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일기

1. 로또 순례Ⅰ

by EAST

로또 1등 당첨 확률은 8백14만 5천60분의 1이다. 즉 0.000012%란 얘기다. 0.1%도 아니고 0.00001%란 숫자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다. 믿기지가 않는다. 그러나 1등이 툭하면 20명 넘게 나오는 게 로또이다. 때문에 그런 믿기지 않은 확률보다 이번에는 꼭 내가 1등이 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훨씬 더 피부에 와닿는다. 내가 매주 로또 순례길(?)에 오르는 이유다.


내가 사는 수원에는 로또 명당이 4곳이 있다. 4곳 모두 1등이 자그마치 8~9번 나온 곳이다. 한 곳은 집에서 너무 멀다. 그래서 나는 주로 가까운 3곳을 다닌다. 1곳은 수원역에 있고, 나머지 2곳은 장안문(북문이라고 더 자주 부른다) 근방이다.


토요일 오전 집을 나선다. 단단히 채비를 한다. 로또 명당 3곳을 걸어서 다니려면 족히 2시간은 넘게 걸린다. 이렇게 걸어 다니는 이유는 운동도 하고 주변 풍경도 즐기기 위해서다. 코스는 2가지다. 수원 화성 중 한 곳인 화서문쪽으로 가는 방향과 수원역 쪽으로 가는 방향이다. 그때그때 기분 따라 길을 잡는다.


오늘은 수원역 쪽이다. 걸어서 10분이면 닿는다. 토요일이라 수원역 광장에는 젊은이들로 벌써부터 북적인다. 경기 남부 최대 상권인 수원역 로데오거리에는 형형색색 꾸며 입은 젊은 남녀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신나게 걷고 있다. 좋을 때다. 손 짓 하나, 말 한마디에도 깔깔거리는 젊은이들을 뒤로하고 로또 가게로 향한다. 오늘이 추첨 당일이라 오전 10시임에도 로또를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손에는 오천 원부터 만 원, 오만 원 등 다양하게 쥐고 있다. 줄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이럴 때면 괜히 조바심이 난다. 마치 좋은 번호를 다른 누군가가 먼저 가로채기라도 할 것처럼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는 서 있다. 발을 동동거린다. 이윽고 내 차례다. 간절히 빌면서 만원을 내민다. 기계에서 로또가 뿜어져 나온다. 로또를 받아 쥐고 번호를 본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로데오 거리를 지나 팔달문쪽(남문이라고도 부른다)으로 방향을 잡는다. 교동 부근 수원 부대찌개 맛집 두꺼비집을 지난다. 아침을 거른 참이라 허기지다. 애써 무시하고 그냥 지나친다. 교동 쪽은 옛날에는 번화가였다. 하지만 신시가지가 생기면서 구도심은 잊혔다. 상권은 수원역과 삼성전자가 있는 인계동, 영통 쪽으로 옮겨갔고, 교동을 비롯한 팔달문(남문) 상가는 이제 찾는 이 없이 한적하다. 곳곳에 빛바랜 상가 임대 현수막만 나부낀다. 교동 지나 시장거리로 들어선다. 이곳은 팔달문시장, 지동시장, 영동시장, 미나리꽝시장 등 재래시장 집결지다. 그래서 장 보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재래시장 주 고객은 아무래도 장년층 이상이다. 그들을 대상으로 약국이 시장 초입 양 켠에 서 있다. 그리고 이어서 옷가게, 그릇가게, 과일가게, 떡가게, 도넛가게가 줄줄이 늘어선다. 달큼한 옷수수 찐 냄새가 발길을 사로잡는다. 만두가게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고, 어디선가 믹스커피 냄새가 구수하게 난다. 길 건너편 순대타운 간판이 유혹한다. 순댓국에 막걸리 한 사발 생각에 군침이 꼴깍 넘어간다. 11시가 다 되어간 시각. 고민이 된다. 끙! 하고 참는다.


장안문쪽으로 방향을 잡고, 조금 올라가다 보면 그 유명한 통닭거리가 나온다. 벌써부터 대기줄이 길다. 이제부터 서서히 젊은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관광객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다. 아마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한 입소문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맛집이나 명소로 알려지면 어느 순간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지동시장 내 순대타운도 그런 곳 중 하나다. 맛집으로 알려진 특정 순대집은 관광객이 가득하다. 남문시장 내 매운 어묵집도 그렇다. 줄 서서 매운 어묵과 떡볶이를 먹는다. 하지만 길 건너편, 팔달사와 부국원 사이 도로는 사람 발길이 뚝 끊긴 채 스산하다.


