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신호

일기장에 담긴 SOS

by 혜삐
구조 신호

나는 그날의 일을 일기장에 꾹꾹 눌러 적었다.
새벽 3시에 벌어진 일, 식혜 한 잔을 거절했다가 배를 걷어차인 순간, 숨조차 쉴 수 없었던 공포.
초등학교 6학년의 어린 손글씨로, 그날의 기억을 지워지지 않도록 남겼다.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일기는 선생님께서 검사하신다는 걸.
선생님은 늘 일기장을 모아가셨고, 빨간 펜으로 코멘트를 남겨주셨다.
어쩌면 나는 그걸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대신 발견해주기를 바랐던 것.
그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구조 신호였다.


며칠 뒤, 선생님이 나를 방과 후에 따로 불렀다.
일기장에 적힌 내용을 다 보신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네… 맞아요. 아빠가… 가끔 저를 때리세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안의 그런 분노와 화를 공부로 승화시켜보는 게 어때?”


그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가 원한 건 위로나 보호의 약속이었는데, 돌아온 건 교과서적인 충고였다.
내 몸에 남은 상처와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 듯했고, 그저 공부라는 말로 덮어졌다.
내가 보낸 구조 신호는 그렇게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발걸음은 유난히 무거웠다.
마지막 기대가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어른은 다를 거라 믿었다. 선생님만큼은 나를 지켜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어른들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내 일기장은 그저 글쓰기 연습장이 되었고,
구조 신호는 회수되지 않은 채 공중에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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