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36번째 기업이, 대형 건설사에 취업할 마지막 기회라는 예감이 든다. 그래서 면접 준비를 더욱 철저하게 하려 한다. 그는 이미 대형 건설사 면접도 봤고, 중소형 건설사 면접도 봤다. 이전처럼 두터운 면접자료를 만들어 달달 외는 것은 익숙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계속 탈락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의 머릿속에서, 어느 취업 유튜버가 그토록 외치던 '현업자 인터뷰'가 떠오른다.
현업자 인터뷰. 취준생 혼자 백날 끙끙 앓아봤자 현업자를 한 번 만나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다만, 그런 현업자를 도대체 어디서 찾아서 어떻게 만나나. 이런 생각에 그는 가끔 대리점이나 전시회만 찾아갔을 뿐, 어떻게든 줄을 대어 현업자를 만나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취업이 너무 절박하니, 결국 그도 인맥을 쓴다. 가끔씩 스쳐지나가며 인사하는 어린 시절 동창 중, 건설사에서 일하는 동창이 있다. 'ㅂ'이다. ㅂ과 그는 취업준비 기간도 약간 겹쳤었다. 36번째 기업 면접 준비 자료를 만들며, 그는 ㅂ이 떠오른다. ㅂ은 이공계 학생으로, 그가 지원하는 직무에 종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ㅂ의 회사에도 사업원가관리 직무를 맡은 직원이 있을 것이다. ㅂ에게는 미안하지만, ㅂ을 통해 해당 직원과 연락을 해보려는 그다.
얼굴도 알고, 인사도 나누는 동창이지만 그는 ㅂ의 연락처가 없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어떻게든 ㅂ과 닿을 수 있는 선이 있다. 그는 ㅂ에게 연락한다.
그 : ㅂ 나 하얀 얼굴이야
ㅂ : 오 무슨 일이야
그 : 잘 지내고 있어?
ㅂ : 나야 잘 지내지
그 : 갑자기 이렇게 연락해서 미안한데, 지금 건설사 면접 앞두고 있어서 좀 물어보려고
ㅂ : 아아 오키
그 : 혹시 회사에 사업원가관리 직무하시는 분 알아?
...
그는 오랜만의 연락인데 다짜고짜 취업 관련 부탁부터 하는 것이 미안하다. 하지만 ㅂ은 이해해주는 눈치다. 그는 ㅂ에게, 현직자와 직접 만날 수 있다면 제일 좋고 그게 안된다면 연락처라도 받을 수 있냐고 묻는다. ㅂ은 직무 관련 내용이 궁금한 것이냐며, 일단 알겠다고 한다.
약 일주일 뒤, ㅂ에게서 연락이 온다. ㅂ은, 본인의 회사에는 딱 맞아떨어지는 직무는 없다고 하며 사진 두 장을 보낸다. 카카오톡 화면 캡처본이다.
(원가관리 직무 관련해서 물어본 듯하다)
ㅂ지인 : 처음 견적 금액 짜고 실행률 확인하고 금액 청구하는데
ㅂ : 금액청구는 대상이 누구야
ㅂ지인 : 사업주랑 협력업체지
ㅂ : ㅇㅇ 중고신입 많이 올거같은데
ㅂ지인 : 사실 견적이 중요하지 파견비용 등등 어떻게 짜느냐인데
ㅂ : 아 그거 원가관리가 하는 거구나 공사원가는
ㅂ지인 : 그것도 원가관리가 하지
...
대단한 정보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사실 별 정보는 없다. ㅂ은 캡처본만 보내놓고 말이 없다. 그는 단박에, 이 지인이라는 현직자를 직접 만나볼 수도, 연락처를 받을 수도 없으리라고 직감한다. 그리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신경 써준 것이니 그는 ㅂ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이참에 밥이라도 사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말에 갑작스럽게 저녁 약속이 잡힌다. 그는 간만에 어릴 적 동창을 만난다는 생각에 나름 기대가 된다.
어느 날 저녁, 그와 ㅂ은 약속 장소에서 만난다.
그 : ㅂ! 이게 얼마만이야
ㅂ : 그러게
그 : 잘 지냈어?
ㅂ : 그럭저럭 지냈지
둘은 식당가 쪽으로 걸어간다
ㅂ :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 : 나는 딱히 없는데. 가다가 괜찮아 보이는 거 먹자
ㅂ : 밥 많이 먹어?
그 : 나는 많이 먹는 편이지
ㅂ :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뭐 먹고 싶어
그 : 글쎄 고기?
