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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aptain가얏고 Jan 04. 2024

사랑에 대한 고찰

 막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해.”

“얼마만큼?”

“하늘만큼 땅만큼.”     


결혼 10년 차 부부의 대화는,

“나 사랑해?”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나?”

“말을 해야 알지. 어떻게 알아?”     


결혼 20년 차 부부는,

“왜 사랑한다고 말 안 해?”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냐!”

“...”     


 연인 사이든 아니든 대부분은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만큼 애정이 결핍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망스럽게도 사랑마저 유효기간이 있다고 한다.      


 미국 코넬대학교 ‘인간 행동 연구소’ 신시아 하잔 교수는 미국인 5천명을 대상으로 인터뷰 조사를 시행했다. 사랑의 열병은 평균 18개월에서 30개월이라고 한다. 즉 열정적인 사랑은 2년 6개월 정도면 식어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에 빠진 후 1년이면 사랑의 감정이 절반 정도가 감소한다. 그리고는 차츰 줄다가 사라진다고 한다.      

 

 사랑을 과학적으로도 설명한다. 사랑에 빠지면 가장 깊숙한 곳의 미상핵이 활성화 되어 도파민이 샘솟는다. 도파민은 사람을 기쁘게 해 웃게 만들거나 감정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다.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예뻐지며 사랑은 숨길 수가 없는데, 이 때문에 도파민은 사랑의 묘약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본능을 담당하는 미상핵 부분의 활동이 줄어든다. 그리고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대뇌피질의 활동이 활발해져 객관적인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랑을 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상대의 단점도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보임에 따라 서로에게 실망하고 결국 차갑게 식는다. 꺼져가는 화로의 불씨를 되살리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하물며 얼어붙은 사랑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은 말해 무엇하랴.   

  

 폭풍적인 남녀 간의 사랑이 900일인 이유는 종족 보존을 위해서 필요한 기간이라고 한다. 다음 세대를 낳고 어느 정도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기간이 최대 30개월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내 짝의 사랑도 이미 식은 지 오래?’

 ‘그럼 내게 속삭이는 사랑은 뭐지? 여태 속고 사는 건가?’

 괜히 의뭉한 의심이 든다. 



 영웅 헤라클레스를 쓰러뜨린 것도 결국은 그의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질투다. 네소스가 건네준 독약을 사랑의 묘약으로 알고 받은 어리석음이다. 한눈을 파는 남자의 옷에 바르면 변심한 마음을 돌려놓는다는 사랑의 묘약은, 둘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복수의 피였다.    

  

 거의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란 무엇일까?

 단지 생활 공간을 공유하고 같은 자녀를 둔 공동체일 뿐인가? 

 신뢰가 바탕이 되지 않는 관계를 구태여 유지해야 하나?

 서로에게 의무만 강요하는 삶이 의미가 있는가?    

  

 상대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관여치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 사이라면 그건 남이다. 굳이 같은 공간에서 불편한 심기로 생활할 필요가 없다. 중년의 부부는 ‘의리’로 산다는 희한한 말을 한다. 의리로 살자면 구태여 부부가 아닌 친구와 살아도 된다. 모든 일도 반반씩 합리적인 선에서 부담하면 된다. 의리로 함께 할 이성 친구를 찾아보면 어디 없겠나. 그렇다고 그들 모두와 같이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어느 순간부터 짝은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않는다. 행여 만지기라도 하면 금세 빼앗아 간다. 그만큼 어느 틈에 비밀이 생겼다는 의미겠지? 당연히 사생활은 존중되어야 하는 게 맞다. 서로 간섭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하지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의심을 낳고, 의혹은 쌓여 불신으로 변한다.      


 가족밴드에 올라온 영상이 어딘가 수상하다. 수영을 좋아하는 남자가 멋스럽게 영법을 선보이고 있다. 분명 호텔 수영장인데 누군가 찍어주고 있다. 심지어 카메라를 향해 다정한 수신호까지 보내고 있다.      


