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경험 어필
면접자 : 그 혼자
면접관 : 총 2명, 모두 정장 차림이며 남자
좌측, 갸름한 달걀형 얼굴, 구릿빛 피부, 표정 변화가 없고 말이 적은 30대 후반 면접관 1
우측, 동그란 얼굴, 올백으로 넘긴 머리, 하얀 피부, 구렛나루가 진하고 인상이 좋은 30대 후반 면접관 2
면접관 2가 콧수염이 조금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면접관 2는 표정 관리를 잘하는 것인지, 말투와 표정이 굉장히 젠틀하고 우호적이다.
그 : (입장하며) 안녕하십니까!
면접관 일동 : 안녕하세요.
면접관 1 : 자리에 앉으세요.
그 : 네!
자리에 앉는다. 면접관들은 책걸상에 앉아있으며, 그는 가림막 없이 의자에만 앉는다.
면접관 2 : 네,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 : 네, 안녕하십니까! 34번째 기업 지원 직무에 지원한 지원자 하. 얀. 얼. 굴. 입니다! 저는 두 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실행력입니다. 저는 워킹홀리데이 기간...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인 공놀이를 통해... ... 이상, 두 가지 강점, 실천력과 친화력을 통해 34번째 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지원자 하. 얀. 얼. 굴. 입니다. 감사합니다!
(읽은 도서 목록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와 분석력을 어필하는 즉흥 1분 자기소개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확실하지는 않다)
이 날의 면접은, 직무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면접이 아니었다. 또한 면접관 2는, 진심인지 연기인지 그의 독서 경험에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자기소개서와 PPT 답변을 보니, 독서를 많이 하시는 것 같네요.
그 : 네, 맞습니다.
면접관 2 : 1년에 얼마나 읽었나요?
그 : 전염병 이후부터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77권, 올해는 약 40권 정도 읽었습니다.
면접관 2 : 올해는 조금 줄었군요.
그 : 취업 준비를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면접관 2 : 1년에 70권이면... 단순히 계산해도 일주일에 1권씩 읽어야 하네요.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인데. 독서를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그 : 전염병 이후, 밖에 나가지 못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 많아진 시간을 무엇을 하며 채울까 고민하다, 어릴 적부터 관심은 있지만 제대로 해보지는 못한 독서를 선택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면접관 2 : 책을 읽어보니 어떻던가요?
그 :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만, 세상과 인간에 대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서량이 어느 정도 쌓이면서 읽은 도서 목록을 작성했고, 해당 목록을 바탕으로 독서 활동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 2 : 아, 도서 목록. 자기소개서에도 써준 내용이군요.
그 : 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면접관 2 : 네.
그 : 독서는 분명 바람직한 행위이지만, 문제는 이를 다른 이들에게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단순히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도서관에서 쓰이는 KDC, 한국십진분류법에 따라 읽은 도서들을 정리했습니다. 0번부터 900번까지, 100 단위 대분류가 나뉘는 분류법입니다. 공공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으실 때, 컴퓨터에서 검색하시면 나오는 도서 청구번호가 바로 이 KDC 번호입니다.
면접관 2 : 아 맞아요. (알고 있는 듯하다)
그 : (부가 설명을 위해) 0번은 총류, 100번은 철학, 200번은 종교, 300번은 사회과학, 400번은 자연과학 이런 식으로 분류를 한 십진분류법입니다.
면접관 2 :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요 맞아요.
그 : 처음에는,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읽고 싶은 책들은, 정리를 하며 보니 주로 300번대 사회과학 책들이었습니다. 사회는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발전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총, 균, 쇠'가 대표적인 300번대 사회과학 분야 도서입니다.
면접관 2는 그에게 홀린 듯 보인다. 그는 더욱 심취해서 말을 계속한다.
그 : 300번대 도서를 읽고, 400번대 자연과학 도서도 읽었습니다. 사회 이후에는 인간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다윈의 '종의 기원' 등이 400번대 자연과학 도서입니다. 어느 정도 독서량이 쌓인 뒤, 저는 읽은 도서 목록을 작성했습니다. 도서관의 십진분류법에 따라 제가 읽었던 책들을 정리하니, 일정한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독서량의 약 60퍼센트 정도가 300번(사회과학)과 400번(자연과학)에 편중되어 있었고, 그다음으로 문학 등이 차지했습니다. 제가 재밌게 읽은 도서, 재미없게 읽은 도서들의 분포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읽은 도서 목록 작성을 통해 이러한 정보들을 추출하여, 그동안 흩어져 있던 저의 독서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독서 방향까지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 2 : 그, 도서 목록 작성을 통해 독서 활동이 정리가 되었군요. 지금 말씀하신 걸 들어보면, 주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쪽 독서를 하신 것 같아요. 향후에는 어떤 방향으로 독서를 할 생각이신가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야기하신 이 책들이, 방향성을 갖고 읽은 건가요 아니면 그냥 마음가는 대로 읽은 건가요?