ㅂ : 그래 고기 먹자
ㅂ은 가고 싶었던 고깃집이 있었던 듯하다. 나름 고급스러운 고깃집으로 향한다.
ㅂ : 둘이서 반반 내자
그 : 그래 그러자
손님이 많아, 그와 ㅂ은 잠시 웨이팅을 한다. 그런데 웨이팅을 하는 도중
ㅂ : 야 원래 너가 낸다고 했잖아
그 : ?? 아 그렇지 그럼 내가 낼게
ㅂ : 아냐 너 취준 중인데 반반 내
그 : ??
웨이팅이 끝나고 자리에 앉는다
ㅂ : 뭐 시킬래?
그 : 글쎄 고기 3인분?
ㅂ : (피식,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는다) 아냐 두 개만 시켜
그 : ?? 그래
그는 ㅂ의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는 이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고기 2인분이 나오길 기다리며, 그와 ㅂ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는 ㅂ에게서 건설사 관련 면접 팁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 : 서류 여기저기 많이 냈다. 면접도 많이 봤는데 다 떨어졌다.
ㅂ : 분명 너가 떨어진 이유가 있어. 그 이유를 생각해봐야 돼. 나는 면접 3번 밖에 안 봤어. 그 3번 본 것도 내가 일일이 다 분석을 했어.
그 : 나도 분석을 하긴 했지. 그런데 최종에서 주가 물어보고 떨어뜨리기도 하더라고.
ㅂ : 아니, 그게 아니지. 주가를 몰랐어도 거기에 대해 더 얘기를 했어야지. 면접관이 듣고 싶은 건 그게 아냐. 너가 이 회사랑 업계에 관심 있다는 걸 어필했어야지.
그 : 했지.
ㅂ : 뭐라고 그랬는데? 주가는 모르지만 이러이러하게 업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러이러한 것도 찾아보고 지금 업계 현황도 알고 있습니다 라고 했냐?
그 : (29번째 기업 최종 면접을 회고했을 때 도저히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 기업에서는 안 그랬지만 대부분 어필했어.
ㅂ : 아냐. 넌 안 그랬어. 그게 아냐.
그 : ??
고기가 나온다. ㅂ이 원한 딱 2인분이다. 이 고깃집은 1인분이 꽤 비싼 편이며 양이 적다. 고기의 질은 좋아 보인다. 고기는 직원이 직접 구워준다. 돌이켜보면, 차라리 직접 고기를 굽는 곳을 갔더라면 고기를 굽느라 이야기를 덜했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게 더 나았을 성싶다.
ㅂ의 태도와 말투가 쎄하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면접 이야기를 한다. ㅂ은 가만히 듣는가 싶더니, 자꾸만 피식피식 웃기 시작한다. 그가 고기를 3인분 시키자고 했을 때의, 입꼬리 한쪽이 올라가면서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던 바로 그 피식거리는 웃음이다. 그는 일단 내버려 두었는데, ㅂ의 피식거리는 횟수가 점점 많아진다.
그 : 그래서 면접을 보는데
ㅂ : (피식)
그 : (ㅂ을 똑바로 쳐다보며) 야 너 웃지마. 뭐가 웃기다고 자꾸 웃냐
ㅂ : 아니. 계속 얘기해봐
무언가 이상하다. 그도 낌새를 알아차리고는, 말을 줄인다. 대강의 파악은 끝났다는 듯, 이번에는 ㅂ 쪽에서 그를 향해 질문을 한다. 그가 36번째 기업의 채용 전형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는지 일종의 테스트다.
ㅂ : 아 36번째 기업 내가 잘 알지. 너 36번째 기업 면접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아냐?
그 : (안내 메일까지 받았으니 모를 리 없다) 1차 PT 면접에, 2차, 영어 회화 면접 보겠지.
ㅂ : (눈이 커지며) 뭐 PT? 무슨 PT를 봐 (피식)
그 : PT 보는데?
ㅂ : (성질내는 목소리로) 뭔 소리야 내가 예전에 친구 36번째 기업 면접 보는 거 코칭도 해줬는데. PT 없어 똑바로 알아야지
그 : (참고 있던 그도 인내심에 한계가 온다) 뭔 소리야 메일로 PT 본다고 왔구만
ㅂ : 메일이 왔다고?
그 : 그래 메일로 일정 안내 왔다니까.
