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작
그리고 우리는 다음 날, 부동산을 찾았다.
작업실을 얻기 위해 여러 부동산을 돌아다녔고, 아내가 임신 초기였기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친구와 일주일 동안 발품을 팔아,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작은 귤밭이 딸린 창고를 임대할 수 있었다.
계약하자마자 우리는 탑차에 실려 있던 공구들과 짐을 내리기 위해 그다음 날부터 창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곳은 한동안 방치된 창고였고, 귤밭도 재배를 하지 않았던 터라 손볼 곳이 많았다. 작업할 공간도 직접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각종 부자재들이 필요했다. 그런 것들까지 친구는 군말 없이 사다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밥값은 물론 차비와 기름값까지, 초기에는 친구가 거의 다 부담했던 것 같다.
창고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아내가 잠깐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덕 플리마켓 셀러를 모집하는 현수막을 보았다.
그 길로 전화를 걸어 참가 자격을 확인했고, 제품 심사를 위해 샘플을 가져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이건 기회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만들기만 하면 바로 팔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친구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고, 그는 진심으로 축하하며 응원해 주었다.
둘째를 가진 이후로 일이 술술 풀리는 듯해 우리는 아이를 ‘복덩이’라 불렀다.
아버지의 컨디션도 점점 좋아지셨고, 아버지 역시 “둘째가 복덩인가 보다. 잘될 거다, 힘내라”며 나를 격려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둘째 소식을 들은 뒤 아버지도 더 많이 노력하신 것 같다.
입버릇처럼 “둘째 안아보고는 가야지” 하셨던 말이 자주 떠오른다.
공구며 짐 정리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우선 샘플부터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리가 덜 된 열악한 공간에서 이것저것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아는 거라곤 목수셨던 외삼촌 어깨너머로 배운 몇 가지가 전부였고,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다.
하지만 ‘잘 만들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머릿속에 그렸던 것들을 손으로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몇 가지 샘플을 완성한 뒤, 초조한 마음으로 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며칠 후, 플리마켓 주최 측인 리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사실 자격 요건 중 하나였던 '2년 이상 거주' 조건은 충족되지 않았지만, 제품이 너무 좋아서 예외적으로 선정되었다는 말이었다.
너무 행복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코로나 때문에 다른 플리마켓들이 전부 취소된 상태였고, 함덕 해수욕장 바로 앞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는 60개 팀 이상이 지원했으며, 그중 12개 팀만 선정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연속된 행운에 너무 기뻤다.
문제는 초기 비용이었다. 참가비, 보증금, 부스 대여비까지 만만치 않았지만, 그 역시 친구가 선뜻 내주었다.
정말 무언가에 씌운 듯,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플리마켓이 열리는 날까지 나는 제품을 만들었다.
공구를 많이 챙겨오긴 했지만, 초보였던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았고, 모든 걸 손수 만들기엔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다.
그래도 매일 새벽 5시에 나가 밤 10시, 11시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무 행복했다.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플리마켓 당일, 친구는 내가 만든 것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팔리겠지? 이게 팔릴까?”
그리고 그날 오후, 플리마켓이 시작되었다.
그날, 그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