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 초창기, 그는 독서실에 틀어박혀 종일 책을 읽었다. 이러한 독서 행위가, 느리더라도 사고력과 생각의 깊이를 더해준다는 확신이 있었다. 나비가 되기 위해 잠시 웅크린 애벌레처럼, 그는 독서를 통해 자신의 저력을 기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하루 종일 독서에 열중했다. 읽은 도서 목록을 정리하고, 독서 활동을 자기소개서로도 작성했다. 덕분에 서류 합격률이 높아진 것 같다.
하지만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도 슬금슬금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나비가 되기 위해 웅크린 애벌레인 줄 알았는데, 이러다 평생 애벌레로 살다 끝나는 것은 아닌가. 독서 활동을 나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서 제출하고, 자기소개서로도 적었지만 실제 면접에서 면접관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책을 잡고 집중하려 해도, 잡생각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잡생각을 몰아내기엔 스마트폰이 제일이다. 그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잠깐 기분 전환용으로 10분 정도만 봤다. 하지만 유튜브에 맛을 들이자, 그가 독서실에서 핸드폰을 하는 시간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다. 책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의 입맛에 맞는 내용인지 알아보는 것만 해도 꽤 오래 걸린다. 유튜브는 검색 한 번에, 그의 입맛에 맞는 영상이 끝도 없이 나열된다. 그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영상만 골라서 보고 있노라면, 유튜브는 그의 성향에 맞춰 더 자극적인 영상들을 추천해준다. 유튜브보다 독서가 더 바람직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그조차도, 자극적인 유튜브의 맛에 중독되고 있다.
그가 독서실에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보는 유튜브 영상은 아래와 같다.
보수 유튜버
보수 매체 뉴스
취업준비생들의 어려움, 자살 등 사회 문제를 다룬 기획 다큐
이외 각종 어두운 내용들
그가 취업 준비를 하던 때는, '진보 정권'이 들어섰을 때다. 흔히 쉽게 분류하기를, 보수는 자유를 표방하고 진보는 평등을 표방한다고들 말한다. 그가 독서실에 있던 시절의 정부는 '진보' 성향이었으며, 평등을 강조했다. 부자보다는 서민과 빈자에게, 기업보다는 노동자에게, 영리단체보다는 시민단체에게, 사회적 강자보다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관심이 많은 정부였다.
평등을 표방하는 진보 정권 아래, 그는 무언가 지원을 기대했다. 그런데 취업준비생인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적 강자로 분류됐나 보다. 진보 정권의 지원은 노인/여성/장애인/아동/비정규직 근로자 등을 향했다. 취업 준비생도 사회적 약자 분류에 속하긴 했지만, 그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남성이다. 그래서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린 것 같다. 진보 정권은 공공 일자리 창출, 각종 할당제,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하루아침에 정규직으로 전환시켜버리는 등의 정책을 많이 펼쳤다. 취업 준비가 계속 길어지는 마당에, 그는 이런 정부의 행보가 상당히 아니꼽다.
법인세를 인하하고, 기업 활동을 장려해야 민간 기업들이 사업을 확장하고 채용도 늘릴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사기업 취업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든 비벼볼 구멍이 넓어질 것이다. 그런데, 평등을 지향한다는 진보 정권은 사기업을 때려잡으며 다른 곳에다 세금을 들이붓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다.
지금 정권이 허튼짓을 하고 있어서 고용이 줄어든 것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가뜩이나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보수 진영 매체들은 신이 나서 정부를 물어뜯는다. 복지에 미쳐 돈을 뿌리는 정부라느니, 방만한 경영을 하는 공기업과 정부의 횡포라느니, 시장을 무시하고 폭주하는 정부라느니, 서민 코스프레하면서 뒤로는 별의별 짓을 다 한다는 등이다. 진보 정권이니, 당연하게도, 진보 측 매체들은 정부를 찬양하기 바쁘고 보수 측 매체들은 정부를 까내리기 바쁘다. 취업준비생인 그는, 정부 욕하는 것을 듣고 싶다.