 ‘누구지?’

 불쾌함과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영상 아래에 댓글을 쓴다.


“요즘 수상해. 사진 찍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순간 사라지는 영상으로 인해 화가 치밀어 감정이 폭발한다.      


“불화의 씨앗인 밴드를 폐쇄해 버리겠어.”

“동영상, 누나가 찍어준 거야.”

“왜 바로 지웠는데?”

“의심받으니까 기분 나쁘지.”     


 며칠 전 사정상 일정을 조율하지 못한 남편은 세 명의 시누이와 ‘호캉스’를 다녀왔다. 어렵게 낸 시간을 가족과 의논 없이 통보했다는 사실에 서운했다. 더군다나 내게는 한 번도 베풀지 않던 일, 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섭섭한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터진 또 하나의 사건은 인내심을 시험하기에 충분했다. 어느 배우자든 항상 존중받기를 원하고 본인이 상대방에게 최우선이기를 바란다. 상대방에게 더 이상 중요한 사람이 아님을 느낄 때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한 기분이라니 배신감마저 든다. 이런 이유로 다른 사랑을 찾는구나!     

 

 ‘나도 새로운 사람에게 위로받고 싶고, 정서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가장 위험한 적은 내부에 있다. 자신을 이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싸움에서 이기는 것임을 알겠다. 난 지금 위험에 처해 있음을 느낀다. 사심 가득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사고를 칠 수 있을 것만 같다.’     

 화가 난 채 저녁을 차린다. 남편도 잔뜩 성이 난 모양이다. 같은 자리에 있고 싶지 않은지 식탁으로 오지도 않는다. 눈치를 살피는 아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고 서둘러 자리를 뜬다. 나도 얼른 먹고 일어선다. 한참 뒤에야 홀로 밥 먹는 소리가 들린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이다가 잠이 든다.      


 한밤중 끼익 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깬다. 곧이어 누군가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마도 남편인 것 같다. 내가 화날 때면 먼저 화해를 청하는 사람이니까. 


 ‘흥, 누가 그냥 넘어갈 줄 알고?’      


이불을 꽉 움켜쥔다. 평소와 다르게 아무런 말이 없는 남자다. 슬금슬금 조금씩 이불을 걷어 내리려 한다. 그런데 이번엔 무언가 이상한 것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남편이 아닌가? 그럼 누구지?’     


 한기가 느껴지는데 꼼짝할 수가 없다. 소리를 내지르는데 입 밖으로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눈을 뜬다. 옆에는 아무도 없고 이내 울음이 터진다. 아들은 방문을 닫고 곤히 자고 있고 거실엔 남편이 없다. 버릇처럼 짝을 찾아 나서는데, 서재에 얇은 이불만 하나 덮고 한껏  웅크린 남편이 보인다.      


 잠결에 놀란 남편이 꼭 안고 다독인다. 짝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란 듯이 가족밴드까지 탈퇴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런데 어찌 이런 한심한 상황인가? 가위 한 번 눌렸다고 이처럼 바보 같은 일을 벌이고 만다. 결국 이른 새벽에 근무지로 가야 하는 사람을 괴롭힌 철부지가 되고 만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다큐멘터리 영화의 노부부 이야기가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76년의 한결같은 순수한 부부애 때문으로 보인다. 긴 세월 동안 그들 부부의 삶 속에는 열정적인 사랑도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친구 같은 사랑 그리고 오누이 같은 사랑도 녹아 있을 터이다.     

 

 사랑은 여러 모습을 하고 우리를 찾아온다. 남녀 그리고 부모 자식, 우정, 형제애, 이웃과 더 나아가 존 스타인백 ‘분노의 포도’에서의 마지막 장면인 가슴 뭉클한 인류애 등등.   

   

‘지금 우리 부부의 사랑은 어디쯤 어떤 모습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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