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자 미팅, 봉숭아 학당
파워게임과 역학관계
대전 충남지역에 근무 중인 직원은 A 고와 B 고 출신의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로 요약이 되었다. 공기업, 공공기관, 중견ㆍ중소기업 등 CEO와 임원 등 고위직은 A 고 출신, 그 아래 실무진의 중간 간부 등은 B 고 출신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고교 평준화 이전에 각자 학교를 지원하여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고 학교를 마친 직원들을 기준으로 볼 때 그랬다.
회사의 지점 내 인력 분포도 마찬가지로 양대 산맥으로 볼 수 있었다. 대학 동문이라도 대학이 아닌 고교 기준으로 인맥 내지 계파(파벌)가 형성되었다. 거래법인 담당자도 A 고와 B 고 출신으로 나뉘었다.
종래 시내 중심지였던 대전지점 인근은 변두리화가 가속화되었다. 신도시의 개발과 각종 관공서의 이전으로 그 중심지는 둔산지점 일대가 되었다. 대전지점으로 신규 고객(자금)의 유입은 현격하게 감소되었다. 고액 자산가들은 둔산지역으로 이전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정석대로 지점 간 고객 (계좌) 이관 제도를 이용하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전출점은 실적을 보정 받을 수 있었다.
전입점은 그에 따른 불이익이 제한적임에도 대전지점 계좌를 인출하여 둔산지점 계좌로 입금하거나 아예 새로이 둔산지점 계좌를 개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별한 영업활동이란 노력 없이 실적을 올리는 불합리한 결과가 일어났다. 이는 두 개 점포 간의 무시 못 할 수준의 갈등 요인이 되었다. 두 점포 간 지점장은 물론 책임자 사이가 결코 우호적일 수 없었다.
대덕연구단지란 곳은 법인 수가 많고 거래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책임자 한 명의 전담 직원을 두었다. 때론 두 지점 간 중복거래가 이루어졌다. 대전과 둔산지점에 각각 근무 중인 B 고 출신학교 동기가 같은 법인을 공교롭게도 중복 관리를 하였다. 당해 법인의 역시 B 고 출신 동기 자금 운용 책임자는 이런 미묘한 관계를 알고선 “그거 재미있구먼, 양쪽에 각각 자금 30억씩을 주어볼까, 어떻게 돌아가는지?”라고 농담을 던졌다.
대전지점장이 A 고 출신이란 걸 이미 알고 있어 이 또한 양대 산맥의 긴장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같은 B 고 동문끼리 이해관계로 다투던 중 A 고 출신을 상대해야 할 경우엔 전자 두 직원은 금세 연합군이 되었다. 이는 매주 한 번씩 열리는 지점 주간 책임자 미팅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최근 둔산지점에서 대전지점으로 자리를 옮긴 지점장은 “평소 난 우리 지점의 부진한 실적보다는 책임자 간 단합이 되지 않아 걱정이고 반목ㆍ갈등 관계 때문에 더욱 골치가 아프다.”라며 종종 하소연했다. 주간 책임자 미팅엔 지점장을 비롯하여 책임자 도합 10명이 정규 참석자였다. 말단 4급 책임자는 등받이가 없는 보조 의자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나마 4급 책임자 서열 3위에 랭크되어 보조 의자 신세는 간신히 면했다.
주간 정기 책임자 미팅이란 게 지난주 영업활동을 반추하고 금주 계획, 고액 거래자 동향 그 밖의 특이사항 등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책임자별로 간단하게 발표한다고는 하지만 참석자 수가 적지 않다 보니 말단 4급 책임자까지 차례가 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밖의 현안을 토론하는 기회도 가끔 있었다. 이 시간이 봉숭아 학당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하이라이트였다.
이제 3급 이상 부장이 순번대로 발표를 마쳤다. 다음 최 부장은 타 책임자의 의견에 코멘트를 하고 본인이 요약 내지 총평을 하면서 나름 결론을 냈다. 말 그대로 폼 나는 역할을 독점했다. 이를 장시간 동안 참고 기다리던 월남 스키부대 간부 출신 온 부장은 최 부장의 이러한 행태에 관해 절대로 우호적인 발언이 나올 리가 없었다. 최 부장에게 즉각 맹공에 나섰다. “그것은 아니다. 그건 틀렸어, 잘못이야. 최 부장, 그거 네가 그런 것 아니야.” 등 연속해서 퍼부어댔다. 때론 직함조차 생략한 채 이름만 불러댔다.
“에이 참! 내가 무얼 어떻게 했다고 그러세요?”라며 군소리에 가까운 변명을 해보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A 고 출신 최 부장에게 B 고 출신 이 부장도 이때를 놓칠세라 비우호적이고 공격적인 언사를 쏟아내며 가세했다. 회의장은 말 그대로 봉숭아학당을 방불케 했다. 주위로부터 협공을 받은 최 부장은 이윽고 잦아들었다.
지점장은 온 부장의 언동 등에 반대 의견이나 코멘트를 전혀 하지 않았고 만류할 생각은 더욱 없어 보였다. 고령ㆍ선임 입사 선배에 대한 나름의 배려로 보였다.
당시엔 사무실의 영업장 객장은 물론 상담실 등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금연금지구역”이라고 할 만큼 담배를 피우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온 부장은 마도로스 전용 파이프를 애용했다. 스키부대 출신답게 담배를 피우는 것도 이미 명품 연기 수준을 넘어섰다.
4급 책임자들은 이 소용돌이에 끼어들 수 있는 짬밥에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관객일 따름이었다. 어렵게 표정 관리만 했고 어서 진정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직 무표정, 엄정중립을 지켜야지 어느 일방의 편을 들거나 감히 개인 의견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연한 기회에 지점장실 밖에서 이러한 회의 광경을 지켜본 선임 박 계장은 4급 책임자인 나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폈다. 책임자란 게 그렇게 녹록한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단다. 세상엔 공짜 점심이란 것은 도대체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