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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Aug 21.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고

부동산, 사상, 종교

 혼자 영화 보는 것, 그리고 무거운 내용을 좋아하는 나에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다. '콘크리트'와 '유토피아'라는 두 단어가 가진 상반된 느낌 때문이었다. 콘크리트는 현대식 건물, 특히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단어다. 유토피아는 완전한 무엇, 너무 완벽해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이상향을 뜻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회색 빛깔, 색부터 삭막한 콘크리트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까? 철근 콘크리트의 출현으로 고층 빌딩과 아파트가 가능해졌고, 현대 건축은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 르 코르뷔지에와 안도 다다오라는 거장도 탄생했다. 단단하면서도 효율적인 구조로 많은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건축.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콘크리트(아파트)의 수혜를 보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파트를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가.



 콘크리트 유토피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밌게 봤다. 영화 시작부터 설정된 어두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비유가 눈에 띄었으며,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였다.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성범죄 묘사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다행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흐리멍덩한 해피 엔딩이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엔딩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도 있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임을 밝힌다.





아래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눈에 띄었던 것은 크게 3가지다. 부동산, 사상, 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1) 부동산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로, 애초부터 설정된 갈등 관계가 입주민과 외부인이다. 외부인들이 살던 아파트(드림 팰리스)가 더 고급이었던 것으로 예상되며,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 입주민들(황궁 아파트)을 깔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난이 일어나자 고급 아파트는 무너지고 황궁 아파트만 남았다. 외부인들은 온전히 남아있는 황궁 아파트로 몰려들었고, 황궁 아파트는 재난 대책을 위해 '부녀회'를 연다.  


 입주민들 사이에도 나름의 서열이 있다. 집을 소유했는지의 여부로 서열을 나눈다. 부녀회장은 본인 입으로 '은행도 헐리고 다 리셋되었다'고 하지만, 집문서가 있냐고 묻는 모순을 보인다. 무정부 상황으로 보이는 비상 사태에도, 입주민들은 기존의 질서를 추종한다. 이후 등장하는 입주민 명부에 주거 유형이 자가인지 전세인지가 꼼꼼히도 기록되어 있다.




2) 사상

 자본주의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는 '아파트' 내부에서, 실제로는 공산주의적 행태가 이뤄진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일한 만큼 배분받는 공정한 세상. 그러는 와중에 누구 하나 낙오되지 않는 세상. 물론, 입주민에게만 해당한다. 입주민이 아닌 이들은 바퀴벌레라고 불리며, 종국에는 '방역'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아파트의 질서 유지를 위한 규칙을 적어 공표하는 장면에서는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 농장'이 생각났다. 소설에서는 지배층(돼지)이 사족을 추가하며 규칙이 점점 산으로 갔다.

 처음 :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변경 :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하되, 돼지는 더 평등하다. (밤새 누군가가 추가)


 역사 속 공산주의는 대부분 전체주의적 성격을 띄었으며, 지도자들의 행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념과 정의로 무장하여 공정한 투표로 선출된 지도자들조차도, 별다른 제재 없이 권력 맛을 오래 보면 독재자로 변질됐다. 황궁 아파트의 주민대표도, 처음엔 어수룩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의 남자였다. 하지만 권력의 맛을 보면서 점점 사람이 변했으며, 카리스마와 더불어 종국에는 폭력성이 선을 넘는다. 그 선을 넘은 조치가 바로 숨어있는 외부인들을 색출해내는 '방역 조치'다. 마을 대표가 직접 외부인을 색출하는 장면은 나치의 유대인 색출이 겹쳐보인다.


 외부인을 숨겨주거나 이에 동참한 입주민들도 벌을 받는다. 입주민은 가족이기 때문에 너그럽게 교도한다는 투이지만, 폭력만 가하지 않았을 뿐 이들에게 내려진 벌은 가혹하다. 모든 입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입으로 '잘못했습니다' 라고 200번 외치는 것. 이 장면에서, 벌을 받는 입주민들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잘못했다고 외친다. 자신의 행동에 추호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나, 다만 살기 위해서 외치는 것. 자신의 신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을, 타인의 강요에 의해 자신의 음성으로 수백 번 외쳐야 하는 것.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를 묘사한 글들의 '자기반성'이 연상된다. 반성해야 할 이도 실제로 반성하는 이도 없다. 그저 살기 위한 연기일 뿐.


 결국 이 형벌은 200번까지는 시행되지 못한 듯하다. 벌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던 이가, 아파트 난간에서 몸을 날려 생을 마감한다. 재난 상황에 '유토피아'나 다름없는 황궁 아파트에서 자살자가 나온 것. 해당 형벌의 잔인함도 자살에 기여했을 것이다.



  

3) 종교

 기독교적인 암시가 대놓고 보인다. 외부인들을 색출하려 집을 수색할 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라고 적힌 문패가 흔들린다. 외부인이 숨어있었거나, 숨기는 데 일조한 이들의 집 문은 빨간 페인트로 표시한다. 이때 페인트를 듬뿍 발라 방울방울 흘러내리는데, 그 색이나 질감이 피를 연상시킨다. 성경 구약에서, 모세와 신도들이 문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신이 재앙을 내릴 집을 구별하게 한 것과 유사하다.