ㅂ : 뭐라고 왔는데
그 : 하루 만에 한꺼번에 다 본다고 왔지. 순서까지 다 정해져서 왔어 난 임원부터 보더만
ㅂ : (못 믿겠다는 듯이) 임원면접부터 본다고
그 : 아 그렇다니까. (핸드폰을 집어들며) 메일 보여줘?
ㅂ : (끝까지 미덥잖은 표정으로) ... 지금은 모르겠는데 2년 전에는 안 그랬어
그는 대화가 왜 이 모양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ㅂ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따지고 훈계하는 듯한 투였으며, 그도 참지 않았으므로 둘의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마지막 ㅂ이 마지못해 의견을 꺾을 때까지, 그와 ㅂ의 목소리 톤은 높아지고 말도 빨라진다. 거의 싸우는 분위기 직전까지 간다.
ㅂ이 자칭 면접 코칭을 해줬다는 2년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는 현재 36번째 기업으로부터 면접 안내 메일을 받은 상태다. ㅂ은 자신이 틀렸음이 명백함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애초에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를 까내릴 구석만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동창이, 이런 류의 인간이 아닐 것이리라고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대화를 할수록 점점 더 명백해진다. 그는 이러한 부류의 인간과 상황을 알고 있다. 자신보다 약하고 우스워보이면 한없이 선을 넘으려 하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타입. 그가 알고 있던 어린 시절 동창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의 눈앞에 있는 동창의 모습이 갑자기 낯설다. 불량스러운 일진 양아치처럼 보인다.
전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ㅂ은 무리하게 그를 까내리려다 저지당해 주도권을 잃은 셈이다. 채용 전형 미숙지로 갈구는 것에 실패하자, ㅂ은 그를 갈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듯하다. 그래도 동창이니 한 번 더 믿어보려 했지만, 그가 느끼는 불길하거나 더러운 예감은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다. ㅂ은 두 번째 전략을 쓴다. 본인이 면접관이라도 된 마냥, 면접관 행세를 한다.
한번 기세가 꺾여 누그러지긴 했으나, 이후 그가 조언을 구하는 자세로 나오자 ㅂ은 다시 본성을 드러내려 한다.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를 향해, ㅂ의 피식거림과 업신여김은 다시 슬금슬금 늘어난다. 한번 더 꺾어버려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나. 이 정도로 대화가 안 통하고 대화하기 싫은 경우는 처음이다. 무엇 때문에 그에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는 것일까.
그는 많은 것을 내려놓는다. 눈앞의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를 없애버리고, 어떻게든 면접 관련하여 뽑아먹을 것이 있는지 찾는 쪽으로 방향을 급선회한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보니, 어렸을 적 추억팔이를 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
ㅂ : 너 경험이 그렇다니까 뭐 내가 할 말은 없는데. 나 면접 볼 때 면접관이 나한테 그랬어. 나 편입한 거랑 대학교 보더니, ㅂ 씨는 고등학교 때 공부 안하셨나봐요? 그게 내 두 번째 면접이었고 난 완전히 멘탈이 나갔어. 진짜 이런 식으로 면접 봤다가는 무조건 탈락하겠구나 싶었어.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이랑 면접관들 생각을 엄청 팠어. 저 나이대 사람들은 어떤 말을 듣고 싶어 할까, 어떻게 내 인생을 저 사람들한테 각인시켜야 할까.
ㅂ : 입사하고 나서 내가 우리 팀장님한테 물어봤어. 왜 나를 뽑았냐고. 나랑 같이 면접 본 애들 다 나보다 스펙 좋은 애들이었어. 팀장이, 임원들이 다 스펙 좋은 애 뽑고 싶어 했는데 팀장이 밀어붙여서 나 뽑았다고 했어. 팀장이 나더러, 너는 니 이야기를 참 잘한다고 했어.
(후에 그가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하자, 친구는 그 팀장이 사람을 다룰 줄 안다고 했다)
ㅂ : 니 이미지는 니가 만드는 거야. 생각해봐 너가 면접관이야. 면접관이 너에 대해서 뭘 알아. 근데 묻는 말에 이상하게 대답하면 넌 그냥 색깔 없는 지원자가 되는거야. 질문 하나하나의 의도가 뭔지 생각을 해. 이 질문을 왜 했을까,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았을까를 생각해야지. 나는 면접 떨어지면 내가 했던 답변 싹 다 갈아엎었어. 너도 너가 계속 떨어지는 건, 너의 방법을 싹 갈아엎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냉정하게, 그는 이 말이 일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ㅂ : 내가 면접 코칭해준 친구들 다 잘 갔어. 포X코건설도 가고 한X건설도 갔어. 내가 포장한 답변 그대로 얘기해서 붙었어. (본인 얘기가 자랑스러운 듯 처음으로 웃으며 말한다) 너도 집에 가서 너가 만들어놓은 답변들을 정리하고 시나리오를 계속 구상해봐. 혹시 기억이 안 나면 나한테 물어봐. 나 그런 거 포장 기가 막히게 하니까
ㅂ : 나는 취업준비 기간을 '내 자신에 대해 돌아보는 기간'이라고 생각해. 너 면접 때 마지막 말하라고 하면 뭐라고 그래?
