞추어 안내했으면 되지 않나 생각한다. 하지만 그를 비롯한 면접자들 모두 겉으로는 아무 불평 없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인다.
5번째 기업 인사 담당자는, 금일 1차 면접 전형이 'PT면접 + 직무 면접' 이라고 한다.
1. PT 면접 (Presentation 발표 면접)
지원자가 PT 면접실로 들어가면, 화이트보드에 문제가 적혀 있다. 지원자가 해당 문제에 대해 10분 동안 답을 구상한다. 10분 뒤 PT 면접관들이 들어오면, 지원자는 그 자리에서 10분 동안 본인의 답안에 대해 발표한다. 발표가 끝난 뒤, PT면접관들이 궁금한 사항을 질문한다.
2. 직무 면접
PT면접이 끝나면 인사팀 직원은 지원자를 다른 면접실로 안내한다. 그가 이전까지 경험했던 일반적인 직무 면접이다. 1분 자기소개, 지원동기, 직무 관련 지식 및 강점들을 물어보는 전형적인 직무 면접이다.
인사 담당자는 대기실의 인원 중 한 명의 이름을 호명해 데리고 나간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5명의 지원자는 다시 대기한다. 다행히도 그는 4번째 순서로 불려 나간다. 그도 1시간 반을 기다렸는데, 남아 있는 둘은 각각 2시간과 2시간 반을 기다린 후에야 면접을 보게 되는 셈이다. 호명되지 않은 한 명은 참다못해 화장실인지 담배를 피우러인지 밖으로 나가버린다.
5번째 기업의 신용등급/뉴스 등 외부 정보 때문인지, 1시간 반이나 기다리면서 체념한 탓인지 그는 이전의 면접들에 비해 그다지 긴장하지 않은 상태다. 가뜩이나 직무도 그가 잘 모르는 회계 직무다. 그는,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일 떨어지더라도 PT 면접을 경험해본 것으로 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사 담당자의 뒤를 따라 PT 면접실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