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번째 기업, 46번째 면접
1 - 임원면접, 건설 매출 인식, 빙의
면접 당일, 36번째 기업에 도착한다. 36번째 기업은 17번째 기업과 붙어 있다. 약 9개월 전, 그는 17번째 기업 면접을 보러 이 장소에 왔었다. 9개월 만에 자신이 돌아왔노라며, 그 혼자서만 감회에 젖는다.
17번째 기업 면접 때는 앞 건물 지하에서 면접을 진행했다. 이번 36번째 기업 면접은, 뒷건물 1층이다. 인테리어를 새로 했는지, 뒷건물이 앞 건물보다 내부가 더 번쩍번쩍하고 깔끔하다. 새하얀 벽면, 천장고가 높다.
면접자 안내 팻말을 따라가니, 어느 복도가 나온다. 양옆으로 회의실들이 분포해있는 복도다. 회의실 문마다 번호가 붙어 있는데, 번호판 뒷면부에 조명이 있는지 번호가 은은하게 빛이 난다. 그가 인기척을 내니, 문이 열려 있는 방에서 인사팀 직원이 나온다.
인사팀 직원 : 아, 이쪽으로 오세요.
그 : 안녕하십니까!
인사팀 직원 : 네, 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 : 하얀 얼굴입니다.
인사팀 직원 : 아, 여기 있으시군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번호판이 빛나는 회의실 중 하나에 그를 데리고 들어간다. 약 5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이 회의실 하나가, 면접을 진행하는 동안 그 혼자서 쓸 면접 대기실이자 면접실이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과 헤드셋이 올려져 있다. 화상 면접을 위해 미리 세팅된 상태다.
인사팀 직원 : (코팅된 종이를 건네주며) 면접 관련 안내 사항입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그 : 네. (노트북 설정은 그대로 두어라, 문의사항은 인사팀 직원에게 해라 등)
인사팀 직원 : 안내받으신 것처럼, 면접은 실무진/임원/영어 말하기 이렇게 세 번 진행됩니다.
그 : 네.
인사팀 직원 : (명단을 확인하며) 하얀 얼굴 씨는.. 임원 면접을 먼저 보시네요. 임원 면접, 실무진 면접, 영어 말하기 순서로 진행되실 겁니다. 곧 시작할 테니, 그때까지 준비하시고 편하게 계세요. 물 드시고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저는 저기 앞방에 있을 테니 궁금한 사항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 : 네, 감사합니다.
인사팀 직원이 나가고, 회의실에는 그와 노트북만 남는다. 그는 노트북 카메라에 보이지 않도록 외투를 벗어 옆자리에 걸치고, 가방도 내려놓는다. 코팅된 안내사항을 읽어보고, 괜히 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그 혼자만이 점유한 회의실, 노트북 때문에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나름 아담하다.
면접 시작 시간이 다가온다. 그는 노트북 앞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자신의 모습이 잘 나오나 확인한다. 이윽고, 까맣던 화면이 켜진다. 면접관들이다.
36번째 기업, 사업원가관리 직무 (임원 면접)
면접자 : 그 혼자, 사옥에서 노트북으로 화상 참여
면접관 : 총 3명 (남자 2 / 여자 1)
좌측, 피부가 하얗고 안경을 낀, 30대 초중반 여자 면접관 1
중앙, 피부가 하얗고 안경을 낀, 정장 차림의 40대 초반 남자 면접관 2
우측, 정장 차림, 윗머리가 살짝 벗겨진 40대 중후반 남자 면접관 3
그에게 다시 오지 않을, 마지막일지도 모를 대기업 면접이다. 가뜩이나 처음 시작이 임원면접이라 그는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막상 화면 속 임원 면접관들을 보니, 그의 예상보다 나이가 젊은 듯하고 분위기도 그리 무겁지 않다.
그 : 안녕하십니까!
면접관 2 :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하얀 얼굴 씨 맞으시죠.
그 : 네, 맞습니다!
