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머신 메뉴얼
사회 현상, 언론이 심도 있게 다루는 주제, 대중의 소비 패턴 등은 모두 유행이 있다. 한창 인기를 끌던 주제가 어느 순간 감쪽같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전혀 새로운 주제가 꿰차곤 한다. 그가 사업지원팀 막내로서 막내일과 갖가지 잡무를 받고 있던 시절에도 유행을 탄 업무가 있었다. 그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지원팀 업무 중에서도 특히나 '총무 업무'가 그랬다. 그는 자신이 총무 업무를 맡았던 시절 이후로는 총무 업무에 대해 이토록 크나큰 관심과 업무 지시, 요청이 쏟아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커피머신
그가 일하는 사업부는 IT다. Information Technology, 직역하면 지식 기술(실제로는 정보통신 기술)인데 뜻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그는 IT 엔지니어라는 직업은 곧 '컴퓨터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인식한다. 아주 틀린 해석은 아니다. IT 엔지니어의 가장 대표적인 직업이 바로 코드를 짜고 실행하는 '개발자'이니 말이다. 그의 사업부에는 개발자 이외의 다른 IT 엔지니어도 많지만, 그는 간단하게 위와 같이 인식하기로 한다.
어느 회사나 그렇겠지만, 회사원들은 커피를 상당히 많이 소비하는 듯하다. 이는 IT 엔지니어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그가 일하는 층은 관리/지원팀과 영업팀이 함께 사용했고, 엔지니어들은 한 층 위를 통째로 쓴다. 사업부장을 비롯하여, 사업부의 높은 이들은 관리팀과 같은 층을 사용한다. 급할 경우 관리/지원팀에 비서 업무를 시키기 용이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사업지원팀 파티션 옆에는 냉장고, 커피머신, 제빙기가 아예 구비되어 있다. 직급이 높을수록 커피머신과 제빙기를 사용하는 빈도가 잦은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이 밀집해 있는 다른 층의 경우에는, 이런 편의 시설이 빈약한 듯하다. 빈약한 것인지, 스트레스가 많은 엔지니어들의 커피 소비가 많은 것인지, 그는 지겨우리만치 커피에 관한 문의를 받는다. 위층의 커피머신이 망가졌어요, 커피 캡슐이 없어요, 누가 부품을 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해요, 종이컵이 없어요 등이다.
사업지원팀에서는 이런 문의에 대응하기 위해, 커피머신을 아예 새것으로 구매한다. 커피머신을 구매하는 과장에게 사업부장은, 새 제품 좋은 것으로 사주라는 피드백을 남겼다. 사업지원팀이 구매한 새로운 커피머신은, 저 멀리 유럽의 제조업 강국에서 만든 커피머신이다. 커피머신이 도착하자, 그는 상사 한 명과 함께 올라가서 커피머신을 설치하고 내려온다. 설치를 하며 상사가 그에게 말했다. 정수기의 정수 라인이 있으면 자동으로 물 공급이 되는데, 그의 회사 건물은 정수 라인을 따로 빼놓지 않아서 물탱크에 물을 부어줘야 한단다.
정수기 설치 후, 사업부장이 그를 부른다.
사업부장 : 이름이 뭐였지?
그 : 안녕하십니까! 하얀 얼굴 사원입니다!
사업부장 : 어 그래, 얼굴아.
그 : 네!
사업부장 : 위에 커피머신 설치했니?
그 : 네!
사업부장 : 그 커피머신 위에 벽면에다가, 커피머신 어떻게 써야하는지 메뉴얼을 만들어서 붙여놔라.
그 : 메뉴얼 말씀이십니까!
사업부장 : 그래. 청소는 어떻게 해야하고, 주기적으로 어떤 걸 해줘야 하는지 그런 것들.
그 : 알겠습니다!
사업부장 : 오늘 설치했으니까. 엔지니어들 사용하기 전에 빨리 메뉴얼 붙여놔봐.
그 :네!
