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가에서 잔주름이 사라졌다. 쌍꺼풀 수술을 한 듯 밤새 부리부리해진 눈이다. 이 몰골로 어떻게 나갈지 난감하다. 연거푸 찬물로 세수를 해보고 톡톡 두들겨 보아도 말짱 헛수고다. 주말에 시골집을 다녀온 내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출근길이다.
며칠 전 ‘허삼관 매혈기’라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훔쳤다. 지독한 가난 탓에 위기 때마다 자식을 위해 피를 팔아야 했던 소설 속의 주인공 허삼관! 말년에는 피를 팔지 않아도 되지만, 이제는 다 늙은 본인을 위해 마지막으로 피를 팔러 간다. 하지만 모욕적인 거부를 당하고 울며 거리를 헤매는 허삼관! 허삼관을 보면서 우리 아버지가 떠올라 한참을 울었다. 내 아버지는 허삼관처럼 피를 팔지는 않았지만, 고혈을 쥐어 짜내는 고통을 감내하며 육남매를 키웠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말한다.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내가 늙어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북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허삼관에게서 피는 힘이요 곧 돈이었다. 아버지에게 우리 육남매는 어떤 존재이었을까? 양 날갯죽지를 꺾고 어깨를 짓누르는 짐 덩어리? 자유를 억압하는 포승줄?
아버지의 발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가뭄의 논바닥 갈라지듯 갈라진 핏기 없는 작은 발이다. 험난하고 고된여정을 감내하면서도 끄떡없더니, 지금은 늙은 몸 하나 지탱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 듯 삐쩍 말라 있다. 무릎에서부터 내려오는 주름은 마치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 같다. 그들은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내려와 다섯 개의 가늘고 길쭉한 섬을 향해 밀려들고 있다. 또 다른 한쪽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섬의 맨 끝자락에는 제멋대로 자란 크고 작은 바위가 솟아 있다. 거뭇거뭇 흉측한 것이 가까이 다가서기를 망설이게 한다.
“아빠, 발톱이 그새 또 두꺼워졌네요. 무좀이 더 심해졌어요.”
“발톱 때문에 양말을 신기가 굉장히 불편하다.”
“제가 다 갈고 약도 발라 드릴게요.”
니켈 재질의 각질 제거기를 사용해야만 갈아낼 수 있는 지독한 아버지의 발톱이다. 워낙 오랫동안 방치된 터여서 치료도 곤혹스럽다. 군대에서 신었던 군화로 생긴 무좀이 농사일로 신어야만 했던 고무장화 때문에 악화될 뿐 완치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의 발가락을 가만 보니 어딘가 익숙한 모양새다. ‘어라, 내 발가락이네. 내 발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었구나!’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의 애처로운 주인공 M이 떠올랐다. 갑자기 웃음이 난다. 난 아빠 딸이 맞네요.
손발 물기 마를 날 없는 아버지의 고단한 삶, 이제는 그만 쉬어도 좋으련만 아직도 손에서 일감을 놓지 못한다. ‘이놈의 지겨운 밭농사는 내가 죽어야 끝이 나려나?’ 우연히 듣게 된 아버지의 혼잣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농사가 정말 버겁고 힘겨우셨구나.’ 아버지는 그토록 싫어하던 농사로 인해 수은에 중독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왼쪽 청력을 완전 상실하고, 오른쪽만 보청기에 의지해 겨우 듣는다. 그리고 이젠 황반변성으로 눈까지 점점 시력을 잃어간다.
3년 전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동생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에 도착한 아버지는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누구든 노화가 되면 기억력도 퇴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날 이후로 확연하게 달라졌다.
‘사진상으로 보면 노인성 질환의 초기 증상으로,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라는 의사로부터의 진단은 이미 16년 전 일이다. 본인의 증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던 아버지가 둘째인 내게 전화를 했다.
“내 맘이 내 맘 같지 않고 이상하다.”
가까이 살 때는 병원에도 자주 모시고 다니며 챙겼다. 그런데 청천벽력, 시댁에 닥친 불행으로 시아버지를 모시게 되면서 친정에는 소홀해졌다. 삶이 힘들고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아버지를 방치한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노화로 인한 치매는 달리 치료 방법도 없고, 우리 아빠는 아직 멀쩡하다.’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가족을 위해 일을 하셨고, 늦둥이 남동생과 여동생까지 가르치셨다. 건강검진에서 어찌하여 아버지의 정신건강을 소홀히 여겼을까? 그건 아마도 아버지의 병증을 인정하거나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비겁함이 내게 있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2018년 1월 아버지와 함께한 베트남 여행, 그 이듬해 중국 하이난 여행지에서 아버지가 여러 번 보냈던 신호를 무시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다. 자꾸만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가 참으로 당황스럽다. 병마에 속수무책으로 잠식당하고 있는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한 채 바라만 보는 초라함에 분노하고 절망한다. 왜 하필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가?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어느 노스님 말씀이 떠오른다. 치매 노부모를 걱정하는 건 부모님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본인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정작 치매 환자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가족들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주변을 알아보지 못함에 대한 서운함과 환자의 일상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 부담감이 저변에 깔린 것은 아닐까?
