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친 그대
“엄마, 아빠 보러 갈게요.”
“힘들게 뭐 하러 내려와. 김 서방 밥이나 챙기지.”
“알았어요.”
만류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는 비밀리에 차표를 예약한다. 직장은 금요일 오전만 나갔다가 조퇴하고 내려갈 작정이다. 출근길 발걸음은 고향을 향한 마음처럼 가볍고, 한겨울 칼바람마저 상쾌한 아침이다. 3시간 근무를 마치고 서둘러 터미널로 향한다.
출발 시간까지는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터미널 모퉁이의 현금인출기에서 용돈부터 찾는다. 부모님에게 드릴 간식을 찾아 매장을 두리번거린다. 해외 파견 근로자였던 아버지는 빵을 좋아한다. 아니 아버지가 고기 외에 무얼 좋아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우선 베이커리에 들어가 빵부터 주섬주섬 담는다.
고속버스는 일반버스와 우등 그리고 프리미엄으로 나뉜다. 일반 버스는 45좌석이고 프리미엄은 21석으로 우등보다 7석이 적다. 감염병의 우려로 인해 인원이 적게 타는 프리미엄 버스를 이용하는데 편리하고 만족스럽다. 의자를 가능한 만큼 뒤로 젖히면 다리까지 쭉 뻗을 수 있다. 한 좌석당 차지하는 평수가 넓어 키 작은 내게는 아주 맞춤형이다.
‘작은 키가 좋을 때도 있구나.’
마스크를 쓴 채 롱패딩을 벗어 이불처럼 덮고 눕는다. 차창 밖으로는 아직 메마른 겨울 풍경이다. 비슷한 건물과 닮은 사람들이 스크린처럼 펼쳐져 스친다. 이내 고속도로로 접어들고 스르르 눈이 감긴다.
한참을 달려 15분을 쉬라는 안내 방송을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비몽사몽 제집 안방인 마냥 잠에 빠져 있다. 꼼꼼한 기사님은 개인 커튼을 치고 은밀하게 잠을 자는 손님의 머릿수까지 확인하고서야 다시 출발한다.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가 막힘이 없다. 급한 마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바람을 가르며 숨가쁘게 달린 버스가 의외로 빨리 도착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기고 서둘러 짐을 챙겨 내린다.
허기져 홀쭉해진 배가 먹거리에만 눈길을 주라며 연거푸 신호를 보낸다. 아버지께 드릴 호두과자며 김밥을 주문한다. 최종 목적지까지는 한 번 더 갈아타야 한다. 행선지 노선을 살피는데 때마침 들어오는 버스가 반갑다. 승객을 거의 토해 낸 버스는 구불구불 시골길을 가뿐하게 달린다. 이처럼 마음만 먹으면 금방인데 그간 고향이 멀다는 핑계가 무색하다.
점심을 거른 탓인지 멀미가 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울렁거림에 살짝 당황스럽다.
‘호두과자라도 하나 입에 물고 올걸’
이윽고 정겨운 마을 어귀 팽나무가 보인다. 종종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는데 친정집 강아지 ‘똘만이’가 짖는다. 역시 부모님만 계시는 시골에서 반려동물이 필요한 이유다. 이렇게나 멀리 떨어졌는데도 낌새를 알아보고 짖다니 놀랍다.
고향 들녘은 쓸쓸하고 황량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지만 이마저도 포근하고 따사롭다. 반가움에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며 귀향의 기쁨을 누린다. 차도와 인도가 따로 구분이 없는 도로다. 쌩쌩 달리던 차가 사람을 발견하고는 속도를 늦추더니 한참을 비켜서 운전한다. 장애물을 지나치자마자 곡예를 하듯 멀어진다.
그런데 이번엔 느낌이 이상하다.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옆에 바짝 다가와 멈춘다. 고개를 돌리니 창문을 스르르 내리고는 빤히 바라다보는 운전자가 보인다. 지프차를 모는 꽤 어려 보이는 스포티한 남자다. 수 초간 서로를 뚫어질 듯 쳐다보며 탐색한다. 운전자를 향해 잔뜩 의구심을 품은 눈빛으로 묻는다.
‘누구세요? 혹시 저 아세요?’
경계심에도 행여 아는 사람인가 하고 질세라 상대를 들여다본다. 당혹스러운 듯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연다.
“어디까지 가세요? 혹시 시내에 나가시는 길이면 태워다 드릴까요?”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
호의를 거절당한 운전자가 소음과 먼지를 일으키며 황망히 멀어진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건에 머릿속이 멍해진다.
‘이런, 이건 무슨 상황이 거냐?’
‘이런 게 시골 인심인 건가?’
곱씹으니 운전자도 행인도 역시 뻘쭘한 상황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는 남자다. 천방지축 홀로 즐거운 나그네애 대한 호기심이었나 보다. 차량이 빨리 사라져서 다행이지 싶다. 순간 튀어나올 뻔했다.
‘아가씨가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집에는 똘만이가 가장 먼저 반긴다. 오랜만에 와도 가족을 알아보는 기억력이 신기하고 기특하다. 이름을 부르니 촉촉한 눈망울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귀엽다.
“아빠, 둘째 왔어요.”
“얼라, 어떻게 왔대?”
딸의 깜짝 방문에 화들짝 놀라는 부모님이다. 장시간 여정의 피로가 사라진다.
고향은 참 좋다.
아빠의 환한 미소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