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키트를 포함한 '신규 입사자 불출 물품'을 담당한 시점부터, 그는 창고 관리자가 된다. 명시적으로 그가 창고 관리직에 임명됐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인원들이 입사할 때마다 그가 창고를 들락거리며 물품을 불출해야 했고, 이상하게도 하필 그 시기에는 2주일 간격으로 입사자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창고 열쇠는 홍보팀 매니저가 갖고 있었는데, 창고를 열 때마다 홍보팀 매니저에게 열쇠를 빌렸다가 반납해야 했다. 이 같은 현상이 2달 정도 지속되자, 그는 홍보팀 매니저에게 허락을 맡은 뒤 열쇠를 복사해버린다.
창고 열쇠를 복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날, 그는 간만의 바깥공기에 상쾌함을 느낀다. 더운 날씨, 구름이 해를 가려 약간 흐릿하지만 그에게는 더없이 좋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어떠한 일이든 감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입사원이지만, 그의 몸을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와 DNA는 이미 이때부터도 활동적인 본성을 표출했던 듯싶다.
사업지원팀 상사들에게 사유를 이야기하고 나온 것이니 거리낄 것이 없다. 걷다 보니 후덥지근한 날씨, 그는 근무복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치고는 거리를 활보한다. 열쇠를 복사하는 곳은 어디일까. 저쪽 공구 상가 쪽으로 가면 있을 것이라는 말뿐, 과장들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는 듯하다. 그는 우선 T 과장이 알려준 은행 옆의 구두수선집으로 향한다.
조그마한 가건물 같은 구두수선집에 도착한다. 문은 열려 있는데 사람이 없다. 앞에 커다랗게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사장은 지금 일이 있어 밖이라며, 들어가는데 꽤 오래 걸릴 것이라 말한다. 그는 알겠다고 답하고 끊는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다.
지도 앱으로 검색해 보니, 열쇠 복사하는 장소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다. 가장 가까운 곳부터 방문을 시작한다. 바로 될 줄 알았는데, 가는 곳마다 문이 닫혀 있다. 네X버 지도에는, 이곳 공구 상가의 정보들이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은 듯싶다. 애초에 이 공구 상가 단지에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옛스럽다.
그렇게 두세 번 허탕을 치자, 결국은 꽤 먼 거리까지 와버린다. 이 거리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그냥 다음에 복사할까. 기대조차 하지 않았건만 문이 열려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간다.
안에 들어가나, 그를 맞이하는 이는 없다.
- 안녕하세요~
- (뒤편에서, 한참 뒤 느릿하게) 예~
- 아, 안녕하세요. 혹시 열쇠 복사 되나요?
- (무심한 표정으로) 네 됩니다~
- 가격은 얼마인가요?
- XXX원이요 (그리 비싸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 아 네. 여기 이 열쇠예요.
- (열쇠를 받아서 보며) 예...
- 얼마나 걸릴까요? 30분 뒤에 올까요?
- 아니, 지금 바로 돼요
- 아, 그..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주인은 말없이 돌아서더니 곧바로 어느 기계에 앉는다. 바이스(고정 장치) 같은 것에 열쇠를 고정한 뒤 스위치를 올리자, 조그만 톱날이 고속으로 돌아간다. 이 톱날은 금속을 너무나도 쉽게 갈아버린다. 주인은 고정된 열쇠의 날 모양과 동일하게, 톱날로 쇳덩이를 갈아낸다. 작업 시간에는 채 2분도 걸리지 않는다.
- (열쇠 2개를 건네며) 여기 있습니다.
- (약간 멍한 상태에서) 아...! 감사합니다.
그가 돈을 지불하자, 사장은 종이로 된 영수증에 금액을 적고는 앞장만 찢어 그에게 건넨다. 이 종이 영수증은 두 장으로 되어있는데, 종이가 얇기 때문에 앞장에 금액을 적으면 뒷장에도 표시가 남는다. 하나는 사업자 보관용, 하나는 손님에게 전달하는 용도인 것 같다. 이 영수증을 증빙으로 제출해야, 그가 업무를 위해 쓴 비용(창고 열쇠 복사 비용)을 청구할 수 있으리라.
원본 열쇠와 복사본 열쇠를 갖고, 그는 다시 회사로 향한다. 시간이 얼마나 됐나. 회사에서 나온지 벌써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났다.
아무리 신입사원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일 없이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 잘 모르겠다. 회사에 있었다고 해도 무언가 명확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텐데. 신입사원이라 그런 건가? 일단 열쇠는 잘 복사했으니까. 앞으로는 홍보팀 매니저한테 굳이 말하지 않고 편안하게 창고를 들락거릴 수 있겠지.
원인이 무엇인지, 어떤 느낌인지 명확히 형용하기 힘든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려 한다. 하지만 이내 불어오는 시원하면서도 차가운 바람이 그의 불안을 잠재운다. 흐릿하고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후덥지근한 날씨 속 이따금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는 걷는다. 심성이 삐뚤어져서인지, 그는 이런 흐릿하고 멸망스러운 날씨를 좋아하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꾸밀 줄 모르고, 꾸미고 싶지 않아 바지통을 줄이지 않은 그다. 3년 내내 태극기처럼 펄럭거리던 그의 교복 바지 밑단. 회사원이 된 지금도 겉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다. 입어보지 않아 감이 잘 오지 않는 양복바지(엄밀히 말하면 그가 입은 것은 양복바지도 아니다), 그래도 회사원 티를 내겠다고 신발은 면접용 구두를 신었다. 뭘 하는지도, 뭘 해야 할지도, 뭘 하게 될지도 모르는 신입사원.
남들이 하는대로 해야되지 않을까. 교복을 줄이고, 남들처럼 꾸며야하지 않을까. 어울리지 않는 옷,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남들에게 휩쓸리던 고등학생 시절보다는 그의 내면이 단단해졌다. 단단해졌다고 해야할지, 나이가 들어 고집이 생겼다고 해야할지.
지금의 이 상황은 그에게 맞는 상황일까. 그가 원하는 상황일까. 당장은 새로운 경험이라는 명분으로 포장이 가능하다. 난생처음 신입사원으로서 입사도 했겠다, 공구 상가에 가서 일단은 목표도 달성하고 옛날 영수증도 받아봤다. 하지만 그를 엄습해오는 불안감은 무엇일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고등학교 3년 내내 바지 밑단을 펄럭거리다가 어느 순간 이상함을 느낀 그 순간처럼. 바지를 줄이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더 근본적인 불안감.
회사에 도착해, 홍보팀 매니저에게 열쇠를 반납한다. 사업지원팀 상사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후 그와 홍보팀 매니저는, 사업부에서 '유이하게' 창고 열쇠를 가진 이들로써 공동 창고 관리자가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창고에 드나드는 횟수가 더 빈번해진다. 그는 자신이 홍보팀 매니저를 넘어선, 진정한 '창고지기'라고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