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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속 이야기들

삶과 얼음 사이

by captain가얏고


꺼내지 않은 오래된 음식보다 꺼내지 못하는 묵은 감정이 더 많다. 건드리기 부담스러워 냉동고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은 재료다. 시간이 멈춘 듯 본래의 모습은 얼음 속에 꽁꽁 갇혔다. 묵묵히 차별 없이 받아들여 싸매고 붙들어준 우리 집 냉동고는 이제 포화상태다.


산지에서 자유방목하여 키운 닭이 낳은 유정란을 주문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닭이 낳은 달걀이란다. 귀하고 비싼 달걀을 받아 조심스레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 보아서인지 한층 건강해 보인다. 어쩜 이리 윤기가 나고 껍질이 단단한지 난각번호 끝자리가 당당히도 ‘1’ 번이다.


포장지에는 배고픔과 갈증 영양불량으로부터의 자유, 불안과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정상적 행동을 표현할 자유, 통증 · 상해 ·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불편함으로부터의 자유라 썼다. 그 중앙에는 ‘자연을 품은 자유 방목 동물복지’라는 글자 사이에 ‘인증’이라는 글씨를 작게 넣었다.


동물과 직접 소통하며 판명한 것도 아닐 텐데 5대 자유를 누리는 닭이 낳은 달걀이라고 당당히 적은 것인가? 작게 ‘인증’이라고 삽입한 글자는 일말의 양심인가? 인간의 의구심을 해소해 주기 위한 노력일 터인데 오히려 의심이 든다.


혹자는, 이는 다 눈속임이며 상술이라고, 일반 달걀과 다를 게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매번 비싼 난각번호 '1'번을 구입한다. 좋은 식자재를 선택하는 것도 고민거리인데, 더군다나 자연과 동떨어진 도심에서 먹거리에 대한 불안은 하나의 큰 스트레스다.


냉동고 얼음 틀 속 얼음은 언제나 규칙적이다. 각 잡고 열 맞춰 투명하게 얼려있다. 처음에 따라놓은 모습 그대로 정직한 결과를 낸다. 얼음 틀 모양을 따라 똑같이 굳어지는데, 인간은 아무리 말을 해줘도 본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나처럼, 같은 말도 다르게 받아들이는 게 보통의 인간이다. 나는 이처럼 자유분방한 상념의 조각들이 흐트러지는데, 얼음은 한결같은 모양새다.


병아리로 부화할 수 있는 유정란을 보니 삶으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든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일제히 ‘우린 귀여운 노란 병아리가 될 수 있어’라고 합창을 하고, 유통기한을 버틴 묵은 감정들이 이젠 정리를 하라고 아우성을 친다. 먹지도 그렇다고 미련 없이 버리지도 못할 음식이 냉장고 안에서 체한 느낌으로 오늘도 주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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