무작정 알겠다고 답변은 했지만, 그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업무 지시다. 그는 원래 커피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커피 머신은 아예 써보지도 않았다. 써보지도 않은 커피머신을, 앞으로 쓸 계획도 없는 그가 조작법에 대해 메뉴얼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커피머신이 배달되었을 때, 박스 안에는 조그마한 설명서가 동봉되어 있었다. 그냥 이 설명서를 옆에다 놓고 보라고 하면 안 되나? 사업부장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는 엔지니어 층으로 올라가, 커피머신 부품을 이것저것 분해하고 버튼도 이것저것 눌러본다. 뽑을 수 있는 커피만 여럿에, 기능도 너무 많다.
뽑을 수 있는 커피 종류 :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무슨 라떼, !@@!#%!@%
온갖 기능 : 석회질 검사, 노즐 청소, 우유 거품 제조 기능, 거품기 청소 기능, @#$%!@%^
중학교 시절 무슨 검사용으로 만들어진, 용액에 담그면 산성 농도에 따라 색이 이것저것으로 변하는 막대가 있었다. 성인이 이후로는 소변 검사 막대가 더 친숙해졌는데, 이 커피 머신에도 소변 검사 막대기 비슷한 것이 있다. 물의 석회질 농도를 검사하고, 석회질을 분해할 수 있는 알약 같은 것을 구매해서 넣어야 한단다.
계속해서 뜯어본다. 물탱크에 물을 어느 정도 채워줘야 하고, 커피 찌꺼기가 넘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비워줘야 한다는 것은 알겠다. 즉, 하드웨어 측면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문제는 소프트웨어 측면이다. 석회질, 커피 종류, 우유 거품? 커피를 마시지 않는 그에게는 꽤나 고난도다. 탕비실 커피 머신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는 동안, 엔지니어들이 여럿 지나간다.
그 : 안녕하십니까!
엔지니어 1 : 네~
그 : (끙끙거린다)
엔지니어 1 : 뭐에요? 새로운 커피 머신이에요?
그 : 네
엔지니어 1 : 머신 좋아보이네요.
그 : 혹시, 제가 커피머신 메뉴얼을 만들어야 하는데요. 이게 어떤 기능들인지 아시나요?
엔지니어 1 : 글쎄요, 저도 믹스만 마셔서 잘 모르겠네요.
그 : 아, 감사합니다.
이후에도 반응은 다양하다.
엔지니어 2 : 사업지원팀에서 이런 것도 해요?
엔지니어 3 : 석회? 이게 뭐지
엔지니어 4 : 잘 모르겠네요
엔지니어 5 : 아, 우유 거품 해서 라떼 같은 걸 뽑을 수 있나 보네요. 근데 이거는 따로 연결을 해야 되는 거 같은데?
엔지니어 6 : 이거는 청소고... 그냥, 쓰는 사람들이 알아서 방법 알아내서 쓰라고 하세요
엔지니어 3 : 제가 알아봤는데, 석회질 이거는 유럽에서 필요한 거라고 하네요. 걔네는 물에 석회질이 많아서, 그걸 걸러내려고 하는 기능인 거 같아요. 우리는 안 써도 될 거 같은데요?
한참을 붙잡고 씨름한 덕에, 많은 엔지니어들의 관심과 지원 덕에 그는 무사히 메뉴얼 작성을 완료한다. 3가지 필수 기능(커피 추출/물탱크 청소/커피 찌꺼기 제거)만 안내한, 간결한 메뉴얼이다. 간결하게 작성하려는 의도로 인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설명서를 보고 뜯어봐도 알 수가 없어, 커피 머신 작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능만 안내했기 때문에 결과물이 간결한 것이다.
커피 머신을 붙잡고 씨름한 시간이 아주 헛되지는 않았다. 커피머신을 사용하는 엔지니어들 중에서 '석회질 검사'와 '우유 거품'에 대한 문의가 상당수 있었다. 석회질에 대해서는 무시하라고, 우유 거품은 부품과 우유를 추가로 구매해야 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고 답변한다.
그가 메뉴얼을 작성하여 게시하긴 했으나, 커피머신 및 커피에 대한 이해는 아주 초보적이다. 엔지니어들은 직업적 특성 탓인지 커피에 대한 애정 탓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커피머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종국에는 커피머신을 자주 사용하는 엔지니어를 수소문하여, 그가 엔지니어에게 커피머신에 대해 문의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메뉴얼과 설명서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관심을 갖고 써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는 것을 깨우친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