어두컴컴한 독서실, 조그마한 1인실 좌석에 앉아있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는 취업준비생.
그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배설해낼 창구가 필요하다. 또, 위로를 받을 창구도 필요하다. 유튜브는 이 두 가지 창구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보수 매체 뉴스와 유튜버들은, 그를 대신해 진보 정권을 욕한다. 비판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그의 대리만족은 더욱 커진다. 보수 뉴스와 유튜버들은 그의 감정을 대신 배설해주는 대리자다. 그는 독서실에 웅크리고 앉아, 세상을 욕하는 유튜브 영상들을 찾는다. 핸드폰 속 영상들이 세상을 욕하면, 그는 속이 너무나도 후련하다.
개인 유튜버들의 영상은 주관이 많이 개입된다. 그는 뉴스를 찾아본다(뉴스도 주관이 많이 개입되긴 한다). 청년 실업자가 몇이니, 실업률이 몇이니 하는 등의 뉴스다. 그는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 혼자 망할 수는 없다. 다 같이 망해야 한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뉴스만을 검색해서 찾는다. 실업률 영상을 하도 들이파다 보니, 최근의 뉴스가 바닥난다. 실업률이 살짝 높긴 하지만, 아직 아주 절망적이진 않은가 보다. 여기서 그만둘 그가 아니다. 그는 실업률이 너무나도 치솟아 절망적인 세상을 보고 싶다. 결국 그는 IMF 시절의 뉴스까지 찾아본다. IMF 당시의 뉴스를 보며, 자신도 IMF를 겪고 있는 것마냥, 지금이 IMF인 것 마냥, 모두가 다 같이 답이 없고 절망스러운 것마냥 생각하며 속으로 웃는다. 약간 미친 것은 아닌가 싶다.
좌절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이들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다면, 옛날 뉴스까지 검색한다. 모두가 좌절하는 영상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그의 눈에 담으며 자위한다. 고생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사실을 날조해서라도 그는 매일같이 되새기며 확인해야 했다.
그가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 만일 정권이 보수 정권이었다면 어땠을까. 사기업들의 법인세를 감면해주고, 기업 활동을 무한히 장려했더라면 그는 취업을 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가정은 무의미하다. 어차피 전염병이 돌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염병마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 아예 단군 이래 한반도 최대의 호황기였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의 취업이 조금 수월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가 그토록 싫어하던 진보 정권이지만, 그도 진보 정권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진 않았다. 진보 정권은 취업 준비생들을 위해, 면접 지원금이라는 제도를 실시했다. 면접 1회당 5만 원씩, 최대 6회 30만 원까지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면접을 수십 번이고 탈락한 그는, 면접확인서를 꼬박꼬박 받아서 지원금을 최대한으로 받았다.
만일 보수 정권이 들어섰더라도, 그의 취업 준비 기간이 더 짧아졌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부가 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시장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기업들이 채용을 대폭 늘렸더라도 그를 원하는 기업이 하나도 없었을 수도 있다. 다들 취업하는데 그 혼자서만 줄창 탈락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변명거리가 없어진 그는 더더욱 비참해졌을 수도 있다.
독서실에서 네다섯 시간씩 정부 욕하는 뉴스를 보며, 애써 정신자위하는 그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자신의 이러한 모습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보 정권, 전염병 창궐 등 좋은 핑곗거리가 많다. 하지만, 그런 핑계로 도망치더라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취업준비생이란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핑계보다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다. 그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면접 탈락 횟수가 쌓일수록 그의 갈 곳 없는 분노는 커진다.
이 영상 하나만 더 봐야지. 이번에는 어떤 논리로 욕을 하나 봐야지. 이런 식으로 영상을 보는 것도 나름의 정치 공부, 경제 공부, 논리 공부가 되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독서실에서 유튜브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