그 : 뭐 코로나인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
ㅂ : 뭐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거 좀 하지마. 나는 이렇게 말했어. 이번 면접을 준비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했어
그 : (그게 그거 아닌지, 그다지 크게 낫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ㅂ : 너, 자기소개랑 면접 질문 들어오면 뭐라고 답해
그 : (그의 답변대로, 호주 워킹홀리데이와 공놀이 경험에 대해 말한다)
ㅂ : 내가 보기에, 너는 답변이 너무 뻔하고 인싸이트가 없어. 니 인싸이트를 섞어서 듣기 좋게 말을 해야지
그 : (어이가 없지만, 참는다) 너는 어떻게 대답했는데?
ㅂ : 나는 내가 대학교 카멜레온이라고 했어. 편입하고서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내가 먼저 다가가서 친화력을 길렀다. 술자리나 모임 다 참석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나중에 XX대학교 카멜레온이라고 불렸다.
그 : ...
ㅂ : 나는 취미도 등산이라고 해. 나 등산 안 해. 그래도 등산이라고 하고, 이렇게 말해. 저의 취미는 등산입니다. 산을 올라,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그 성취감을 즐깁니다. 또한, 등산이 끝난 뒤의 막걸리 한 잔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더욱 즐깁니다. 이렇게 말하면 면접관들이 좋아해.
그 : (포장을 하긴 하는구나 생각한다)
ㅂ : 워홀, 공놀이. 그래 공놀이 좋지. 하얀 얼굴이 공놀이 좋아하지.
그 : ... (그는 이 부분이, 자신을 약간 비꼬는 것이라고 느낀다)
ㅂ : 넌 너무 내용이 길고 포인트가 없어.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봤자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 너가 호주 워킹홀리데이 중에 뭔가 진짜 이 정도로 해봤다 싶은 거만 딱 얘기해.
그 : (어떻게든 뽑아먹고자) 맞는 부분이 있네. 그때 잠깐 2달 정도 돈 벌려고 공장이랑 청소 병행하면서 16시간 일한 적 있어.
ㅂ : (또 꼬투리를 잡은 듯) 아니, 회사 들어오면 16시간 아무것도 아니야. 괜히 그런 얘기하면 면접관들이 보기엔 그냥 애기 같아. 그러니까 16시간 이런 말 하지 말고, 그냥 뭉뚱그려서 그렇게 했다고 말해.
그 : ...
ㅂ : 우리 회사 상사들이, 면접 들어갔다오면 애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는데, 나도 이제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애들이 대학교 졸업하고 그냥 와서, 답변하는 게 생각이 없어. 완전 그냥 애들 같아
ㅂ : 학점 관련해서도 뭐라 그럴거야. 학점 자격증? 나도 학점 낮아. 난 이렇게 말했어. 인정할 건 인정하고. 맞습니다. 전 대학교 시절, 공부보다 대외 활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러이러한 대외 활동들을 했습니다. 라고. 너도 워홀 그런 거 있으니까 그럼 이렇게 말해. 대학생 시절 학교 내에서 배우는 수업보다 학교 밖에서의 경험을 쌓고 싶었습니다. 라고.
그 : 그래서 이러이러한 경험을 했고, 후회는
ㅂ : 후회는 없습니다 라고
ㅂ의 태도는 여전히 적대적이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기세가 한풀 꺾여 누그러진 상태다. 또한, 그가 입을 다물고 ㅂ의 이야기를 들으며 뽑을 것만 뽑아내려는 전략을 취하니, 그다지 크게 충돌할 거리는 없다. 중간중간 양아치스러운 태도가 튀어나오긴 하나, ㅂ 자신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ㅂ도 본인의 취업준비생 시절에 나름 자부심이 강한 듯하다.