 다만 성경에서는 신이 '문에 피가 발라지지 않은' 집의 아기들, 즉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집트인 아기들만 죽였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문에 피를 바르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영화에서는 아파트의 규칙을 어긴 이들의 집에 피를 발랐다. 성경과는 달리 표시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페인트로 표시된 집의 문에는 온갖 욕설과 낙서들이 도배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붉은 페인트(피)가 성경과 정반대의 의미로 연출되었으나, 감독의 생각은 성경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3-1) 민성

 마지막 민성(박서준)이 죽을 때에도, 아침 햇빛이 알록달록 성당 모자이크를 통과하여 따사로이 주인공 부부를 비춘다. 벽채가 쓰러져서 기울어진 와중에 유리 모자이크만 온전히 남아있는 장면, 감독이 무리하게 개연성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이 장면을 연출한 이유가 있을 터다.


 민성은 공무원이며, 처음 부녀회 회의에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에 만들어진 시스템 속에서 성실히 일했다. 마치 공무원처럼.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죽었을지 모를 이들을 애써 외면했다. 의도는 달랐겠지만, 명화(박보영)의 말처럼 민성도 주민대표처럼 변해갔다.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한 것, 시스템에 순응하고 공무원처럼 성실히 이바지한 것이지만 민성의 손도 더럽혀졌다. 즉,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감독은 이미 더럽혀진 민성을 살려서 데려갈 수는 없지만, 민성의 죄가 다른 이들보다는 가볍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계속해서 보여주던 기독교, 그 기독교에서 가장 신성한 장면으로 민성을 보내준 것이 아닐까 싶다.




1-1) 주민대표

 영화의 재미는 빌런의 매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얼핏 심심한 악당이 될 수도 있었던 배역을, 배우의 카리스마와 열연이 살려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빌런이 그렇듯, 주민대표도 입체적인 인물이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가장이다. 그가 죽인 인물은, 피 같은 돈을 가로챈 사기꾼이었으므로 일말의 당위성도 있다.


 피를 뒤집어쓰고, '외부인 방역'을 실시하고, 권력을 맛보고 카리스마 있는 독재자로 변모하는 주민대표. 하지만 그렇게 냉혹해 보이는 주민대표도, 사실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집주인조차 발이 시리다며 신발을 벗지 않는데, 무단 침입을 하면서도 신발은 벗고 들어간다. 피를 뒤집어쓰고 죽어갈 때도, 가족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신발은 벗고 들어오라 말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외에도 주민대표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을 했다. 옆집 여학생을 절벽으로 집어던진 직후 내뱉은 말 치고는, 꽤나 정상적(?)이다. 가타부타 말은 많지만, 해당 발언은 사회적으로 꽤나 통용되는 발언이다. 이런 식의 장치들은, 한없이 냉혹하고 잔인하게만 보이는 악당이 평범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렇기 때문에 악당이 더 매력적임을, 인간이 어디까지 입체적이고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연출이다.



기타)

 사실 영화 초반 명화(박보영)의 행동이나 발언은 답답하다. 너무 답답해서 암을 유발하는, 이른바 '발암'이라고 불릴 정도다.

현실이 이 모양인데, 저 혼자만 잘났고 정의로우면 다야?

살아남지 못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남들 덕에 손 더럽히지 않은 걸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하지만 영화를 볼수록, '발암'이라고 느껴졌던 명화의 입장이 점점 더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명화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기보다, 사이다라고 느끼고 공감했던 '현실주의자'들의 행보가 점점 도를 지나치게 된다. 현실주의 편에 섰던 입장에서도, 저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싶은 상황들이 발생한다.


 이러한 부분은 분명 감독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처음에는 발암이라고 생각했던 이에게 동조할 정도의 전개, 사실 주민대표는 입주민이 아니고 살인자였다 등. 모두 착하고 배려한다면, 처음부터 이주민들을 감싸 안고 갔더라면 마지막과 같은 파국은 예방할 수 있었을까? 확답하기는 힘들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개개인과 상황에 따라 답은 다르다. 영화에서 현실주의를 택하고 손을 더럽힌 이들 대부분은 죽는다. 이상을, '인간다움'을 지켰던 명화만이 살아남아 인간다운 사람들을 만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마지막 장면도 개연성이 의문이긴 하다. 먹을 것을 대가 없이 주고, 살아 있으니 살아도 된다고 하는 따뜻한 이들의 출현. 황궁 아파트에서는 만화 '진격의 거인'의 조사 병단처럼 희생을 감내해야만 생존이 가능했는데, 마지막에 출현한 이 보금자리는 생존의 조건이 한없이 너그러운 풍족한 환경이란 말인가. 황궁 아파트도 조건이 동일했다면 그러한 수라장이 펼쳐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의문은 제껴두고,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있다. 인간미, 인간다움을 잃지 말라는 것인가. 메시지에 오롯이 동의하진 않으나, 이전에 보았던 어떤 구절이 떠오른다.


  *희망과 기대를 품은 이들은, 기대가 꺾였을 때 좌절하고는 좌절 속에서 죽었다. 좌절한 이들도 좌절 속에서 죽었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일, '양치, 세수, 머리 빗기'를 하며 버틴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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