그 : 말씀하신 두 가지 모두 혼재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마음가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읽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파생되는 독서들을 하다 보니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향후에는 물론 지금처럼, 계속해서 관심 있는 분야의 도서를 지속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도 읽은 도서 목록을 보니, 철학/종교/예술 등 독서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분야도 보였습니다. 이러한 분야들도, 균형 있는 독서를 위해서 앞으로 독서를 추가할 생각입니다.
면접관 2 : (고개를 끄덕이며) 음, 알겠습니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PPT 문제 답변에서, AI의 발달로 업무 자동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하셨어요. 유통업에서 자동화할 부문은 무엇이며 자동화되지 않을 부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그 : 제가 답변에 서술한 것처럼, 단순한 업무들은 대부분 자동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물류 창고에서 상하차도 일일이 손으로 하지 않고 레일에서 인식해서 자동으로 알맞는 트럭으로 가게끔 기계가 분류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하차를 비롯하여, 자율주행 등 AI가 도입되면 물류의 많은 부분이 자동화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세스들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것은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프로세스를 구축할지, 각 프로세스에서 취합되는 정보들이 무슨 뜻인지 의미를 도출하는 일은 AI가 자동화하기 쉽지 않으며, 가능하다 하더라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면접관 1이 입을 연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독서도 많이 하시고, 유통업 관련해서 많이 조사하신 것 같아요.
그 : (유통업 조사는 하지 않았다) 아, 감사합니다.
면접관 1 : 앞으로 유통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하얀 얼굴 씨가 자유롭게 상상한 바를 말씀해보세요.
이때 당시는, 그가 유현준 건축가에게 빠져 '공간의 미래' 등의 도서를 읽었을 때다. 유통업에 대해 조사해온 바가 없으니, 그는 책에서 읽은 저자의 생각을 그냥 외워버리기로 한다.
그 : 최근 관심 있게 읽었던 책의 내용을 참고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유현준 건축가)는 앞으로 물류가, 지상이 아닌 지하에서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흔히 보였던 길거리 전깃줄들이 땅 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처럼, 지금 도로 위의 커다란 화물 트럭들로 이뤄지는 물류가 지하에서 더 효율적으로 이뤄질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드론으로 대체될 수도 있습니다만, 드론의 경우 소음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통물류가 지하에서, 화물 트럭 크기가 아니라 조그만 터널에서 효율적이고 빠르게 이뤄진다면, 기존에 화물 트럭들이 차지하고 있던 지상 도로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빈 도로만큼의 공간을 새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됩니다. 앞으로의 유통업계는, 물류를 지하로 내리고, 물류가 차지했던 지상 도로 공간을 오프라인 점포 등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면접관 1 : (표정 변화 없이) 알겠습니다.
면접관 2 : 네 그럼, 이상으로 면접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 감사합니다!
면접 대기실로 돌아가니, 인사팀 직원이 면접비와 함께 무슨 꾸러미를 준다. 면접비는 만 원, 꾸러미에는 과자와 차 등이 들어있다. 면접관 2의 우호적인 반응 앞에서 열심히 독서 경험을 어필한 그는, 기분 좋게 면접비와 꾸러미를 받는다.
면접관 2가 매우 호의적으로 반응하긴 했지만, 그러한 반응과 면접 결과는 별개인 경우가 많다. 그는 면접을 복기하며, 크게 실수한 부분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면접관 1이 질문한 '유통업계의 미래'가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으나, 그는 저자의 생각을 차용하며 비교적 부드럽게 넘겼다. 실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면접을 잘 봤다는 확신이 드는 것도 아니다. 또한 만일 합격하더라도, 그는 34번째 기업이 아리까리하다.
어찌됬든 그는 이 날 하루 동안 33번째 기업과 34번째 기업에서의 면접을 소화해냈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면접을 준비한다. 자고 일어나면, 그를 기다리는 면접이 또 있다. 35번째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