하지만 ㅂ의 근본적 태도는 그대로였으므로, 그와 ㅂ 사이의 분위기는 꽤나 냉랭하다. ㅂ은 그를 쳐다보지 않고 고기를 먹으며 본인 이야기를 하고, 그는 아주 가끔씩만 묻고 싶은 것을 물으며 고기를 먹는다. 눈앞의 상대와 대화가 이 모양이니, 그는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고기 자체는 꽤 맛있는데,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와 ㅂ은, 처음 시킨 고기 2인분만 딱 먹고는 나온다. 남자인 친구와 둘이 고깃집에 가서 공깃밥도 무엇도 없이 고기만 딱 2인분을 먹고 나올 수 있다니, 그에게는 이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도 그렇고 ㅂ도 그렇고 어지간히 이 자리가 싫었나 보다. 그가 계산하겠다 했지만, 결국 절반씩 한다.
고깃집에서 밖으로 나온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공기가 사뭇 다르다.
그 : (인사치레마냥) 회사는 어때
ㅂ : 뭐 같지. 탈건해야돼
탈 건설, 건설업계 종사자들은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고들 한다.
그 : 야근도 하고?
ㅂ : 야근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 건설이면, 해외 현장도 나가지 않나?
ㅂ : 나가지. 나는 베트남 갔다왔어.
그 : 어땠어
ㅂ : 나름 괜찮았지. 조금 낯설긴 했는데... ... (6개월 정도 다녀왔다는 듯하다) 그리고 확실히 현장 나가니까 돈을 많이 줘. 한 달에 통장에 500 찍히더라
그 : (부럽다)
그 : (무심결에) ㅂ, 술도 좋아해?
ㅂ : 좋아하지. 왜 한잔 할래?
그 : (아차 싶어) 응? 아 아냐.
ㅂ : 잠깐 담배 좀 피자
ㅂ은 편의점에 들어갔다 나온다. 담배를 피며, ㅂ의 과외가 다시 시작된다.
ㅂ : (담뱃불을 당긴다) 후- 너 EPC가 뭔지 알아?
그 : Engineering, Construction. P가 기억이 안 나네.
ㅂ : P는 Procurement(구매)야. EPC중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런 거도 물어본다고. 뭐라고 답할 거야?
그 :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ㅂ : (그럴 줄 알았다는 듯) Engineering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해. E가 부가가치가 가장 크다고. 처음 설계할 때 배관이 돌아가야 되는 거를 직선으로 설계하면, 설계할 때 하루가 현자에서는 열흘을 아껴. 또 돌아갈 배관을 없앴으니까 원자재도 덜 써서 원자재값도 아끼고.
그 : (외워둔다)
ㅂ : 너 Turn key가 뭔지 알아?
그 : (외웠음에도) 알았는데 기억이 안 나네.
ㅂ : 야 이런 거도 모르면 어떡하냐? 처음에 돈을 받고서 설계 시공까지 다 완료된 상태에서 주는 게 턴키야. 턴키, 럼썸을 주로 써.
그 : (외워둔다)
ㅂ: 너 건설업 왜 지원했어? 동기가 뭐야?
그 : 음,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짓는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
ㅂ : 그런 뜬구름 잡는 얘기하면 들리지도 않아. 이렇게 얘기해. 건설업이 성취도가 높은 산업이라 그랬다고 해.
그 :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ㅂ : 나는 취업 준비할 때, 하도 열심히 정리하고 분석해서 나에 대한 틀이 잡혔어. 취업준비 기간이 오히려, 나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이야. 나는 앞으로 어떤 면접을 봐도 붙을 자신이 있어. 물론 운에 좌우될 수는 있겠지. 그래도 나는 자신 있어
그 : ...
그와 ㅂ은 집을 향해 걷는다. 방향이 비슷하다.
그 : 회사에서 임원도 해볼 생각이 있어?
ㅂ : 나도 처음 입사했을 때는 임원까지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임원 달 생각이 없어졌어. 회사원은 다 Yes맨이야.
그 : 임원도 Yes맨이야?
ㅂ : 아 당연하지. 하 얘 뭘 모르네. Yes맨이니까 임원을 하는거야.
그 : 근데 사업을 해도 Yes맨이지 않나. 음식점 같은 걸 해도 손님 응대해야 하니까.
ㅂ : 야 사업이 음식점 밖에 없냐?
그 : (다시 나오는 양아치스러움에 말문이 막힌다)...
