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와 직무가 본인에게 맞는가
얼마 뒤, 28번째 기업으로부터 1차 면접 결과가 도착한다. 결과는, 1차 면접 합격이다. 28번째 기업은 메일에 최종 면접에 대해 안내했다. 참으로 오랜만의 1차 면접 합격이지만, 그는 머리가 복잡하다.
면접을 보기 전부터, 그는 의류/패션업계에 관해 회의적이었다. 면접을 보고 난 이후에도 변함이 없다. 옷과 패션은 물론, 꾸미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다. 전혀 관심이 없는, 향후에도 관심을 가질 것이리라 생각되지 않는 업계에 취업을 해도 되는 것일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고민에 대한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뉜다.
1) 자신에게 맞지 않는 업계와 직무에 종사하는 순간부터 고통이다. 버려라.
2) 취업도 어려운데, 이것저것 가릴 때냐. 일은 일이다. 어차피 일이 되는 순간 다 싫어진다.
그는 첫 번째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군대 시절, 할당된 보직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군생활 내내 고생한 기억이 있는 그다. 전역이 다 되었을 즈음에는, 입에 욕이 붙어버려서 욕을 떼어내는 데도 꽤 오랜 시간 고생했다. 그래서 그는 28번째 기업에 대해 고민이 많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사치인 것은 아닐까. 그의 취업 준비 기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
28번째 기업은, 여러 부분에서 그와 맞지 않는다. 속해 있는 산업군, 영위하고 있는 업종, 면접을 통해 은근히 엿본 사내 분위기가 그것이다. 그가 생각한 28번째 기업의 유일한 장점은,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할 정도의 연봉이다. 채용 공고와 잡X레닛을 통해 보니, 28번째 기업 신입의 연봉은 대략 5000만 원이 넘는단다. 그는 4000만 원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참이다.
28번째 기업은, 의류 벤더사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야근이 많아 워라밸이 열악하다. 발주를 넣는 글로벌 패션 브랜드들이 외국 회사이므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그들이 일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시차가 있는 미국 발주사의 경우는, 새벽 전화가 일상이라는 리뷰가 많다. 게다가 새로운 의류가 출시될 일정이 다가오면, 새벽 야근이 필수란다.
그는, 새벽 야근이니 워라밸이 열악하다느니의 여부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물론 야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워라밸도 좋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이 그런 조건들부터 따지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스스로의 커리어를 위해서도, 실무에 뛰어들어 실력을 갖추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자발적으로라도 야근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다. 문제는, 그가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고 싶을 만큼 업무에 동기부여가 되는가다.
그의 경우는 아니었지만, 사실 의류 벤더사에 취업을 희망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다. 특히나, 패션 관련 전공자들에게 28번째 기업은 가히 꿈의 직장이다. 의류업계 특성상 어차피 야근이 기본인데, 똑같이 야근을 하면서도 28번째 기업은 연봉을 높이 챙겨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높은 연봉도, 야근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포괄연봉제(야근에 상관없이 고정된 연봉)로 산정한 연봉이었기 때문에 야근한 시간을 따지면 결국 시간당 임금은 최저임금에 가깝다고들 한다.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은, 28번째 기업에서 일을 하고 싶은 동기와 의미다. 그는 28번째 기업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진다. 28번째 기업 직원들의 직무 인터뷰를 모조리 읽고, 유튜브에서 '의류 벤더사 해외영업'을 검색하여 브이로그를 본다.
직무 인터뷰와 브이로그를 보았을 때, 의류 벤더사 해외영업 실무자들이 하는 말들은 대략 이렇다.
- 의류 벤더사 해외영업은, 일반적인 해외 영업이랑 달라요. 생산 관리라고 보는 게 더 맞아요.
- 매일 원단 들고 뛰어다니고, 샘플 자르고 붙이는 게 일이에요.
- 원단 샘플 잘라서 바이어한테 보내고, 바이어가 이 원단 아니라고 하면 다시 원단 찾아서 샘플 잘라서 붙이고 보내요.
- 빡센 바이어 만나면 정말 고생해요.
- 고생하긴 하는데, 돈은 많이 받아요. 근데 돈을 쓸 시간이 없어서, 돈이 쌓이긴 쌓여요.
- 힘들긴 해도, 보람을 느끼는 때가 있죠 당연히.
- 제가 맡았던 브랜드의 옷이, 매장에 진열될 때 정말 기뻐요!
- 바이어 최종 승인받고, 옷이 제작되서 매장에 진열될 때 정말 보람을 느껴요!
직무 인터뷰와 브이로그를 보면 볼수록, 그는 가슴이 답답하다. 실무자들이 이야기하는 일의 보람과 의미라는 포인트 중 단 하나도, 그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실무자들은 대부분 패션 전공자이거나,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패션과 옷에 대한 열정으로 샘플을 자르고 붙이고, 해외 디자이너들의 주문대로 옷을 만들어서 매장에 진열될 때 그간의 고생을 잊고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의류 벤더 실무자들의 브이로그와 직무 인터뷰를 보며 그는, 자신과는 다른 종교를 가진 신도들을 보는 것처럼 낯설고 생소하다.
일단 1차 면접을 합격하여 최종 면접 안내를 받았으니, 그는 면접 준비를 하긴 한다. 하지만, 면접 준비를 하면서도 그는 가슴이 답답하고, 28번째 기업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수록 막막하다. 5000만 원이라는 고액 연봉만이 면접 준비의 동력일 뿐이다. 합격을 해도 걱정인 상황, 그는 이런 상황을 이미 겪은 적이 있다. 바로 24번째 기업 때다. 다시 생각해보니, 24번째 기업도 의류는 아니었지만 실과 섬유를 만드는 기업이었다. 24번째 기업 때도, 갑갑한 업계와 면접 분위기가 문제였다. 28번째 기업은 24번째 기업보다는 나잇대가 젊고 연봉도 높지만, 그를 짓누르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럴 바엔 차라리 지원 자체를 하지 말걸, 1차 면접부터 떨어졌으면 좋았을걸'
최종 합격하지 않았음에도, 또 그가 최종 합격할 만한 인재인지 아무도 보증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는 억지로 면접 준비 자료를 붙잡고 앉아 다짐한다. 만일 회사에 붙는다면, 잘 모르겠다. 연봉이 5000만 원에,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지고 있으니 붙는다면 가긴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떨어진다면, 그는 의류/패션업계에는 결코 다시 지원하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