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 떨어지는 온도와 딱 맞는 계절
살갗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 숨을 들이쉬면 서늘한 공기가 몸속으로 퍼진다. 하늘 높이 뜬 보름달은 알알이 맺힌 열매들을 축복하고, 투둑투둑 빗소리가 여름의 문을 두드린다. 녹색 습기는 여름과 함께 물러나고, 푸른색 하늘이 새로운 계절을 펼친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찾아왔다.
지난밤늦게 잠들었지만, 피로감은 남아있지 않았다. 정오를 가리키는 시계와 차가운 공기가 꿈이 아닌 현실임을 상기시켰다.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느끼던 온도의 변화를 이리 갑작스럽게 감각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제는 상쾌하게 이불을 빨았다. 몇 달 떠나 있었던 방에 돌아오니 먼지 쌓인 이불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예전에는 갓 말린 이불에서 햇볕냄새가 났다. 포근하고 따스한 햇볕냄새, 건조기가 보편화된 지금은 맡기 어려운 냄새이다. 그래도 따듯한 건 변함없으니 건조된 이불을 펴고 누워 어릴 적 추억을 맛봤다.
토요일 아침은 누군가가 결혼하는 날이다. 하객들 일정에 부담스럽지 않은 주말 오전, 결혼식장은 붐빈다. 오늘 결혼식 주인공은 아빠 쪽 친척이다. 엄마는 내가 일어나기 전부터 결혼식장에 갈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오랜만에 화장한 엄마를 보니 기분이 묘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 심장을 울렸다.
초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 프로 야구선수가 되었다길래 졸업사진을 찾아봤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모님의 결혼사진을 찾았다. 지금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사진 속 부모님은 환하게 웃고 계셨다. 살집이 있고 통통한 아빠와 늘씬한 엄마는 미래에 서로 정반대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주름 하나 없이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시원한 미소를 보여주는 엄마는 정말 예뻤다. 솔직히 내 눈에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엄마가 더 예뻐 보였다. 크고 화려한 눈에 시원한 입매가 매력적이었다. 또렷한 눈빛으로 아빠를 쳐다보는 눈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있었다. 사랑스럽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신부였다.
그날의 감상을 오늘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평소 화장은커녕 대충 묶고 다니는 머리과 운동복 차림은 엄마의 미모를 가리기 충분했다.
엄마와 아빠를 배웅하고 시리얼을 먹으며 놀았다. 하루종일 핸드폰에 붙들려 정신을 놓았다. 이 게임 저 게임 옮겨 다니며 놀다가 인터넷에 들어가 가십거리들을 찾아봤다. 하루 걸러 하루 다양한 소식이 쏟아지는 인터넷 세계는 내 정신이 유영하기 딱 좋은 정보의 바다였다.
저녁이 되고 동생이 영화를 한 편 보자고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영화였다. 학교 점심시간에 친구와 잠깐 본 모양이었다. 너무 재밌다며 꼭 같이 보자고 하는데 꼭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결론만 말하자면 영화는 별로였다. 영화평에 '연출이 올드해요'를 이해할 수 있는 결말이었다. 다만 영화 보기 전부터 기대에 가득 차 가족들을 불러 모으던 동생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나중에 이 영화가 보이면 오늘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기억, 영화는 내게 그렇게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