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깊은 기업
24번째 기업은 역사 깊은 기업으로,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기업이다. 면접 준비를 위해 자료를 찾다 보니, 24번째 기업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배우는 어떤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다. 역사적인 측면만 보자면, 한국인으로서 자국의 역사 깊은 기업인 24번째 기업에서 일하는 것도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법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24번째 기업은 실을 바탕으로 하는 면 방직으로 시작해서, 섬유 관련 각종 실을 제조하고 판매한다. 면사, 생사, 화섬사(화학섬유 실) 등을 판매하는 면방직 사업이다. 면방직 사업은,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수출을 위해 집중적으로 육성한 분야 중 하나다. 군사독재 정권은 공업을 중시했는데, 공업은 가벼운 것들을 만드는 경공업과 무거운 것들을 만드는 중공업으로 나뉜다. 면방직 사업은 가벼운 것을 만드는 경공업에 속한다.
면방직 업계는 당연히 의류 및 패션 업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전염병으로 인해 크게 바뀐 소비 트렌드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전염병으로 인해 실외 활동이 줄어들면서 의류 매출이 줄어들었고, 특히나 아웃도어 등 실외활동 의류 매출이 급감했다.
섬유 중간원자재를 생산하는 면방직 산업의 주요 경쟁력은 바로 원가다. 즉, 얼마나 싼 값에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24번째 기업은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정부 지원에 힘입어 성장했으나, 이후에는 선진국들의 고품질 전략과 후발국들의 값싼 대량 생산으로 인해 중간에 끼인 상태가 되고 말았다. 현재 한국 섬유산업이 처해있는 현실이다. 한국의 섬유 제조업체들은 값싼 후발국 제품과의 경쟁을 위해, 인건비가 싼 개발도상국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다. 24번째 기업도 역사 깊었던 한국 공장을 가동 중지하고, 베트남 공장으로 이전했다는 뉴스가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24번째 기업의 매출은 정체 상태다. 섬유 산업 자체가 원체 포화상태인 데다, 인건비와 원가를 줄이는 등의 혁신 외에는 딱히 주목할 만한 돌파구가 없기 때문이다. 24번째 기업 연결재무제표 상의 매출은 3000억이 넘지만, 섬유사업부의 매출은 이중 절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24번째 기업도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포화된 섬유업계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먹거리를 찾은 것이다. 24번째 기업이 찾은 돌파구는, 가동 중지한 공장이 차지하고 있는 널찍한 공장 부지다. 더 이상 공장을 가동하지 않으니, 넓은 땅이 그냥 논다. 24번째 기업은, 이 넓은 땅에 백화점이 들어올 만한 건물을 세웠다.
24번째 기업이 야심 차게 지은 건물은 상당히 크다. 경쟁 입찰을 통해 대기업 건설사에게 공사를 맡겨서, 현대적인 인테리어에 내부 공간도 널찍하게 지었다. 백화점, 백화점에 딸린 온갖 음식점, 호텔까지 들어서도록 처음부터 계산하고 지은 건물인 듯하다. 건물의 이름은 외국스러운 이름을 붙였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꽤나 유명해지면서, 24번째 기업의 건물은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비스무리한 위상을 얻게 됐다. 이 건물은 24번째 기업의 본사를 겸한 건물이 되었다.
24번째 기업은 커다란 부지와 건물의 주인으로서 임대료를 받고, 유명한 백화점과 호텔이 입점하도록 해서 수익을 내고 있다. 이러한 나름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24번째 기업은 일본 등 외국에서 작게나마 부동산 개발사업부문을 운용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24번째 기업의 현재 사업부문은 다음과 같다.
1) 섬유사업부 (총매출의 50%)
전통적인 사업부, 매출 성장 저조, 업계 성장 정체 상태
2) 복합쇼핑몰 사업부 (총매출의 49.9%)
넓은 부지의 건물 임대료 수익 및 관리, 매장 연계 프로모션 및 기획행사 등
3) 기타 사업부 (총매출의 0.1%)
해외 부동산 개발, 오피스 시장 진출 등
그는 24번째 기업에 대해 조사하면서, 자신이 지원한 사류영업 직무에 대한 아쉬움이 점점 더 커진다. 성장세가 많이 꺾인 섬유사업부에 속해있는 직무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보수적이고 정적인 24번째 기업 특성상, 다른 사업부들도 그리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사업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섬유사업부보다는 복합쇼핑몰 사업부에 더 기회가 많을 것이라 예상하는 그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잡X레닛의 리뷰를 통해서 더욱 공고해진다. 섬유사업부는 정적이고, 급여도 낮은 편이며, 근무 만족도도 높지 않다. 섬유사업부 현직자들조차도, 섬유사업부보다는 복합쇼핑몰 사업부로 지원하는 편이 미래가 밝다는 평이 많다.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현실의 그는 잘난 것 하나 없는 취준생이다. 지금까지 본 면접 중, 최종 합격한 기업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어디라도 붙여주기만 하면 감사해야 할 판에, 이리저리 재는 것은 맞지 않다고 애써 불만을 억누르는 그다. 애초에 채용 공고에도 사류영업만 있을 뿐, 복합쇼핑몰 사업부 직무는 아예 없었다.
일단 입사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맡은 바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열릴 수도 있다. 그가 보았던, 밝은 미래를 걷고 있다는 수많은 직장인 유튜버들이 그랬다. 열심히 일했더니 새로운 직무로의 길이 알아서 열렸노라고. 열심히만 했더니 알아서 유망한 직무로 옮겨오게 됐다는 증언들이다. 그는 이러한 증언들을 믿는다. 섬유사업부 사류영업팀에 일단 입사해서, 맡은 바 직무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상급자가 그를 알아보고는 유망한 복합쇼핑몰 사업부로 옮겨주리라.
그는 역사 깊은 24번째 기업에 입사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면접 준비에 열을 올린다. 그의 상상 속 24번째 기업 선배들은, 연봉이 크진 않더라도 자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열심인 사람들이다. 오래도록 자란 뿌리 깊은 나무처럼, 거센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은 꿋꿋한 24번째 기업을 동경하는 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의 상상과 현실이 일치할지의 여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 할 일이었다. 24번째 기업이 그가 생각한 것처럼 굳세고 뿌리 깊은 나무였을지, 아니면 그저 오래되어 고이다 못해 썩은 나무였을지 말이다.
면접 당일, 그는 24번째 기업 본사에 들어선다. 24번째 기업이 야심 차게 지은 복합쇼핑몰이자 본사 건물이다. 쇼핑을 하러 온 소비자라면, 문에서 직진해서 건물 중앙 탁 트인 공간으로 향한다. 면접을 보러 온 그는, 출입구 귀퉁이의 구석진 복도로 빠진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둘 있다. 그는 3층으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