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로또 순례Ⅱ
미련 때문이리라. 내가 매주 로또 사러 길 나서는 것은. 2019년. 그해 나는 로또 3등이 연거푸 두 번이나 당첨되는 행운을 누렸다. 아니다. 그건 행운이 아니다. 두고두고 생각나는 아쉬움이고, 한탄이다. 번호 1개만 더 맞았더라면, 0.00001%의 주인공이 되었을 상황이었다. 이 글을 두 번 한 것이지만 홀인원을 아깝게 놓친 골퍼인 셈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화서문 쪽이다. 화요일 오전이라 한적하다. 평일 쉬는 이유는 내가 교대직 경비원이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일요일, 야간 근무를 마친 후라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무다. 굳이 화요일에 로또 순례길에 오른 이유는 단순하다. 화요일에 산 복권이 3등 당첨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미신 같은 거다.
화서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로변 인도를 따라 쭉 가는 것과 팔달산 산길로 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시끄러운 대로로 걷는 대신 주로 한적한 팔달산 코스로 방향을 잡는다. 팔달산은 수원 중심에 있는 해발 145m의 야트막한 산이다. 높지 않아서 지역 주민의 사랑을 받는다. 팔달산에 들어가면 굽이굽이 온갖 산길이 있다.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방향을 달리 잡는다.
가파른 비탈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팔달산 중턱이다. 약간 가쁜 숨을 고르며 포장된 산책길을 가다 보면 최근 문을 연 카페 크로이츠가 보인다. 수줍음 많은, 아마 카페를 처음 하는듯한 두 내외가 운영한다. 커피 맛이 좋다. 이따 오기로 하고 지나친다. 수성약수터가 보이고 그 길로 접어든다. 본격적으로 팔달산에 들어간다. 곧 세 갈래 길. 오른쪽으로 가면 시립중앙도서관이 나오고, 직진하면 팔달산 정상인 서장대다. 그러나 가파른 계단길.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굽이굽이 산길 따라 걸어간다. 중간중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최근 맨발로 걷는 사람이 부쩍 눈에 띈다. 팔달산에 황톳길을 만들어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벽을 따라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한적하다. 지난겨울 습기 잔뜩 머금은 폭설로 부러진 나무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수령 백 년은 넘음직한 소나무들이 우지끈 넘어진 모습을 보니 가슴 아프다. 숨이 약간 차오를 무렵 정상에 이른다. 서암문 통과해 서장대 이르는 길을 버리고 성벽길을 따라 그대로 직진한다. 서장대관광안내소 지나 능선을 따라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지석묘군이 보인다. 일명 고인돌이다. 청동기 때 쌓았단다. 기원전이다. 무려 약 3,000년 전. 그때도 이곳 수원 팔달산 부근에는 사람들이 살았다. 까마득한 세월이다. 수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곳곳에 저수지와 천이 흘렀으니 살기 좋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가만있어보자, 그때도 이 지역 지명이 수원이었을 리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산길이 끝나고 포장길이 나타난다. 관광객을 겨냥한 카페가 길가에 서너 곳 서있다. 이제부터 팔달산을 내려간다. 경사 급한 내리막길을 조심스레 걷다 보면 내리막 끝자락 왼쪽으로 춘천메밀막국수집이 보인다. 교동 인쇄골목에 있다가 이곳으로 이전해 왔다. 수원에서 꽤 이름난 막국수 맛집이다. 특유의 단짠 양념으로 유명한데, 호불호가 갈린다. 면 요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곳이다. 오늘은 때가 이르다. 애써 못 본 척 발길을 서두른다.
메가박스가 보인다. 팔달문 부근이다. 이곳 팔달문 부근에는 예전에 영화관이 즐비했다고 한다. 수원극장, 중앙극장, 로얄극장, 제일극장, 매산극장, 국제극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메가박스는 구(舊) 로얄극장 자리였다.
(네이버블로그 참조, https://blog.naver.com/ykhpd/220917972054)
2002년 수원으로 이사 왔는데, 팔달문시장으로 장 보러 왔을 때 중앙극장을 봤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팔달문 주변으로 많았던 극장들은 수원역 애경백화점(현 AK플라자)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인 CGV가 2003년 개관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서울 종로3가의 피카디리, 단성사, 충무로 대한극장과 같이 유서 깊은 영화관조차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하긴 지금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은 코로나에 한 방 맞은 데다 OTT란 카운터 펀치에 급소 맞고 녹다운 상태인 것을 보면 인생 새옹지마, 격세지감이다.
