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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Mar 20. 2023

2023. 03. 19.

 시야가 뿌옇다.



 나는 몇몇 이들과 함께 차에 탑승해 있다. 동창인가, 대학교 친구인가, 사회 친구인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 대강 짐작컨대 친구인 듯하다.


 탑승해 있는 차량은 4인용,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 한 명은 무언가를 사러 마트에 갔단다. 친구들과 캠핑을 가는 것이로구나. 해가 완전히 진 깜깜한 밤, 주변에 별다른 불빛이 없어 자동차의 붉은 후미등이 도드라진다. 


 저 멀리 미약한 불빛이 보이는 방향으로부터, 기다리던 이가 다가온다. 운전석에 앉은 이는, 괜히 차를 앞뒤로 몰며 탑승을 방해한다. 장난이 생각보다 길어지는 것이, 꽤 짓궂다. 마침내 차를 세우고, 마지막 이가 탑승한다. 짓궂은 장난에 화가 났을 법도 한데,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하다.



 모두 탑승하고 난 뒤, 알 수 없는 행선지를 향해 차가 움직인다. 그런데 채 5분도 되지 않아 차가 멈춘다. 탑승해 있는 네 명 모두 말이 없다. 차량 라이트가 비추는 방향에, 탑승자들과 똑같은 외모의 네 명이 보인다. 말로만 듣던 도플갱어인가.


 차량 바깥의 네 명은 말싸움을 하고 있다. 꽤 심각한 상황인지, 얼핏얼핏 서로를 밀치기도 한다. 차량에 탑승해 있던 이들 중 하나가 말한다.


  - 저 녀석들, 우리 안에 있는 악한 자아가 발현된 거 같아. 아무래도 죽여야겠어


 이 말에 당황한 이는 나 혼자였나 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차문을 열고 나간다.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우물쭈물 따라나간다.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이들에게 다가간다. 이 쪽의 악의를 아는지 모르는지, 도플갱어들은 전혀 경계하는 기색이 없다. 눈인사만 살짝 하고는, 그들끼리 말다툼을 계속한다. 우리 넷은, 각자의 도플갱어 뒤에 선다. 막상 죽이겠다고 했지만, 아무 저항 없는 반응에 다들 기세가 꺾였나 보다. 그러면서도 눈짓으로 서로 어서 죽이라고 재촉만 하고 있다.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도플갱어로 보이는 이를 가만히 본다. 가까이서 보니, 생김새가 그리 똑같지는 않다. 콧수염도 있는 것 같고, 외모가 약간 다르다. 나는 이 녀석을 죽여야 하나.



 함께 차에서 내린 다른 세 명은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고 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나는 이 녀석을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열쇠가 있다. 있는 힘껏 찌르면 되지 않을까.


 나의 도플갱어는 무방비한 상태로, 계속해서 다른 도플갱어들과 말싸움을 하고 있다. 열쇠를 손에 꽉 쥐고 다가간다. 다가갈수록 힘이 빠진다. 힘이 너무나도 빠져, 열쇠로 목을 찔렀다기보다 열쇠 자국을 낸 것에 가깝다. 목에 열쇠가 닿자, 도플갱어는 그제서야 말싸움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도둑질을 하다 들킨 마냥, 나는 당황하며 어떻게든 목을 꿰뚫으려 한다. 하지만 손의 힘은 계속해서 빠져나간다. 나와 도플갱어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 아니, 거기가 아니고 여기를 찔러야지


 도플갱어는 내 손에서 열쇠를 빼앗더니, 스스로 자신의 목을 찌른다. 검붉은 피 같은 것이 솟구친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쓰러진다. 몸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주위를 돌아보니, 일행 3명과 그들의 도플갱어들이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다. 일행의 눈을 보니 모두 겁에 질려 있다.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 아, 아냐, 생각해 보니깐 죽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

  - 그러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아

  - 빠, 빨리 가던 길이나 가자



 너희가 하자고 해놓고서. 정작 너희들은 발뺌을 하는 것인가


 너무 기가 찬 나머지 제대로 따지지도 못한다. 그 와중에 나는 이미 그들과 함께 차에 타 있다. 다들 말이 없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인들은 상관없다는 듯. 나 혼자서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조금 있으니 눈물이 터져 나온다. 나의 일부가 죽었다. 나의 일부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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