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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 얼굴 학생 Feb 11. 2024

36 - 제빙기

설거지

 커피머신에 이어, 제빙기도 새로 구비한다. 제빙기, 얼음을 만들어내는 기계다. 제빙기 내에 일정 부분까지 물을 채우고 전원 버튼을 누르면,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빙기 내에서 '따그르르륵' 하는 소리가 난다. 채워놓은 물이 적정한 크기의 조각 얼음이 되어, 제빙기 내부 용기에 떨어지는 소리다.


 제빙기 조작법은 커피 머신에 비해 간단하다. 물을 채워넣고 전원 버튼만 누르면 되니, 별도의 메뉴얼도 만들 필요가 없다(애초에 사용하는 인원이 많지 않고, 주로 여름에만 쓴다). 문제는 관리다. 커피 머신은 사용하는 인원이 많기 때문에, 물탱크에 채워놓은 물이 계속해서 새로운 물로 바뀐다. 하지만 제빙기는 상황이 다르다. 얼음이 얼더라도 이 얼음이 반드시 모두 소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는 녹아버렸다가 다시 얼기 일쑤다. 이런 식으로 재활용되는 얼음이 많을수록, 새로운 물의 유입이 적어져 제빙기 내부의 물이 고이게 된다.


 그래서 제빙기는 주기적으로 물을 비워줘야하며, 물을 비우는 김에 내부 세척도 해줘야 한다. 내부의 물이 계속해서 고이면 물때가 끼고, 심한 경우 물 위에 무언가가 떠다니기도 한다. 사업지원팀 옆에 위치한 제빙기는 가뜩이나 사업부장을 비롯한 높은 이들이 애용한다. 그렇다면 그 청소는 누가 하는가. 사업지원팀 막내인 '하얀 얼굴 사원'의 몫이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월요일), 제빙기 코드를 뽑고 기계를 화장실로 가져간다. 얼음 소비가 많은 주에는 무게가 가볍지만, 얼음 소비가 적은 주에는 물탱크에 물이 그대로 남기 때문에 꽤 무겁다. 화장실로 가져가서, 기계 바닥면에 있는 물탱크 마개를 뽑는다. 이때 마개 부분이 세면대 바깥일 경우 물이 사방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에, 마개에 막힌 구멍 부분을 반드시 세면대 안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마개를 뽑는 순간 구멍으로 물이 쏟아지는데,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서인지 물이 시원하다.


 물이 모두 빠지면, 그는 손을 이용해서 제빙기 내부를 닦는다. 화장실에는 세면대에 수세미와 청소 도구가 몇몇 비치되어 있지만, 왠지 쓰기가 꺼려진다. 일단 저 도구들이 어디에 쓰였는지가 불명확하며, 도구가 제대로 세척 및 관리가 되고 있는지도 미지수다. 특히나 제빙기의 경우에는 기계 내부에 닿았던 물을 얼려 직접 섭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불확실한 세척 도구들보다는 자신의 손을 사용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빙기 세척을 화장실에서 했다는 점에서도 100% 청결하다고 보긴 어려울 듯 싶다. 다만 세척을 시행할 이외의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제빙기 내부는 그의 손부터 팔꿈치가 들어갈 정도의 깊이인데, 내부를 따로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손바닥 부분으로 내부 물탱크를 문지른다. 보이지 않는 물때가 꼈는지 미끈미끈한 부분이 이곳저곳 있다. 주로 구석일 경우가 많다. 뽀득뽀득 소리가 날 때가지 손으로 문질러서 닦는다. 내부가 모두 뽀득 소리가 나게 되면, 함께 가져온 커피머신 물탱크 용기에 물을 담는다. 손으로 닦아낸 내부를, 물로 한번 더 헹구고 세척을 한다. 부품을 따로 분리한 상태가 아니므로, 기계의 작동을 제어하는 부분에는 전기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을 뿌린다. 하지만 안에서는 과감하게,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물로 내부를 때리듯 세차게 뿌린다. 이 과정이 끝나면 다시 제빙기를 제 위치에 세팅하고, 내부에 물을 부은 뒤 전원을 킨다. 제빙기 얼음은 입으로 직접 섭취하니, 그는 제빙기 세척 시에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커피머신 물탱크 용기는, 제빙기를 세척하는 김에 함께 세척하고자 가져간 것이다)


 보여주기식 일이나, 타인에게 관심을 유도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그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다른 이들의 관심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화장실에서 제빙기를 닦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직원들이 꼭 한 마디씩 했다. 어유 고생한다, 수고한다, 열심히 닦네 등이다.


 문제는 그가 하는 주된 업무가 없다는 점이다. 주된 업무를 하나 가져가되, 부가적으로 막내일(제빙기 세척)을 시킨 것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는, 제빙기 세척이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맡은 일이 없다. 제빙기를 열심히 닦아 제자리에 가져다두고 나면, 그에게는 마땅히 해야할 업무가 없다. 이따금씩 바쁘기야 하다. 전염병 전표를 치거나, 퀵으로 배달온 물건을 받으러 가거나, 커피머신 문의에 대응하거나, 소모품 요청에 따라 창고에서 물건을 빼주거나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맞는 걸까. 신입사원은 원래 그런 걸까.



 당장은, 그는 맡은 일에 집중한다. 그래, 유튜브 보면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일 하기 싫어한다고 다들 말하는데. 열심히 하면 되겠지. 제빙기나 커피머신을 세척하는 일도 나름 나쁘지 않다. 물때 낀 부분을 뽀득 소리나게끔 닦는 것, 청소가 끝난 말끔한 제빙기를 제자리에 놓고 작동시키는 것 등에서도 작게나마 보람은 있다.


다만, 직장 생활이라는 게 이런 류의 업무나 보람 정도로 끝나는 것일까. 그건 그가 계속해서 염려해야할 일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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