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 네가 글을 쓴다고? 우리 식구들은 글 솜씨가 없어.”
“글쓰기는 자기만족에 불과하지요. 책을 낸다고요?”
“많이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지요. 제대로 배워서 잘 써야 합니다.”
누나. 지인, 현역 중견작가의, 글을 쓰고 책을 내고자 하는, 나에 대한 한 줄 평가다.
약 2년 전부터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부지런히 갈고닦아서 꾸준히 여러 권의 책을 내는 어엿한 작가가 되고 싶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다. 이에 대한 주위의 반응은 예상외로 아주 싸늘했다. 격려나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은 거의 만날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치니 글쓰기란 것이 이제 필생의 과업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가 없다. 주위의 누가 칭찬에 인색하거나 혹평을 하더라도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이 미션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나의 글쓰기 작업의 뿌리는 제법 그 역사가 깊다. 초등 4학년 시절 1주일에 한 시간씩 배정된 정규수업 과정인 ‘특별활동반’ 중 글짓기부에 지원했다. 교과서 이외 동화나 소설 동시집을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3백 번지 보금자리에서 300미터 내외의 가까운 거리에 학교가 자리했다. 그러다 보니 면소재지 부락에 사는 친구들은 도시락 대신 점심식사를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해결했다.
초여름엔 된장찌개에 텃밭에서 솎아낸 성인 남자 손바닥의 1/4 크기의 상추를 요리용 가위가 아닌 양손의 엄지와 검지의 힘을 빌어 직접 찢어 넣고 등겨장으로 썩썩 비빈 ‘된장찌개 비빔밥’이 우리 집 단골 점심메뉴였다. 꿀맛 같은 점심식사를 마친 후 10원어치 200자 원고지 몇 장을 ‘초째좀빵’에 들러 손에 쥐고 글짓기반 교실로 내달렸다. 글짓기 활동 시간엔 기껏해야 동시를 적어내는 수준에 그쳤다. 이후 5, 6학년엔 주산반으로 갈아탔다.
하지만 미시시피강의 최초 발원지도 한낱 보잘것없는 아주 초라한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숙제로 ‘만화책 10권 읽기’가 나의 독서 생활의 시발점이 되었다. 글쓰기의 발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생 시절 3대 참고서 브랜드라면 ‘완전정복’ ‘필승 시리즈’ ‘스터디북’을 꼽았다. 무료한 여름 어느 날 오후 나는 국어 참고서인 스터디북의 ‘수
목송’ 이란 단원을 펼쳤다. 이 단원의 낱말풀이, 문단 나누기 등을 주마간산으로 훑어보았다. 그 후 이에 딸린 문제를 일별 하였다. 정답을 골라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놀랍게도 오답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것이 내가 국어공부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초등시절은 나의 글 읽기 거의 대부분을 만화책 탐독에 쏟아부은 ‘만화책 읽기 전성시대’였다. 이웃집 선배네는 약 500권이란 어마어마한 만화 장서의 보유자였다. 때론 명시적인 승낙을 받아 빌어 읽었고 아니면 장서 주인장의 눈을 피해 만화책을 손에 넣어 탐독 후 감쪽같이 제자리로 돌려놓기도 했다.
여름 겨울 방학 기간엔 우리 가족의 추억의 창고 집 단칸방엔 수십 권의 만화책이 항상 널려 있었다. 어른들은 만화책을 늘 끼고 사는 자신의 자녀들을 결코 응원, 장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시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만화책만 들여다본다’는 꾸중 일색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나의 태반이 묻힌 300번지에서 가장 까까운 도시는 대전이다. 나는 본적지를 떠나 대전으로 고등학교 유학을 떠났다. 2학년이 되면서 나는 당연히 인문반에 지원했다. 수학, 과학보다는 국어, 영어에 더 많은 소질과 재능이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크게 보아 국어 과목 카테고리에는 현대문, 고문, 한문, 문법, 작문이 들어 있었다. 이 중 현대문은 매월 평가를 했다. 이와 달리 고문 등 기타 과목은 2개월마다 혹은 한 학기에 한 번 정도밖에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단판 승부가 되었다. 학기말과 학년말엔 이 4 내지 5과목을 한꺼번에 시험을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국어라는 큰 틀 안의 배점이 무려 400 내지 500점으로 그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나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1년에 두 번이나 주어졌다. 물 만난 고기가 되었다. 나는 이른바 ’ 통합 챔피언‘에 매번 등극했다. 이 국어라는 카테고리만을 떼어내 평가하면 나는 단연 전교 수석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한시를 몽땅 암송했다. 4자 성어를 익히는 재미에 푹 빠졌다. 속담, 격언 등도 나의 흥미를 끄는 분야였다. 국어과목에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글짓기 과제는 주로 수필(산문)을 제출하여 임무를 완수했다. 고교 2년에 불과했지만 감히 소설을 쓰겠다는 같은 반 친구에게 한없이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나의 대학 학부와 대학원 전공은 법학이다.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두고선 국문과를 지원할까 하는 망설임과 고민도 있었다. 당시엔 문예창작과가 정식으로 개설된 4년제 정규대학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국문과를 '굶는 과’ 라 빗대어 말하는 것이 결코 낯설지 않은 시절이었다. 민생고 해결이 우선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국문과 진학이라는 담대하고 가슴 설레는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금융기관 이란 직장생활의 정년 마감을 2년여 앞두게 되었다. 최근 내가 혼자 귀촌하여 자격시험 공부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본가 건물과 관련된 분쟁도 있었다. 거의 맹지에 가까운 곳에 1층 양옥 슬래브집이 자리하다 보니 이웃집과 ‘주위 토지 통행권’이란 송사를 치렀다. 일부 승소를 하여 일정한 범위의 통행로를 합법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를 비롯하여 집안 관련 크고 작은 분쟁에 따른 소송과 유사한 분쟁 해결방법의 실행은 모두 내 몫이 되었다. 국문학이 아닌 법학이 전공이 되다 보니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런 분쟁해결의 과정이나 진척사항을 형제에게 유선으로 알리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시간적 여유 등의 대가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이유로 모바일 시대의 막강한 도구인 스마트폰을 최대한 활용했다. 단체 카톡방에 용건을 올리기도 했다. 여러 형제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연결하는 수고를 훨씬 덜 수 있었다. 분량이 늘어날 경우엔 ‘메모 앱’에 초고를 적고 교정을 여러 번 거친 후 단톡방으로 토스했다.