살면서 아버지 보호 아래 늘 받기만 했다. 그런데 아버지 머리를 감겨 드릴 날이 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간 어머니의 힘들다는 투덜거림도 다소 과장된 것으로 생각했다. 물을 받고 머리를 감자는 말에 순순히 따라 나오는 아버지다. 한참 어린 딸이 하자는 대로 얌전히 따르는 아버지가 낯설다. 조심스럽게 샴푸를 풀어 짧게 깎은 머리를 감긴다. 행여 눈이 매울까 헹굼을 하면서 아버지의 옆 모습을 훔쳐보았다. 내게 늘 우상이던 아버지가 구부정하게 서 있다. 마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다. 질끈 감은 눈과 꽉 다문 입이다. 얼굴을 씻겨 드리고 수건으로 닦았다. 발을 씻자고 했더니 말없이 슬쩍 발만 내민다. 이내 잠자코 계시던 아버지가 살짝 민망한지 그제야 본인도 열심히 씻으신다.
“아빠, 아예 목욕도 할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예상과 달랐다. 놀란 눈 크게 뜨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이다. 아직은 부끄러움을 안다는 생각에 내심 안도감마저 든다. 아버지는 유난히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다. 큰 수술로 구멍 뚫은 폐에 줄을 매달고도 부득부득 홀로 화장실을 다녀오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도 그러는데 아빠도 나랑 같구나!’ 하는 생각에 또 웃음이 났다. 나도 그런 아버지를 똑 닮았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욕실 구석에서 내 눈길을 끄는 물건이 있다. 유독 커다란 이동용 욕조가 눈에 띈다. 원래 저 자리엔 우리 아들 욕조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손자를 씻기던 유아용 욕조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성인용 욕조다. 아마 아버지 때문에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혼자서는 씻지도 못한다는 어머니 말씀을 증명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부푼 꿈을 안고 가출을 결심해 밤 기차를 탄 청년이 있었다. 시골 한량인 술에 찌든 머리만 좋은 아버지를 둔 장남이던 내 아버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농사꾼 되기가 죽기보다 싫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났다. 서울 남산 끝자락에 친구와 숨어지내던 아버지의 소원은 ‘서울특별시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끈질긴 할아버지에게 여러 차례 붙잡혀서 내려왔고, 결국 맏이로서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술로 가산을 탕진한 할아버지는 빚만 잔뜩 물려주고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묻음과 동시에 아버지의 꿈과 울분도 가슴에 묻으셨다. 그리고 이어진 결혼과 줄줄이 태어난 어린 자식들은 아버지의 족쇄가 되었다. 낮에는 논농사로 밤에는 찬 강바람을 맞으며 실뱀장어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마저도 금강하구둑 공사로 살길이 막막해지자 해외 파견 근로자로서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기를 타고 떠나셨다. 뜨거운 모래사막을 견디며 외화를 벌어온 아버지, 외로움과도 처절한 사투를 벌인 아버지의 30대는 그렇게 치열했다.
귀국 후 할아버지의 빚을 청산한 후에도 아버지의 고생은 이어졌다. 새로 시작한 아버지의 직업은 막노동, 철강회사에서 무거운 쇳덩이도 나르고 사진도 찍었다. 우리 아버지의 직업은 대체 몇 개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 작은 체구 어디에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나왔는지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몇 번의 교통사고와 건설 현장에서의 낙상으로 인한 충격은 뇌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지금의 ‘상세 불명의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은 잘못된 것이다. 원인은 너무나도 뚜렷한데 소위 전문가라는 그들만이 모를 뿐, 우리 가족과 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은 원인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 육남매가 자리를 잡기까지는 멀쩡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정신, 아버지는 이제야 다 내려놓고 기억 뒤편에 숨고 싶으신 것이 아닐까?
부랴부랴 아버지께 달려간 날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첫 마디는,
“아이고, 우리 둘째는 참말로 오랜만이다.”
“아빠, 저 한 달 전에도 나흘 있다가 갔는데?”
나는 아버지께 여전히 집에 잘 오지 않는 딸이자, 늦게까지 공부만 하는 취준생인 딸로 남아 있는 것이다. 너무나도 죄송스러웠다.
“아빠, 저 취업해서 10년째 일하고 있어요. 공부는 이제 그만하고 돈 벌고 있어요.”
못난 딸 공부를 위해 손자를 맡아 준 아버지.
홀시아버지를 모시며 공부하는 둘째를 마음 아파하던 내 아버지.
어느 날 내가 보고 싶다며 우리 집에 갑자기 오신 아버지.
하필 그날 오물이 묻은 바지를 내게 내밀던 시아버지.
화내고 방으로 들어간 딸을 대신해 몰래 쭈그리고 손빨래를 하다 들킨 아버지.
“아빠가 그걸 왜 빨아? 버리면 되지.”
“딸내미가 못하면 아빠가 하면 되지 뭘 그러냐?”
아버지께 여러 번 다짐을 받았다.
“아빠, 효도할 테니까 100세도 더 사셔야 해요. 그리고 자주 올게요. 저는 절대 잊으면 안 돼요.”
내 욕심이란 걸 알면서도 더 욕심을 부려 본다.
‘당신의 아버지나 아버지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면 허삼관 같은 삶을 사셨을 수도 있다. 그 내력 속에 당신이 있다면, 당신의 그늘진 자리엔 또한 허삼관의 삶이 있는 거라구. 안 그래?’
이 구절이 계속해서 내 귓전을 아프게 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