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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Mar 28. 2023

2023. 03. 28.

502724, 딸기

 시야가 뿌옇다.



 어느 봉우리 꼭대기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다. 안개 가득한 경사면을 따라 2~3층짜리 낮은 건물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다. 안개 때문인지 건물들은 온통 회색빛, 건물 틈으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조명은 모두 노란빛이다. 고즈넉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동네다. 해가 진 것인지, 아니 해라는 것은 원래 잘 보이지 않는 동네인지. 멀리 보이는 하늘도 모두 짙은 회색빛. 나쁘지 않다.


 길을 걷다 낯익은 회색빛 건물에 들어간다. 계단을 따라 두어 층을 올라간다. 익숙한 현관문, 역시 회색이다.


 도어락이 잠겨 있다. 비밀번호. 비밀번호가 뭐였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번호가 있다. 5-0-2-7-2-4. 혹시나 했는데 문이 열린다. 내부는 노란색 스탠드와 몇몇 간접 조명만 켜져 있어 대체적으로 어둡다. 그래도 좋다. 눈도 편안하고, 흐리게 감싸주는 어둠이 따뜻하다는 착각까지 든다. 너무 밝은 것보다 훨씬 낫다. 밝을수록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테니까.



 이 집은, 내가 누군가와 동거하는 집인가 보다. 그녀를 찾는다. 거실에도, 방에도, 화장실에도 없다. 아기자기한 장난감 같은 것만 어질러져 있다. 넓은 집이 아니니, 다른 곳을 찾는 동안 엇갈렸을 리도 없는데. 그녀는 밖에 나갔나 보다.


 바깥으로 나간다. 1층으로 내려오자, 건너편 카페가 보인다. 그녀가 좋아했던 카페다. 분명 저기에 있을 것이다.



 카페로 들어간다. 조명이 약간 밝아, 눈을 찌푸린다. 카페 내부를 스캔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디 구석에 있는 걸까. 미로 같은 카페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찾는다. 없다. 미로를 전부 둘러봐도 없다. 마음이 다급해지며 카페 밖으로 나간다. 때마침 카페로 들어오는 몇몇 손님이, 이상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흘겨보며 지나간다.


 어디 있을까. 대체 어디로 갔을까. 아, 집으로 다시 가보자. 어디 갔다가 집에 돌아와 있겠지.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옆건물의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창문 틈으로 보이는 디저트가 예쁘다. 저걸 사가면 좋아하겠지.



 옆건물 카페에 들어선다. 두 명의 점원 중, 머리가 빨간 점원이 명랑한 목소리로 반긴다. 카운터에 진열되어 있는 디저트를 본다. 황갈색의 반죽을 얇게, 꽃잎처럼 겹쳐 장미 모양을 한 빵이 있다. 애플 무슨 빵이라고 한다. 그래 이거, 이걸 가져가면 좋아할 거다.


 이런 예쁜 디저트를 좋아했었지. 좋아하겠지. 좋아할 거야. 더 빨리 사줬어야 했는데. 더 빨리 챙겨줬어야 했는데. 떠나기 전에 미리 챙겨줬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녀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었을까. 그녀가 기뻐했을까.


 눈물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잘됬다는 듯, 터져나오는 눈물을 일부러 쥐어짜며 계속해서 박차를 가한다. 울음이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원하게 울어버리고 싶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더, 계속해서 더.



 빨간 머리의 명랑한 점원이, 아랑곳하지 않고 명랑하게 묻는다.

  - 음료는 뭘로 드릴까요?

  - ... 아메리카노요.

  - 하나만 하시나요?

  - ... 두 잔이요.

  - 네, 알겠습니다!


 점원에 의해 포장되는 디저트와 커피를 본다. 집에 가도 그녀가 있을까. 이제는 안다. 아마 없을 거다. 깨어난 후에는 당연히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깨어나기 전에 반드시 찾아야 한다. 찾았을 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를 보면서 웃어줄까. 이 디저트를 좋아해줄까.


 빨간 머리의 명랑한 직원이, 다시금 감상을 방해한다.

  - 손님, 여기 디저트에 올라갈 딸기인데요.

  - ... ?


 직원의 손에 조그마한 딸기 3개가 있다.

  - 이 딸기들 모양이 흐트러질 수 있어서요. 봉투 같은 게 있으실까요?

  - ... 그냥 디저트랑 같이 넣어주세요.

  - 아뇨. 넣을 수 있는 다른 곳이 있으시면 좋아요.

  - ... 혹시 여기에 넣어도 되나요.


 문득, 한쪽 어깨에 힙색을 차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다. 조그마한 책이 들어가 힙색은 이미 꽉 차 있다. 지퍼를 열고, 책과 힙색 가죽을 벌려 어떻게든 공간을 만든다. 여기 넣으면 분명 뭉개질 텐데.


  - 아, 거기면 돼요.


 빨간 머리의 직원이, 조그마한 딸기 3개를 힙색 안으로 굴려넣는다. 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굴러가는 딸기를 본다.





 깨어난다. 

꿈을 꿀 때마다 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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