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옛날 옛적에...
기나긴 겨울밤 저녁을 일찍 먹으니 밤이 더욱 길다. 출출하던 차에 어머니가 동짓날 쑤어 토방 한쪽에 내어 둔 팥죽을 덜어왔다. 짙은 고동색의 큰 항아리에서는 살얼음이 살짝 낀 동치미 국물을 휘휘 저어 국대접에 담았다.
산후조리를 못 해서 몸 안으로 시린 바람이 들어온다는 어머니다. 한기가 온몸을 구석구석 옮겨 다닌다고 하소연하는 어머니는 유독 땔감에 집착한다. 한겨울이면 아버지와 번갈아 종일 군불을 지피며 안방을 데운다. 아궁이가 미어질세라 깊숙이 장작을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뜨겁게 달궈진 구들장 위 누런 장판은 색이 짙어지더니 급기야 군데군데 검게 그을렸다.
절절 끓는 아랫목 아버지 주위로 딸들이 모였다. 엉덩이는 뜨거운데 차가운 팥죽을 입에 넣으니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다. 오른쪽 왼쪽 엉덩이를 한쪽씩 들썩이다가 이불을 펴고 그 위로 올라앉았다.
어머니는 어느 틈엔지 고구마 퉁가리에서 생고구마를 꺼내더니 금세 삶았다. 미진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고는 동치미 무까지 입안 가득 크게 깨물었다. 마치 목욕탕에서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넘나드는 기분이다. 마침맞게 익은 동치미의 새콤함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우적우적 씹다가 아버지를 올려다본다.
“아빠, 옛날이야기 해 줘.”
“또?”
“응”
“며느리 방귀 해줄까? 아니면 사위 감나무 올라간 이야기?”
“둘 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얼굴이 박꽃처럼 환한 며느리가 시집을 왔어. 그런데 웬일인지 며느리의 예쁘던 얼굴은 점점 누렇게 변해 가서..’
아버지의 이야기는 자꾸만 살이 붙고 달라진다.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고 새롭다.
“아빠 또 또 해 줘.”
“옛날 옛적에 감나무가 많은 집으로 장가를 간 남자가 있었대. 첫날밤에 장인이 홍시를 한가득 그릇에 담아내어 주었어. 그걸 다 먹고 이제 자려고 하는데, 워낙에 감을 좋아하는 사위라 또 홍시 생각이 났지 뭐야? 그래서 감나무 위에 올라가서 홍시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장인이 뒷간에 가다가 나무 위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지. 장인은 도둑놈이 온 줄 알고 긴 장대로 푹 찔렀는데, 사위의 똥구멍을 찌르는 바람에 깜짝 놀란 사위가 똥을 싸버렸어. 나무 아래에 있던 장인은 똥벼락을 맞으면서 ‘이크, 감이 쉬어 터졌구나...’하고...”
“에이 아빠, 저번에는 홀딱 꾀를 벗고 올라갔다고 했잖아”
“맞아. 사위한테 감 따준다고 따다가 하필 잘못 잡아당겨서 똥을 쌌다면서.”
낄낄거리는 딸들에게 둘러싸여 신난 아버지가 이번에는 즉흥적으로 노래를 지어내 부른다.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우스운 노랫말마다 아이들이 깔깔대며 배꼽을 움켜쥐고 자지러진다.
“미진아, 불 꺼라.”
“난, 아빠 옆에서 자야지.”
“아냐, 내가 아빠 옆에서 잘 거야.”
“싫어, 내가 내가.”
아버지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던 딸아이들은 각각 아버지의 양팔을 베개 삼아 누웠다. 자리싸움에서 밀린 동생도 아버지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 보니 어머니는 방구석 멀찍이 어린 동생이 차지했다. 웅크리고 누운 어머니의 등 뒤로 하루의 고단함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