옛 영화를 뒤로 하고 걷다 보면 남창초등학교 앞에 있는 맛집 유동골뱅이가 나온다. 여기부터 공방거리 초입이다. 서울 인사동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눈요기하기 좋다. 규방공예품, 은공예품, 목공예품 등이 좌우로 즐비하다.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시간을 많이 뺏긴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화성행궁이다. 공방거리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던 관광객이 엄청나게 많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소위 말하는 수원 핫플, 행리단길의 시작점이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가득한 이곳, 화성행궁. 도성 한양으로부터 머나먼 길을 왔던 그를 기려 수원을 효원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효막심한 나는 부끄러워 총총히 행궁을 지난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기도 했다. 오늘의 목적은 로또임을 다시 한번 상기한다.
500m쯤 직진한다. 왼쪽으로 아담한 식당, 골목집 간판이 보인다. 허영만의 백반기행과 맛있는녀석들에 소개된 허름한 노포다. 돼지묵은지찜도 맛있고 고추장찌개도 칼칼하니 좋다. 이름 생소한 민물새우던질탕은 아직 섭렵 전. 버킷리스트에 올라와 있다. 공영주차장 지나, 도노 1796 호텔과 온유여월 한옥 카페 지나면 행궁빙수집이 보인다. 여름 꼭 한번 가보자 했지만 아직이다. 내년을 기약해 본다. 오른쪽으로 길을 꺾으면 눈앞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이제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정지영커피로스터리가 보인다. 수원 지역 로컬 브랜드로 자리 잡은 이 카페는 행리단길이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훨씬 전부터 이곳 장안문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간혹 산책길에 들러 루프 탑에서 장안문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던 곳이다. 지금은 사시사철 젊은 연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곳 외에도 장안문을 배경으로 카페가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땅이 조금이라도 보이기만 한다면 하루가 다르게 카페가 들어설 정도로 인기 많은 곳이다. 장안문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첫 번째 타깃. 북문복권방에 도착했다. 친절한 주인 내외에게 인사한다. 진열대에는 연금복권과 즉석복권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다. 위기다. 애써 외면한다. 얇은 지갑 사정을 떠올린다. 게다다 이번 주 토요일 또 한 번 사러 나오지 않느냐며 다독인다. 로또복권만 사고 간신히 빠져나온다. 두 번째 타깃. 영화공원 복권방이다. 무뚝뚝한 젊은 주인. 말없이 로또만 사고 나온다.
이제부터 집으로 복귀하는 길이다. 목적을 달성했는지, 발걸음이 무거울 때다. 장안문과 화서문 사이에 있는 장안공원 길로 들어선다. 저 멀리 팔달산 정상에는 서장대가 보이고, 화서문과 서장대 사이 서북각루 아래 억새가 피기 직전이다. 곧 활짝 피면 장관이다. 포토존 명소다.
쉬엄쉬엄 지친 다리를 끌고, 서북각루 지나고 옛 도지사 관사를 거쳐 팔달산 중턱 포장된 길로 접어든다. 곧 카페 크로이츠가 보인다. 다리도 쉴 겸 커피도 한 잔 마실 겸 들어간다. 주인 내외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수줍게 반긴다. 커피와 이 집만의 별미 호니토르테를 주문한다. 꿀을 발라서 겹겹이 쌓은 미니 케이크다. 달달하니 커피와 함께 하면 아주 좋다. 한 잔 커피에 전신의 나른함이 서서히 깬다. 그 순간의 느낌을 즐긴다. 여유롭다. 의자에 몸을 묻히고 산 아래에 눈길을 준다. 정오 무렵, 한적한 풍경이다. 지갑 속에 고이 간직한 로또는 이번 주 토요일 햇빛을 볼 것이다. 그 빛이 광명의 빛이길 바라면서 의자에 몸을 더욱 깊숙이 묻는다. 1등 당첨을 상상해 본다. 씩 웃는다. 피로가 싹 가신다. 힘을 얻어 집으로 향한다. 또 하나의 순례길 여정이 마무리된다.
■ 코스(약 7km)
집 → 팔달산 → 약수터 → 서장대 → 지석묘군 → 춘천메밀막국수 → 메가박스 → 공방거리 → 화성행궁 → 골목집 → 장안동공영주차장 → 행궁빙수 → 정지영커피로스터리 → 장안문 → 북문복권방 → 영화공원 복권방 → 장안문 → 화서문 → 카페 크로이츠 → 집
■ 소요 시간 : 약 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