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가 코앞에서 살짝 고개를 내민다. 희한하게도 색깔이 꺼먼 게 아닌 하얀 놈이다. 농사를 망치는 해로운 동물이기에 얼른 망치를 들었다. 힘주어 냅다 내려치니 아프다고 소리치며 숨는다. 그런데 금세 다른 곳에서 튀어나온다. 놓치지 않으려고 잽싸게 몸을 날려 더 세게 때렸다. 이젠 끝인가 했더니 황당하게도 바로 옆 구멍에서 멀쩡히 머리를 내민다.
스트레스가 풀리기는커녕 되려 두더지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다. 팔도 아프고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무릎을 베고 좀 누워 봐요. 그새 또 나왔어.”
처음엔 뽑았다. 몇 개 안 되었으니까. 앞에서 밉살스러운 두더지처럼 나타나더니 급기야 정수리에서도 보인다. 잡아도 잡아도 다른 쪽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얄미운 그것과 닮았다. 차츰 개수가 불어난다.
“여기 베개 베고 누워요. 아직 머리숱이 있으니까, 티 나지 않게 자릅시다. 뿌리째 뽑으면 그 자리엔 아예 안 난대요.”
“어차피 나올 텐데 내버려 두지?”
“아빠가 늙어 보이면 아들이 좋아하겠어요?”
합의하에 가위로 머리카락 밑동을 짧게 자르기로 한다. 생각보다 많은 새치에 한참을 열중했나 보다. 이윽고 듬성듬성해진 머리가 허전하다 못해 황량해 보인다.
“미안. 너무 잘랐네?”
“...”
당황한 표정을 보고 민망함에 머리만 긁적인다.
“염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약이 독해서 시력이 떨어진대.”
“나이가 들어 보이잖아. 피부는 아직 탱탱한데.”
“좀 더 있다가.”
건강에 살짝 예민한 남편은 끝까지 버틴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염색해야 할까 봐.”
“갑자기?”
“직장에서 선배들 눈치가 보여.”
미용실에 다녀와 젊어진 남편의 모습은 확실히 생기 있어 보이고 좋다.
“거봐, 기분전환도 되고 훨씬 멋지잖아.”
“퇴직하면 안 할 거야.”
내키지 않는 염색에 한동안 투덜거리더니 생각지 못한 제안을 한다.
“비용이 착해서 해 달라고 했는데 머리가 가렵네.”
“염색약을 얼마나 좋은 걸 쓰겠어요?”
“매번 비용도 부담이고 부인이 집에서 해주면 안 돼?”
정확히 한 달 후, 염색약을 사 온 남편이 반강제로 머리를 맡긴다. 긴장되어 설명서를 찬찬히 살핀다. 제 1제와 제 2제를 동량으로 섞는다. 모발에 골고루 도포하고 빗으로 빗는다. 미온수로 헹구고 샴푸를 한다. 방법은 제법 간단해 보인다.
섬세한 손놀림으로 분명 새치에만 발랐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귓불이며 이마 목덜미까지 부분부분 까맣다. 심지어는 옷이며 거실 바닥까지 염색이 되니 난감하다. 한참 후에야 욕실에서 나온 남편의 몰골은 그야말로 뻘겋고 꺼멓다. 마치 살갗이라도 한 꺼풀 벗긴 모양새다.
“괜찮아?”
“응!”
“가렵지 않아?”
“응!”
“나, 잘했지?”
“담에도 또 해 줘?”
“그래!”
“그럼 나 용돈 줘요.”
처음이자 끝으로 받은 수고비는 만원! 그러나 뿌듯함은 잠시, 슬슬 꾀가 나기 시작했고 염색은 또 하나의 집안일이 되었다. 누구든 편함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지사, 귀찮음은 꾀를 내어 마음속 간사함을 부르고 초심은 모양을 달리해 핑곗거리를 찾는다.
‘염색을 자주 하는 게 몸에 더 해로울 수 있지.’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런가?’
‘이번엔 제대로 해 줘야겠어.’
남편을 의자에 앉히고 의미심장한 투로 말한다.
“뿌리 염색을 해 보자.”
“부인이 알아서 해요.”
여느 때보다 긴 시간과 정성을 들이기로 한다. 꽤 많은 양을 꼼꼼하게 구석구석 바른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주문한다. 기다림에 지친 남편이 급기야 의자에 앉아 졸고 있다. 샴푸를 하고 나온 머리는 그야말로 시꺼멓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묻는다.
“맘에 들어?”
“피부 속까지 까매도 너무 까매.”
“금방 빠질 거야. 뿌리까지 해서 그래. 뿌리 염색!”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이상하다.
“머리가 너무 가려워.”
“?”
“긁어서 손톱 밑까지 까매. 이거 봐.”
“어떡해.”
“머리카락 빠지는 것 좀 봐.”
“빨리 병원에 가요.”
“이러다 말겠지.”
“아냐, 머리털 다 빠지면 어떡해?”
“앞으론 절대로 안 해줄 거야.”
남편이 다시금 머리를 쥐어뜯는다. 움켜쥔 머리털이 한 움큼씩 빠질 때마다 어깨가 절로 움츠러든다. 탈모가 아니라고 괜찮을 거라는 피부과 의사의 말에 겨우 안심한다.
배우자 머리카락이 좀 없으면 어떻고 백발이면 어떻다고. 건강하기만 하면 되지. 이렇게 나이가 들고 인생의 후반전을 향해 간다는 생각에 씁쓸하다. 이제 내 머리에도 얄궂은 그것이 하나씩 출몰하기 시작한다.
“부인, 나 염색해야 해.”
“나보고 또 하라고?”
“그 뿌리 염색 말고 시간을 짧게 해서 하면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