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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Jul 31. 2023

2023. 07. 31.

암벽 등반, 점괘

 시야가 뿌옇다.

 직장과 군대가 뒤섞인 느낌이다.


 저녁 6시. 일과가 끝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층을 오른 뒤 밖으로 나간다. 널따란 테라스 같은 공간, 일과를 일찍 마친 이들이 미리 밖에 나와 테이블 자리들을 선점하고 있다. 높게 솟은 산봉우리 하나만이 하늘을 반으로 가르듯 나눈다. 이외에는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다. 노을이 지고 있다.


  - 안녕하세요

  - 아, 안녕하세요.


 경영기획팀에서 일하는 'ㄱ'이 다가와 인사한다. ㄱ은 키가 훤칠하고, 외모도 깔끔하여 인기가 많다. 머리의 물기를 보니, 저녁을 먹기 전에 샤워부터 빠르게 해버린 모양이다. 개운해 보이는 ㄱ을 보니 샤워 생각이 간절하다.


  - 저녁 드셨나요?

  - 아직이요. 여기 좀 보고 가려고요.



 ㄱ의 답변에,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본다. 장관이다. 자리에 앉아서 본다면 제일 좋겠지만, 이미 만석이다. 상관없다. 자리 따위. 저 앞의 절벽을 이루는 돌덩어리 끝에 앉으면 되니까.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이 하늘을 봐야겠다.


 인파를 뚫고 돌덩어리 끝에 다다르니, 옆에 있던 ㄱ은 어느새 사라졌다. 나는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가장자리에 앉는다. 고개를 드니, 하늘은 어둡고 달이 보인다.

노을은 어디 갔지?


 하늘을 반으로 가 산봉우리 건너편에 황금빛 노을이 얼핏 보인다. 어차피 해가 지고 나면 전부 다 깜깜해질 터다. 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위치를 옮기려 하는데, 어느샌가 인파가 모여들었다. 저 인파를 다시 뚫고 가려면...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고 귀찮다. 차라리 절벽 아래로 기어내려가 벽을 타고 저쪽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나. 거리도 얼마 안 되고. 이 정도쯤이야.


 겁도 없이 암벽 등반을 시작한다. 절벽을 타고 살짝 내려가, 그 상태에서 횡(가로)으로 이동한다. 위에 만큼은 아니지만, 절벽 중간중간에도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다.



 패기 있게 도전한 암벽 등반이 슬슬 버거워질 무렵,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눈치챈다. 길고 검은 머리칼, 숱이 많은 수염, 온몸에 헤진 천을 둘러싼 40대 남자가 무표정하게 나를 보고 있다. 길을 알려주려는 것인지, 지팡이 같은 것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남자의 지팡이 끝은 꽤나 가까워서, 손으로 잡을 수도 있을 법하다. 여차하면 잡으라는 것인가.


 지팡이의 도움을 거절하려 했으나,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지팡이 쪽이었으므로 어찌저찌 도움을 받은 셈이 되어버렸다. 마침내 산봉우리 반대편으로 넘어와 절벽 위로 올라온다. 황금빛 노을을 기대했는데, 어느새 해가 다 저버린 뒤다. 기껏 넘어왔건만. 아까 전 반대편과 똑같은 하늘이다. 적잖이 실망한다.



 절벽 위를 올라온 나를 지켜보던 남자는, 말없이 뒤돌아서더니 저 앞의 벽으로 간다. 낮은 높이에서 암벽 등반을 연습하는 장소로 보인다. 나무로 만든 오래된 기둥과 기구, 짚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굵은 밧줄도 있다.

 

 남자는 시범을 보이려는 듯, 걸치고 있던 천을 풀어헤치고는 기구와 로프를 잡는다. 그런데 남자의 손이 이상하다. 손가락의 절반은 없고, 오른쪽 팔은 신경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삐걱대는 몸이건만, 남자는 로프를 잡자마자 능숙하게 기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묘기처럼 기구를 몇 번 정복한 남자는, 말도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나를 포함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몇몇이 기구에 도전한다. 남자는 기구 여럿을 쉽게 넘나들었건만, 나와 다른 이들은 기구 하나조차도 버겁다. 처음 밧줄을 잡는 것부터 문제다. 손을 뚫어버릴 기세로 삐져나온 날카로운 지푸라기들.


 밧줄을 잡고, 손아귀 힘에만 의지하면서 몸을 거꾸로 들어올린다. 해본 적이 없는 동작이라, 상당히 어색하다. 아까 그 남자는 완벽한 물구나무 형태였었는데.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엉거주춤한 자세를 성공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다른 이들이 '오오' 하는 감탄의 소리를 낸다. 엉거주춤한 자세인 주제에 어깨에 약간 힘이 들어간다.

 내려오려고 다리 쪽 방향을 바라본 순간, 로프가 매달린 천장에 종이가 붙어 있다. 붓글씨가 쓰인 하얀 종이, 상당히 오래전에 붙인 모양이다. 한자 같은 것이 적혀 있다.


 - 말의 엉덩이, 하던 것을 익숙히 하게 됨.


 무슨 소리지? 나쁜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밧줄을 잡고 수련을 계속한다. 그런데 기구 정면에, 또다른 종이가 눈에 띈다. 알 수 없는 두 번째 문구가 적혀 있다.


  - 말의 엉덩이, 익숙해져 귀찮아짐.



 영문을 몰라, 첫 번째 종이를 다시 본다. 첫 번째 종이는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다른 글귀가 적혀 있다. 싸구려 타로 카드 같은 것인가.



 절에서 치는 종소리 비슷한 것이 울린다. 머리를 박박 민 이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더니 기구 앞에 앉는다. 무게감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들 아까의 남자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이에게 무턱대고 다가가 묻는다.


  - 저기요. 이 기구를 하다가 글귀를 봤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요.

  - 글귀라니요.

  - 그, 말의 엉덩이, 하던 것을 익숙히 함이라고 되있었고. 두 번째는... 익숙해서 귀찮아진다? 아, 지금 들고 계신 그런 종이였어요.


 머리가 짧은 이는, 여러 글귀가 적힌 종이 뭉텅이를 들고 있다. 역시 양산형 싸구려 전단지였나.


  -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 글쎄요.. 의미라기엔..

  - 일종의 점괘일 거 아닙니까. 익숙해진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귀찮아진다는 건 무슨 뜻이죠?

  - 글쎄요. 저도 잘...


 나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문구에 집착하고 있다.


  - 아니, 뭔가 뜻이...

  - 저기, 저희가 식사를 할 시간이어서요. 자리를 비워주셔야 합니다.

  - (귀가 번쩍 뜨이며) 아 식사! 식사하셔야죠.



 식사란 말에 정신을 차린다. 이 사람들도 식사를 해야지. 나도 식사를 해야지.

절벽과 테라스를 지나, 식사를 하러 간다. 종이에 적혀 있던 문구는 무슨 의미였을까. 밥 생각에 점점 잊혀진다.




개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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