ㅂ : 야, 취업이 끝이 아니야. 취업하고 나면, 그다음은 재테크야. 나도 재테크 공부하고 있어. 그래서 빨리 은퇴해서 전업투자자할 거야
그 : 전업투자자도 쉽지는 않은 거 같다
ㅂ : 야, 다 니 하기 나름이야. 전업투자자로 성공한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데
이후 둘은 말없이 걷는다. 그는 원래 ㅂ을 집까지 바래다주려 했다. 하지만 대화를 하며 생각이 바뀌어, 그냥 먼저 보낸다. 멀어져 가는 ㅂ의 뒷모습에, 그래도 그는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 말한다. ㅂ이 그의 인사에 반응했었는지 여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아무래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굳이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하나, 후에 감정을 추스르고 나니 그래도 최소한의 도리는 했다는 생각이다.
그와 ㅂ은 취업준비 기간이 약간 겹쳤었다. 해당 기간, 그는 아주 가끔 길거리에서 취업준비생인 ㅂ을 본 적이 있다. ㅂ도 그 시절에는 축 쳐져 있었다. 힘들다, 열심히 하자, 우리 파이팅이다 같은 소리를 힘 빠지게 하곤 했다. 그랬던 ㅂ이, 취업을 하고는 기고만장해서 자신이 면접관인 양 오랜만에 만난 동창에게 뻗대고 있다.
그에게 이 날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ㅂ의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자존감이 낮으면, 간만에 만난 동창 앞에서까지 그러겠냐는 것이다. 똥 밟은 셈 치라고 한다. 그의 생각도 같다. 친구와 이야기하며 그는 탄식한다. 만나야 할 소중한 사람들은 취업준비한답시고 멀리하고, 그는 스스로 똥을 찾아가 직접 즈려밟아본 것이구나.
먼저 성체가 되어, 올챙이에게 뻗대는 개구리가 있다. 올챙이 적 기억을 못 하는 것인가. 아니, 오히려 올챙이 적 기억을 하기 때문에 더 뻗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올챙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잘 극복했다. 근데 아직도 올챙이라고? 니가 잘못했네. 나처럼 안 하지? 거봐 나처럼 안 하니까 니가 올챙이지.
취업이라는 것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성취다. 이런 조그마한 성취에도 사람은 괴물로 변한다. 애초에 시작부터 괴물이었다면, 차라리 감흥이 없다. 원래부터 그런 인간, 타고난 천성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이가 180도 바뀌는 것을 보면, 오히려 애초에 괴물인 이를 볼 때보다 더 섬뜩한 지점이 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구나.
그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자신과 대화가 통할지 여부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해서 성공만 한 사람들, 또는 성공에 너무나도 도취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관점이 허용되지 않는다. 왜 성공을 못하느냐. 실패를 안 해봐서 모르겠네. 나처럼 안 하니까 성공을 못하지. 그는 자신의 그릇이, 다른 이들의 관점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는 취업준비생이며, 취업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결과다. 그는 아직 취업을 하지 못했고, ㅂ은 취업을 했다. 바로 이 지점이 그를 향한 ㅂ의 오만한 태도의 발단이자, 그가 ㅂ의 태도에 더욱더 짜증을 느끼는 지점이다.
집으로 돌아와, 그는 책상에 앉는다. 시간과 돈까지 써가며 불편한 자리에서 불편한 소리를 들었다. 화가 나더라도, 짜증이 나더라도, ㅂ에게서 뽑아먹을 것은 뽑아먹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취업 준비에도, 정신 건강에도 이로우리라. ㅂ에게서 뽑아먹을 것을, 그의 언어로 순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면접 질문 하나하나를 소중히 할 것
면접관이 무엇을 듣고 싶어할지, 그 듣고 싶어하는 것에 경험과 스토리를 녹여낼 것
본인의 이미지는 본인이 만드는 것. 정해진 면접 시간 내에 최대한 강점과 스토리, 좋은 습관을 보여줘야
맞습니다. 학점이 낮습니다. 저는 대학교 시절 학교 내에서 배우는 수업보다 학교 밖에서의 경험을 쌓고 싶었습니다.
EPC 중 E가 가장 중요하다. 부가가치가 높다.
턴키 방식
성취도가 높은 산업이라 건설업을 지원했다. (가공하면 다른 산업군에도 적용이 가능할 것)
실패 경험도 단순 실패가 아니라, 그걸 왜 했고 거기서 무엇을 배워서 어떻게 나아졌는가
취업준비 기간은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알아가는 시간'
취미는 등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을 즐긴다. 그리고 등산 후 막걸리 한잔이 그렇게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