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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Jan 30. 2023

새벽

후회, 과거, 망상

 그는 새벽을 좋아한다. 어렸을 적부터 취침 시간이 이른 편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어 성인이 되어갈수록 취침 시간은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그는 자신이 올빼미족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때나 취업준비생 때는 취침 시간이 더더욱 늦어졌다. 그렇다고 그가 잠이 적은 편은 아니었다. 미뤄뒀던 잠은, 주말이 되었든 휴일이 되었든 언젠가는 다시 충전해야 했다. 그는 그냥 밤에 깨어있는 것 자체가 좋았다. 


 그다지 잠이 오지 않기도 하거니와, 때때로는 잠을 자지 않으려 일부러 버티기도 했다. 새벽의 고요함과 적막함이 마음에 들었다.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고, 들려오는 소리도 없다. 온 세상이 멈춘 듯한 적막함, 낮에도 그를 옥죄는 것은 없었지만 새벽에는 무언가에서 해방되는 것 같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좋았다. 



 그와 스쳐가듯 만났던 ㅇ은 이렇게 말했다.

  - 밤에 잠 못 자는 사람들은, 낮 시간을 후회하는 거예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별로 한 게 없으니까, 밤이 돼도 그 생각 때문에 잠을 못 자는 거예요. 못 자는 거기고 하고, 일부러 안 자는 거죠.


 엄청나게 새로운 진리가 담긴 말은 아니지만, 그는 ㅇ의 말에 뒤통수를 후려맞은 듯했다. 그가 지금껏 새벽에 느껴왔던 감정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을 수 있다. 후회스러운 낮 시간에 대해 스스로 사죄(깨어있음)하며 느끼는 보상 심리였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ㅇ의 말이 맞다고 느낀다. 직장인이 된 이후에도 취침 시간은 빨라지지 않았다. 취업준비생 시기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늦어졌다. 이런 행태는 갈수록 심해져, 다음날 출근을 앞두고도 뜬눈으로 4시를 보는 날이 많아졌다. 아직은 체력과 신체가 버텨주니 가능한 것이겠지. 신체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후회와 사죄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리라.


 새벽, 잠에 들지 않은 그는 생각한다. 그가 이루고 싶었던 것들, 그것들을 모두 이룬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사실 그의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 타인들로부터 들었던 욕망을 토대로 빚은 것이다. 그는 이런 면에서 귀가 얇은 듯하다. 어쨌든 오랜 시간을 들여 빚어낸 이상이다. 그는 아직도 그것을 좇고 있다. 왜 그것들을 이루지 못했나. 왜 현재의 그와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 사이에는 터무니없는 괴리가 존재하나. 다 그의 탓이다. 그가 지난날을 허송세월로 보냈기 때문이다.


 새벽 1시, 아직 밤은 많이 남았다. 그의 후회와 망상은 아직 초입부다.

 새벽 2시, 후회와 망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래퍼토리는 언제나 같다. 판타지 소설처럼, 시간을 돌려 그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그린다.

 새벽 3시, 후회와 망상이 무르익는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그때부터 시작했더라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문득 시계를 보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새벽 4시, 다가오는 현실의 압박이 후회와 망상을 밀어낸다. 그를 휘감고 있던, 독이 든 달콤한 안개가 걷힌다. 지금이라도 잠에 들어야 한다.

 새벽 5시, 슬그머니 바깥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마음은 반대로 어두워진다.

 새벽 6시/7시, 잠이 들었다가 깬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회사를 가고, 영혼 없이 일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도망치듯 회사를 나온다. 영혼 없이 하는 일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그가 맡은 일의 상태를 본다면, 간신히 연명하는 시한폭탄 같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아직 중요도가 높은 일을 맡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적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점점 더 일에서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신이 맡은 소소한 일 전부를 시한폭탄으로 만들고 있다. 어떻게든 터지지 않게끔만 했는데, 조금씩 벅차온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덜컹거리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회사에서보다는 눈빛이 살아있다. 

 아직은 살아있구나. 이 회사는 오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다. 때려치자. 그런데 때려친 이후에는? 지금껏 이곳에서 도대체 뭘 했나. 그렇다고,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계속 남아있을 수는 없는데. 


 생각을 멈춘다. 우선은 집으로 돌아가자. 어느덧 밤이 왔다. 그리고, 곧 새벽이 올 것이다. 오늘은 또 어떤 상상을 할까. 어떤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까. 잠자리에 누워 망상을 펼칠 생각에, 그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설렌다.





 시간이 멈췄다. 그는 과거에 살고 있다. 후회 속에 살고 있다. 그 자신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늪처럼 계속해서 빠져드는 과거와 후회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 때마침 외부 상황 또한 우호적이지 않다. 후회가 지금을 만들었을까, 지금이 후회를 불러왔을까.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이 시키는 대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생의 주도권을 빼앗긴 듯한, 그가 선택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 싫다.


 연인이 떠났다. 연인은 그가 멋있지 않다고, 배울 것이 없다고 했다.


 그나마 좋아하는 취미를 하다가, 몸이 이상해졌다. 왼손의 감각이 조금 둔하다.


 일도, 사랑도, 건강도, 모조리 다 망가지고 있구나. 



 현실이 망가질수록, 후회는 배가되고 망상은 달콤해진다. 이렇게 상상을 해볼까.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어렸을 적부터 하고 싶은 일을 탐색했더라면, 이미 경지에 이르지 않았을까. 그런 자신이었다면 연인도 그를 버리지 않았을 텐데. 신체도, 어렸을 적부터 단련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외에도 수많은 것들을 미리 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


 시계를 본다. 새벽 4시. 더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의 압박이, 한창 무르익은 후회와 망상을 억지로 밀어낸다. 수천 번째 버전인 그의 이상을 머릿속에서 긁어내고, 다시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 출근이라는 걸 하긴 해야 하니, 자야 한다. 잠이 안 오면 눈이라도 감고 쉬어야 한다.



 얼마 전 친구에게,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상태를 이야기했다. 친구는 그에게, 현실을 살라고 했다. 맞다. 현실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시간을 순식간에 잡아먹을 만큼, 후회와 망상은 중독성이 강하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거나 유튜브로 위로받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문제도 해결책도 모두 그에게 달렸다. 그런데, 꼭 해결해야 되나. 다들 이렇게 사는 것 아닐까. 열정이나 열망이라는 것 자체가, 어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아닐까. 그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인가.


 새벽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이 새벽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날이 밝지 않았으면 좋겠다.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드는 상태가,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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