전문직업인인 변호사나 법무사에게 사건을 맡기더라도 사실관계나 쟁점 등은 결국 내가 그 밑그림을 그려주어야 하는 엄청난 수고가 따랐다. 지금까지 만화책 학교 교재 소설책 시집 등 읽기 위주의 생활에서 ‘글씨 쓰기’가 아닌 ‘글쓰기’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입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회사의 자치법규인 사규에 정해진 ‘정년’ 도래 이전에 일찍이 나를 집으로 보내려는 유 무형의 회사 측의 책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나는 결연히 맞섰고 당당하게 행동으로 돌려주었다. 정년을 정확히 1년 앞둔 시점엔 세기적인 또라이 캐릭터를 자랑하는 점포장을 선임하여 이 회사의 못 되어 먹은 프로젝트는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이에 이 몹쓸 행동 짓거리들을 기록으로 남겨 장차 혹시 모를 분쟁해결 수단인 진정이나 소송에 활용코자 했다.
글쓰기 작업의 첫발을 내딛자 어느새 ‘세상천지 삐깔이’ 글쓰기 소재가 되었다. 길거리를 걷다 발에 걸리는 것을 모두 글로 옮길 자신이 생겼다. 내 스마트폰과 노트북엔 이미 단행본 5권 분량의 글들이 빼곡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지금 어쩌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일상을 이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중견 출판 사장을 만나 조언을 받기도 했다. 국내 저명한 아동문학가의 글쓰기 첨삭 지도도 1년 이상 받았다. 최근엔 작가 발굴이나 출간에 도움을 주는 플랫폼인 ‘브런치 작가’에 당당히 이름도 올렸다. 앞으로 당장 쓰고자 하는 글 꼭지만도 무려 500편을 넘어섰다.
“야 너 기억력 하나는 대단하다. 50여 년 전의 소소한 일까지 그렇게 생생하게 불러내는 것을 보니 말이야.”
“그건 칭찬이 아니지요. 글을 잘 쓴다고 하거나 아니면 재미있고 감동을 받았다는 말이 나에게 도움이 되거든.”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말을 꺼내면 모든 상대는 빈정거림을 섞은 웃음부터 지어낸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최근 내가 자체 제작한 (이른바) 작가라는 문구가 적힌 명함을 건넬 때는 더욱 그러하다.
“네가 무슨 글을 쓴다고? 겨우 생활 글쓰기에 머물 것이 뻔해 보이는데..., 등단을 한다고? 유명 작가가 된다고? 그 건 먼 딴 나라의 이야기야”라고 비웃는 사람이 널려 있다.
“선생님의 글은 한 번은 읽어 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식으로 말하자면 맛이 있어 다시 찾는 맛집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더구나 저에게 건넨 그 작품은 ‘시‘라고 이름 붙이기도 힘들지요.”
한 다리 건너 소개받은 현역 작가의 혹평도 감내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재판정을 나서며 자신의 소신인 지동설을 주장한 유명 과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이제 별로 시대에 맞지 않는 빛바랜 이야기가 되는 것이 옳아 보인다. 우리나라는 경제 규모로 볼 때 어떤 여러 가지 지표를 들이대도 이미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촌이 전매 차익을 남기려 기존에 보유 중인 땅을 팔아도 배가 아프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주위에 많이 남아 있는 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도약은 요원해 보인다.
‘사촌 땅 매매 반응 ’에 관한 지표로만 따지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아프리카 오지에 자리한 후진국 수준에도 한참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지구는 그래도 돈다’라 외치던 과학자처럼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글쓰기 전용 대학노트에 동아 미피 0.5미리 펜으로 빈 줄을 빼곡히 메운다. 초고 작업을 벌써 마쳤다. 독서대 위에 장착한 초고를 살피며 밤을 지새워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들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