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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Mar 26. 2023

'도를 아십니까'를 따라갔다

1 - 낚시

 때는 그가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하던 시절, 그는 학원을 다녔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거의 기숙 학원과 비슷한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는 학원이었다. 그의 100% 의지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다니는 이 학원이, 그리고 이 학원을 다닐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강의실 자체는 꽤 넓었지만, 강의실 하나하나마다 60명 가까운 인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니 비좁다. 조그마한 책상을 다닥다닥 붙인 강의실 내부, 보이는 것은 책상 위에 코를 박고 있는 다른 이들의 검은 머리 뿐. 혹자는 대입 학원의 이런 상황을, '콩나물 시루' 같다고 했다. 그는 콩나물 시루라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처음 들어봤지만, 대강 어떤 느낌인지 바로 감이 온다. 


 점심시간을 제외하면 학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다. 그리고 다들 절박한지, 정신을 차린 이들은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검열하며 점심시간조차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그도 자신이 뒤쳐질까, 괜히 바깥 구경을 자제했다. 하지만 강의실 창가로 스며드는 햇빛만큼은 즐겼다. 따스한 햇살, 15도 남짓한 각도로밖에 열리지 않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외부 공기가 신선하다. 내년에는 자신도 환한 대낮에 바깥 세상을 만끽할 수 있겠지.



 저녁 7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 되어 학원 밖으로 나온다. 그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왠지 어깨가 쳐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발을 질질 끌며 걷는다. 버스 타고 집에 가는 시간만 해도 1시간이 훌쩍 넘는다. 자고 일어나면 또 아침 일찍 등원해서 속죄의 시간을 갖겠지.


 대학가의 반짝이는 술집 거리, 새파랗게 어린 나이지만 이미 세상 다 산 것 같은 초탈한 눈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는다. 순간, 그의 시야에 불쑥 누군가가 들어온다.


  - 저기, 안녕하세요.

  - ...? 네?

  - 아, 놀라셨죠. 저희가 길을 지나가다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얼굴을 보니, 살이 많으세요.

  - (뭔 소린지 이해를 못한다) ? 살이 많다고요?

  - 네, 살기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 (어렴풋이 이해한다) 아, 살(殺 죽일 살) 말씀이시군요. 제가 살기가 있다고요?

  - 네, 사람마다 기운이 있는데, 살기가 많으면 일이 잘 안 풀릴 수 있거든요.

  - 그럼 살기를 어떻게 없애나요? (슬금슬금 낚이기 시작한다)

  - 아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잠깐 말씀 나눌 시간이 될까요?

  - 네 시간 됩니다.



 차도를 피해 길거리 한 구석에 서서 이야기를 한다. 그가 학원 등하교 때 매일같이 봤던, 언제나 같은 자리에 주차되어 있는 검은색 차량 앞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슬쩍 보니, 상대방은 2명이며 모두 여성이다. 둘 다 얼굴이 희다. 그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주도하는 쪽은 단발이며 20대 초중반으로 보인다. 다른 한 명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여성으로, 10대인지 20대인지 확실치 않다.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성은,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말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대화를 주도하는 이가 사수, 뒤의 인원은 이 사수가 하는 것을 보고 배우는 부사수였던 듯하다)


 당시 그의 눈에, 부사수는 모르겠지만 사수는 얼굴이 반반하게 보였다. 그가 대화에 응한 이유 중 하나다. 사수는 아주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지만, 하얀 피부 /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 더군다나 그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화가 하늘을 찌르는 상태다. 그런 자신에게 다가와주다니, 그것도 여성 두 명이! 그는 이상한 부분에서 망상하며 스스로 요상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 저희가 공부하는 학문에 따르면, 살이 많으면 부정적인 기운이 많이 따라오거든요.

  - 아 그 공부하신다는 학문이, 불교에요?

  - 아 불교는 아니고요. 동양의 이런저런 학문을 공부해요.

  - 그렇군요. 그래서요? 그 살을 어떻게 없애야 하나요

  - 여러 가지 방법이 있죠.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 뵙고 이야기를 좀 나눌까 해서요. 살을 없애면 하시는 일도 더 잘되고, 부정적인 기운도 많이 사라지게 되거든요.

  - 아 좋네요. 근데 동양 학문들을 공부하신다고 했는데, 정확히 이름이 뭔가요?

  - 아직 저희가 공부하는 분야가 정확히 이름이 있지는 않아요. 이런저런 동양 학문들을 공부하고 있어요.

  - (대답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 알겠습니다.

  - 그래서, 저희가 시간을 내서 그 부분에 대해 말씀을 좀 드리고 싶은데, 혹시 시간이 괜찮으신가요?

  - 언제요?

  - 지금요.

  - 지금요? 저를 위해 시간을 내주신다고요?

  - 네.

  - 네, 됩니다.


 대학 입시에 성공한 다른 또래들과의 대비되는 상황 때문이었는지, 태생부터 귀가 얇은 탓이었는지, 그는 이상한 포인트에서 감동한다. 이렇게 초라한 자신, 몸에 힘이 빠진 상태로 축 쳐져 발을 질질 끌며 대학가 술집 앞을 지나가고 있는 자신이다. 그런 자신을 위해, 본인들의 시간까지 내어가며 이야기를 해주겠다니?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를 불쌍히 여긴 하늘이 보내준 사자인가?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호의를 내비치는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얀 얼굴에 단발을 한 사수 여성은, 자신들의 공부방이 주변이라며 안내한다. 그는 이들을 따라간다. 가는 길에도 사수는, 자신들이 무슨 공부를 하는지 대략적인 설명을 한다. 그는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으나, 자신에게 다가와준 이들에게 감동하여 그저 네네 하며 따라간다.


 훗날 돌이켜보자면, 그에게 접근했던 두 여성 모두 눈동자가 이상했다. 눈 자체는 멀쩡하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제정신'이라는 느낌이 덜했던 것 같다. 눈빛이 반 이상 죽어있는, 무언가에 세뇌된 듯한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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