면접관 2 : 그래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 : 안녕하십니까! 36번째 기업 사업원가관리 직무에 지원한 지원자 하. 얀. 얼. 굴.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실천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홀리데이 당시, 돈/경험/영어 세 가지 측면에서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중 돈의 경우, 1만 불을 저축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는 매주 가계부를 적어가며 목표 달성률을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똑같지는 않지만 건설사의 매출 인식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설사의 경우 총예상원가를 미리 설정하고, 이후 발생하는 실제 원가를 총예상원가와 비교하여 진행률을 구한 뒤 이를 총 도급금액에 곱해 매출을 인식합니다. 조금 결이 다른 부분이 있긴 합니다만, 목표 금액을 설정하고 그 목표 금액을 조금씩 달성했던 기억이 건설사 매출 인식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 생활인 공놀이를 통해... ... 이상 두 가지 강점, 강한 실천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36번째 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지원자 하. 얀. 얼. 굴.입니다.
그는 36번째 기업 면접 준비를 하며, 건설사 특유의 용어들을 숙지하고 외워두었다. EPC, 턴키, 그리고 건설사의 매출 인식 등이다. 건설업은 보통의 서비스업과는 다르다. 사용량을 기반으로 과금하거나, 일정 주기로 과금하기가 애매하다. 건설이라는 행위는 원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금액이 크며 복잡하다.
건설사는 긴 공사 기간, 복잡한 건설 과정에서 매출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 매출 인식(회계상)은 현금 흐름과 조금 차이가 있다. 돈을 받는 때만 매출을 인식한다면 간단하겠지만, 회계 기준은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실제로는 돈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공사는 계속해서 이뤄질 것이며 원가도 계속해서 발생한다. 수금 여부와 관계없이, 공사 기간 동안 내내 매출이 꾸준히 발생한다고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매출을 인식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바로 원가다.
예를 들어) A 프로젝트 수주, 도급금액 100, 총예상원가 50, 공사기간 3년
● 1년차
- 현장 투입원가 20 발생 (총예상원가가 50이므로, 20÷50×100 = 진행률 40%)
- 도급금액 100에 진행률 40%를 곱한 금액 청구 (청구 40, 1년차 매출인식 40)
● 2년차
- 현장 투입원가 15 발생 (2년차에 해당하는 진행률 30%, 총 진행률 70%)
- 2년차 진행률에 해당하는 금액 청구 (청구 30, 2년차 매출인식 30)
...
이런 식이다. 건설사에서는 진행률을 기준으로 고객사에게 청구하나, 고객사가 그 진행률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정하더라도 지급이 밀린다던지, 청구한 금액의 일부만 수금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부족한 금액은 '공사미수금'으로 잡는다고 한다. 그는 우선, 매출 인식 관련하여 큰 흐름만 파악한다.
그는 건설업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업무 역량을 뽐내기 위해, 건설사 매출 인식 기준을 어떻게든 끼워 맞춰 자기소개를 했다. 이 전략은 나름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면접관 3이 관심을 보인다.
면접관 3 : 하얀 얼굴 씨, 건설사 매출 인식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네요. 더 자세히 설명해보세요.
그 : 네, 건설사의 경우, 진행률을 기준으로 매출을 인식합니다. 공사 수주 시, 원가가 얼마나 들어갈지 예상하여 총예상원가를 설정합니다. 그리고 공사를 하며 실제로 발생한 원가를, 총예상원가와 비교하여 진행률을 구합니다. 이 진행률을 도급금액에 곱한 금액만큼을 매출로 인식합니다. 정리하자면, 건설사는 실제 발생한 원가를 통해 진행률을 계산하여, 도급금액에서 진행률에 해당하는 금액을 매출로 인식합니다.