계속 장안문쪽으로 수원천을 끼고 올라간다. 곳곳에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한둘 보이기 시작한다. 연인들이 삼삼오오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다. 수원 3대 통닭집이라는 진미, 용성, 장안통닭집이 자리 잡고 있는 통닭거리에서 한참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향통닭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곳부터는 관광객들이 넘치기 시작한다. 왼쪽으로는 화성행궁이 있고, 직진하면 화홍문(북수문), 방화수류정이 나온다. 화성행궁 광장에는 연이 하늘 높이 떠있다. 근처에는 수원만두, 연밀, 계절곳간, 대왕칼국수, 진주냉면이설옥 등 맛집이 많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다.


직진한다. 하늘거리는 능수버들을 잠시 바라보며 걷는다. 1시간 넘게 걸었더니 다리가 슬슬 아프다. 수원천을 끼고 카페들이 하나 둘 늘어서 있다. 각각 세련된 디자인으로 손님들을 부르고 있다. 화홍이라는 카페에 들른다. 간혹 가는 곳이다. 아이스 카페라테를 먹으면서 땀을 식힌다. 창밖으로는 눈부신 가을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혀 튕겨나간다. 의자에 푹 몸을 묻히고 팔깍지를 끼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곧 나른해진다. 하품이 나오고 슬슬 잠이 온다. 잠든 듯 아니 든 듯 반가수 상태, 나른함에 몸을 맡기다 보면 금방 시간이 흘러가 버린다. 하품 쩍 한 번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곧 화홍문이다. 야경이 유명하다. 그래서 연인들의 인기 데이트 코스다. 1년 내내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화홍문에 올라가서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솔솔 불어와 시원하다. 조금 위에는 방화수류정이 있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용연은 풍경이 일품이다. 수원 화성 중 가장 풍경이 좋은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시 멈춘 발걸음을 장안문으로 옮긴다. 목표 지점인 로또 가게가 지척이다.


성벽을 따라 장안문으로 향한다, 화홍문공영주차장이 우측으로 보인다. 이곳은 곧 관광지구로 개발 예정이다. 내가 수원으로 이사 온 이래로 줄곧 주차장으로 쓰던 곳인데, 도시재생혁신지구로 선정되어 문화 관광 복합시설을 짓는다고 알려졌다. 호텔까지 들어선다는 얘기가 있어서 어떻게 바뀌게 될지 기대가 크다. 눈앞에 웅장한 장안문이 드러났다. 수원화성의 정문 격인 장안문은 서울 남대문만큼이나 위용 있다. 솟을대문이 두 개나 될 만큼 크다. 괜히 세계문화유산에 뽑힌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수도를 이곳 수원으로 옮길 생각으로 만들었던 수원화성, 정조대왕은 장안문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못다 한 꿈이 서려 있는 장안문은 여전히 수백 년을 꿋꿋하게 서 있다.


저기 복권 가게가 보인다. 두 내외가 운영하는 복권가게. 아직은 줄 서지 않고 로또를 살 수 있다. 1등 되세요,라는 주인의 말에 내심 기분이 좋아진다. 나가려다 말고 에라 기분이다, 만 원어치 더 샀다. 다음 가게로 발걸음을 옮긴다. 두 가게 사이는 불과 500m 남짓. 또 다른 가게는 장안공원 맞은편에 있다. 무뚝뚝한 젊은 주인.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어째 로또 1등을 9번이나 된 가게를 차렸나, 싶다.


이제 로또를 다 샀으니까 집으로 향한다. 장안문에서 화서문쪽으로 간다. 이제부터 속칭 행리단길이다. 장안문에서 화성행궁 사이의 길이다. 카페, 음식점, 소품가게들이 말 그대로 백가쟁명이다. 서로 자기 장점을 유감없이 자랑하며 손님들을 끌어들인다. 한 달 정도 지나면 살아남느냐, 아니면 문 닫느냐가 결정된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 문을 열고 닫는다. 빛깔 좋고 세련된 음식들 천지다. 가게 간판도 톡톡 튄다. 골목마다 들어선 아기자기한 가게들로 눈이 호강한다. 다리 아픈 줄도 모른다. 집에 들어오니 정오가 넘었다. 배가 고팠다. 청국장에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칠보산이 있는 수원 서쪽, 관광객 없는 한적한 맛집이다. 오늘의 로또 순례길은 이로써 끝이다. 이제 진인사대천명뿐.

■ 코스(약 8km)

집 → 수원역 → 수원역 로데오거리 → 교동 → 부국원 → 팔달문시장 → 통닭거리 → 매향통닭 → 카페 화홍 → 화홍문 → 화홍문공영주차장 → 북문복권방 → 영화공원 복권방 → 장안문 → 화서문 → 집

■ 소요 시간 : 약 2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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