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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May 20. 2023

2023. 05. 20.

책, 대학교, 음악, 가방

 시야가 뿌옇다. 현실이 아니라는 자각이 조금은 있는 상태다.



 나는 대학교 도서관 안에 있다. 지금의 이 세계는 내가 인식하는 대로의 세계이니, 대학교 도서관이 맞을 것이다. 빼곡히 들어선 책장들에 책이 한가득 꽂혀 있다. 특별한 책을 찾고 싶다. 구석진 곳을 향해 계속해서 내려간다. 언제나처럼 어깨에 매여 있는, 나의 분신과도 같은 커다란 가방이 유난히 무겁다.


 구석진 곳, 인적이 갑자기 끊긴 공간이 있다. 책장들이 벽처럼 둘러싸고 있고, 바닥은 다른 곳보다 낮아 다섯 계단 정도 내려간다. 널찍한 바닥 한가운데, 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르다가 만 나무 기둥 같은 것이 3개 있다. 얼핏 보면, 모험 영화의 도굴 장면과 비슷하다. 세 개의 보물 중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몇 개일까.



 허리 즈음까지 올라오는 나무 기둥 위에는, 책이 한 권씩 올려져 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속 내용을 보려고 펼치니, 페이지가 전부 새까맣다. 애초에 이렇게 만들어진 책인가, 아니면 내가 읽지를 못하는 것인가.


 3개의 나무 기둥 중, 왼편과 오른편의 책은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중앙의 책은, 똑같이 속지는 까만데 글씨는 하얗다. 그래 그럼 이걸 가져가야지.



 중앙 나무 기둥에 올려져 있던 책을 가방에 넣는다. 가방에 무게가 더해진다. 내려놔버릴까. 조금만 참자. 우선 밖으로 나가서 내려놓자.


 출구를 찾던 찰나, 게임처럼 갑자기 나의 상태가 머릿속으로 입력된다. 나는 지금 빌린 도서가 연체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다)인데, 그렇다면 책을 추가로 대출할 수 없다. 도서 연체자는 통상 연체된 기간만큼 대출이 불가하다. 하지만 나무 기둥 위에 놓여있던 이 특별한 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주변을 쓱 둘러본다. 여느 도서관이 그렇듯, 경계가 그리 삼엄하지는 않다. 몰래 책을 반출할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정문으로 나가고 싶지만, 정문에는 RFID 칩을 감지하는 센서가 있을 것이다. 사람 키 높이의 센서 두 개 사이로 보이지 않는 주파수 레이저 같은 것이 있겠지. 대출 승인을 받지 않은 책이 이 센서 사이의 레이저에 잡히면, 경고음이 울린다. 주변의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다. 특히나 그것이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나 관리 직원이라면 더더욱. 지금까지의 경험상, 도서관에서 일하는 이들은 메뉴얼을 엄격하게 준수한다.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이 나의 상황(연체)과 도서를 인식하는 순간 반출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정문으로는 갈 수 없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도서관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 건물 밖에 위치한 외부 통로인데, 건물 벽으로 가로막혀 대학교 구역 밖으로 탈출할 수는 없다. 우선은 저쪽으로 가서 나갈 방법을 찾아보자. 약 5분 정도, 바깥 공기를 마시며 걷는다. 먹구름이 낀 회색빛 하늘, 비가 추적추적 내려 바닥이 반짝반짝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은 여전히 무겁다.


 통로 끝, 커다란 건물 내부로 진입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강당이나 공연장이다. 저 아래 보이는 단상을 중심으로, 계단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며 올라온다. 경사는 완만하나, 계단이 워낙 많아 단상이 멀다. 대략 2개 층 정도 아래. 학생들이 계단 여기저기에 걸터앉아 무언가 논의하거나 대화하고 있다. 대학교가 많이 좋아졌네.

 이 커다란 건물은 모든 벽면이 유리다. 바깥의 회색빛 하늘, 우중충하게 내리는 비가 꽤 보기 좋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계단 중간 즈음, 아는 얼굴이 있다. 사회에서 알게 된 얼굴이다. 왜 여기서 나오지? 최근 자주 마주치며 기억의 단편을 차지해서일 것이다. 다가가서 묻는다.


 - 여기 출구가 어디에요?

 - 잘 모르겠어요. 저쪽에 가서 한번 찾아봐요.



 아는 얼굴에게 얻은 정보는 모호하지만, 가리킨 방향을 보니 다른 공간으로 빠지는 문과 통로들이 있다. 벽면이 유리여서 공간의 흐름이 보이는데, 여러 공간이 겹쳐 오히려 헷갈리기도 한다. 


 계단을 조금 더 내려와, 다른 건물로 통하는 문을 연다. 열자마자, 피아노와 음악 소리가 들린다. 커다란 공연장 뒤편에는 '음대'가 위치하나 보다. 유리벽 너머로 연주 실습, 이론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인다. 음악, 좋지. 위를 보니, 저 멀리 환풍구 같은 것이 보인다. 저기로 나가면 되겠다. 



 유리 너머로 들려오는 음대생들의 연주 소리를 들으며, 나는 통로의 여러 구조물들을 부여잡고 위쪽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라고 설계해놓은 길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구조물들이 때마침 알맞게, 또 비교적 안전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올라가는 데 큰 문제는 없다. 마침내 통로를 다 올라가서, 환풍구를 5m 정도 앞둔 곳에 섰다. 


 환풍구 앞에는, 네다섯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담배를 피며 앉아 있다. 모여있는 모양새가 꽤나 불량스럽다. 10개 가까운 눈동자들이 한꺼번에, 왜 당신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본다. 나이가 많아 대학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행색 때문에? 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무리의 옆을 지나, 환풍구를 향해 올라간다. 환풍구 앞에 이런저런 파이프들이 설치되어 있어, 자세를 잡기까지 꽤나 시간이 소요된다. 눈동자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마침내 자세가 잡혔다. 파이프에 올라 중심을 잡는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 환풍구 밖으로, 캠퍼스 벽면이 없는 외부와 도로가 보인다. 여기만 넘어가면 된다.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 저 사람 뭐하는 거야?

  - 몰라, 이상한 사람인가봐.

  - 우리가 신경 쓸 건 아냐.

  - 근데 나는 좀 궁금해.

  - 저런 게 뭐가 궁금해.

  - 몰라. 난 저 사람 따라갈래.


 대화를 듣다가 흠칫한다. 나를 따라온다니, 나를 왜 따라오지? 따라잡히기 전에 어서 밖으로 나가야겠다.


 그런데, 어깨를 짓누르던 부피와 무게감이 없다. 가방. 가방이 없어졌다. 가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밖으로 나가려던 이유는 뭐였나. 아, 특별한 책을, 대출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나가기 위해서였구나. 그런데 그 책을 넣어놓은 가방은 어디갔나. 환풍구 앞 파이프 사이를 통과하다가 흘렸나보다. 아니, 가방은 놓아두고 실험삼아 한 번 올라와보려고만 했었나. 



 다시 내려가서 가방부터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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