면접관 3 : (눈빛을 살짝 빛내며) 하얀 얼굴 씨, 방금 말씀해주신 그런 건설사 매출 인식이 가지고 있는 단점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 아무래도 총원가를 예상해야 한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미래를 예상하고, 가치판단을 해야 합니다. 음, 조선사와 비교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조선업이 럼섬-턴키 방식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럼섬-턴키 방식은 계약 시 비용을 미리 정하고, 시공사가 해당 비용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유가 상승 등으로 인하여, 처음 예상했던 비용을 초과하게 되었지만 계약은 이미 럼섬-턴키 방식으로 해버려 조선사들이 막대한 손실을 감내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사들은 럼섬-턴키 방식이 아닌 코스트플러스피, 즉 발생한 비용에 일정 마진을 붙이는 형태로 계약을 바꾸었습니다. 조선업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럼섬-턴키 방식은 총원가를 큰 오차 없이 정확하게 예상해야 합니다. 미래의 원가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관리할 수 있는, 위험관리 역량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답변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면접관 2 : 음, 하얀 얼굴 씨. 건설에 관심이 많은 것 같군요. 그런데, 우리 그룹에는 17번째 기업(이름에 아예 '건설'이 들어가는)도 있거든요. 건설사인 17번째 기업이 아니라, 엔지니어링인 우리 회사에 지원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 (자존심 상하지만, ㅂ의 답을 차용한다) 아, EPC 중 E가 가장 부가가치가 높다고 생각해서 36번째 기업에 지원했습니다. 물론 17번째 기업과 36번째 기업 모두, EPC 역량을 갖춘 종합건설사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17번째 기업은 EPC 중 C(건설)에, 36번째 기업은 E(설계)에 조금 더 중심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설계 단계에서 우회하는 파이프를 직선으로 설계하면, 설계에서의 하루가 현장에서는 열흘을 아낄 수 있습니다. 또 돌아갈 배관을 없앴으니, 원자재값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EPC 중 E가 가장 부가가치가 높다고 생각되어, 36번째 기업에 지원했습니다.
면접관 2 : (잠시 침묵했다가) 하얀 얼굴 씨, 우리 회사나 17번째 기업 직원 중 지인이 있습니까?
그 :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 네? 아닙니다. 아는 지인은 없습니다.
면접관 2 : 지금 말씀해주신 이런 정보, 그리고 직무 정보는 어디서 얻은 건가요.
그 : 건설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건설사 매출 인식 같은 경우는 인터넷 검색하였을 때 잘 정리되어있는 블로그가 있었습니다. 소개를 보니 블로거도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네 그래서, 건설사를 다니는 친구들, 그리고 검색을 통해 얻었습니다.
면접관 2 : 알겠습니다.
면접관 3 : 하얀 얼굴 씨, 취미가 뭡니까.
그 : (이번에도 ㅂ의 답을 차용한다. 거의 빙의 수준이다) 네 저는 공놀이도 좋아하지만, 요즘 등산이 재밌습니다. 등산을 할 때, 그리고 정상을 올랐을 때의 그 성취감을 즐깁니다. 또한, 등산이 끝나고 내려와서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등산을 즐깁니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타인과 싸우거나 갈등했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그랬을 때, 갈등 이후에 어떻게 해결하나요.
그 : (건설사 면접이다. 그는 음주자 가면을 쓴다) 네, 그런 경우, 제가 먼저 다가가 술자리를 가지자고 합니다. 제가 먼저 그렇게 제안했을 때, 아직까지는 거절당한 기억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술자리를 가지면, 의견 충돌이 아무리 컸더라도 서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할 수... ...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임원 면접이 막바지로 향한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자신이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이것만큼은 더 낫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말해보세요.
그 : 네, 저는... ...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건설 관심, 숫자 관심, 혹은 친화력이었을 것이다)
면접관 2 : 네, 그럼. 이상으로 면접을 마치겠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그 : 감사합니다!
만났을 당시에는 그렇게 불편하고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ㅂ은 건설업계 종사자다. ㅂ이 했던 이야기들에서 도움된 것이 아주 없진 않았다. 36번째 기업에 반드시 합격하고 싶은 그는, 감정을 배제하고 ㅂ의 답변을 그대로 차용한다. 특히 엔지니어링과 등산 답변은, 앵무새마냥 똑같이 읊었다.
그는 자신이 임원 면접을 잘 봤다고 생각한다. 건설사 매출 인식 과정에 대해 어필함으로써, 면접 시작부터 면접관들의 점수를 딴 것 같다. 이후에도 별다른 실수는 없었다. 임원 면접을 잘 봤으니, 다른 면접에서 보통 정도만 가더라도 붙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만일 붙는다면, 내키지 않지만 ㅂ에게 감사의 표시로 다시 밥을 사야 하는 것은 아닐까. 노트북 앞에 앉아 또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다.
아직 두 번의 면접이 더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