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가 나빠서 연락드립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희박해 보이니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며칠 전 주문한 다육식물이다. 다육이라 함은 본디 강한 생명력이 상징인데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위기에 처했다. 선명한 푸른색이 아닌 군데군데 누렇고 거무튀튀한 것이 심각한 병에 걸렸음을 짐작게 한다. 나머지와는 확연히 다른 위태로움으로 시선을 끈다.
실험대에서 주목받는 것도 모자라 급기야 속까지 내어 주어야만 하는 운명의 용신목이다. 들어갈 때는 멀쩡했던 것이 메스에 갈기갈기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어 실험실을 나선다. 이처럼 먼저 들어간 동료 옆에 두었던 선인장에 탈이 난 것이다. 머지않아 닥칠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시들시들하더니 급기야 고꾸라졌다.
순간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떠올랐다. 잔뜩 상기된 얼굴의 남편이 책을 건넨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니 부인도 읽어봐요.’
영웅의 활약이나 무용담이 아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의 심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 평범하던 사람이 돌연 비참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겪는 정신적인 충격과 심리변화를 보여 준다. 수용소 안에서 잔인함과 끔찍한 폭력성을 드러낸 사람과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삶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과 조건이 아니며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지난날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그러한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했다. 절박함도 특별한 일이나 기대할 것도 없는 지겨운 일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젊은 날의 모습이다. 이쯤이면 아니 여기만 지나면 환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까? 스스로 선택한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갇혀있다. 벗어나야 함을 알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열정이 없고 낮은 자존감으로 불평을 일삼던 시절은 결국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프랭클 박사는 인간이면 누구든 살아갈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삶을 굳건히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 의미는 정해진 답이 없으며, 누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주어진 인생 속에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지난해 날벼락 같았던 두 번의 수술이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신은 명의를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게으름과 인생을 허비함에 대해 강력한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실험실 구석에 살아남은 딱 하나의 용신목이 아직 파릇파릇하다. 벌떡 일어나 햇살 좋은 창가로 조심스레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