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모른다

내맘대로 일기 44

by EAST

민수 씨는 앞에 앉아 있는 대학동기들 때문에 속이 상한다. 이제 곧 정년을 앞둔 나이들이라 회사 그만두고 나서의 제2의 삶에 대한 얘기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P가 L을 보고 말했다.


너는 딸이 전문의 따고 이제 걱정 없겠다.

아직 멀었지, 뭐. 그러는 너는 아들이 공무원 붙었다며.


P와 L는 신났다. 민수 씨는 갑자기 화제가 자식 얘기로 바뀌자 끼지 못하고 술잔만 비운다.

민수야, 너희 애들은?

기어이 차례가 온다. 첫째 녀석은 3년째 9급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다. 둘째는 인문계 학과는 비전 없다며 다니던 대학 자퇴하더니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뭘 하는지 통 알 수가 없다.


어! 그냥 시험 준비해, 좋겠다 너는. 시험도 합격하고, 9급? 민수 씨가 묻는다.

9급은 무슨. 고시 준비하다가 한번 시험 삼아 쳤는데, 7급이 붙었어. 그래서 7급 포기하고 더 공부할지, 아님 다니면서 고시 볼까 고민 중이래.

어, 그..... 그래. 축하한다.

민수 씨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2차를 가자는 말에 내일 이른 새벽에 시골 갈 일 있다는 핑계로 허둥지둥 헤어졌다. 두 아들 녀석 생각에 기운이 하나도 없다.


구순 가까운 아버지가 잠시 집에 좀 오라고 말했다. 가슴 한 켠이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연세에 비해 정정하시다곤 하지만 어른들 하루 앞도 모른다고 했다. 손 귀한 집이라 아버지도 독자, 나도 독자였다. 다행히 나는 아들 두 녀석을 보았다. 집안의 경사였다. 그 덕에 아내는 시가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아들 녀석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 족히 되고, 아버지도 한눈팔지 않고 농사일만 하신 터라 우리 집은 풍족한 편이었다. 게다가 혁신도시로 지정된 곳이 우리 밭이 있는 곳이었다. 땅이 전부 수용되면서 토지보상금이 꽤 된다는 말씀만 하셨지 정확한 금액은 끝까지 함구하셨다.


아버지가 서류봉투를 건넨다.

읽어봐라.

뭐지, 하며 봉투 속 종이를 꺼낸다. 유언장. 흡!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본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버지가 눈으로 어서 읽으라고 말한다. 손주 두 명에게 각각 10억 원씩 유산으로 준다는 내용이었다. 공증까지 다 마친 상태. 나는 깜짝 놀랐다. 두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다. 틀림없었다. 토지보상금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이번엔 내 차례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애써 표정을 숨긴다. 서류 봉투를 뒤진다. 없다. 이게 끝. 그럴 리가. 내 거는? 따로 챙겨두셨나. 이상하네. 그때 아버지가 볼 일 끝났다는 듯 일어난다. 맘이 급하다, 아버지 다리를 붙잡는다.

아니, 아버지. 저..... 저는요?

그동안 길러주면 됐지, 뭘 더?

아니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 아버지를 쫓아 나간다. 아버지가 나를 돌아보더니 말한다.

참, 이 집은 네 이름으로 남겨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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