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리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때 연간 기준 법인세 납부 실적이 5위안에 랭크된 어마어마하던 시절도 있었다. 기록적인 호황을 구가하던 전성기로 보아도 무방했다.
기업금융부문이 거의 없고 대부분 가계금융에 집중하던 ●●은행, 철강 보국의 기치를 내건 ●●제철, 보험분야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생명 등 국내 굴지의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자본금이 250억밖에 되지 않아 결코 재벌이 아닌 회사이다 보니 더욱 놀랄 일이었다. 근무조건 전분야에 걸쳐 업계 최상급에 랭크는 어려웠다. 강대리가 입사 시절 기준으로 대졸 예정자들이 제법 선호하는 곳이었다.
복리후생의 한 꼭지로 매분 기마다 부서별, 때론 몇 개 부서가 연합하여 체육대회를 열었다. 실제로 축구나 400미터 계주 등을 꼭 해야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산행이나 간단한 간담회 등으로 갈음해도 무방했다. 물론 1인당 정해진 예산을 배정받았다.
금번 지점 체육대회는 10월 초순 주말을 잡아 점포와 인접한 도시에 소재한 계양산으로 산행을 하기로 했다. 직원들 모두는 업무에 지친 심신을 달래고 힐링을 기대하며 일요일 아침 늦은 시각에 목적지의 입구에 집결을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10월 첫 주말인데 이번 달 초부터 "산불조심 강조기간"등을 이유로 일정한 기간 입산을 통제한다는 안내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행사의 실무책임자인 강대리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제일 먼저 옥 점장의 눈치를 살피는 건 당연했다.
“강대리, 이게 무슨 일이지? 도대체 일을 어떻게 추진하고 있는 거야?”
현장에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질책이 떨어졌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마땅히 각오를 했다. 다른 대체 후보지를 이미 정한 것으로 보이는 옥 점장은 휘하 인력을 이끌고 행주산성 인근의 둘레길로 발길을 돌렸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 지점 식구들이 고생하여 목적지에 도착, 둘레길 트레킹을 마친 후 점심 회식 자리를 잡았다. 강대리 휘하엔 서무 남녀 사원이 각각 1명씩 업무분장이 되어 있었다. 서무 여직원은 어린아이를 안고 남편과 동행했다. 본인은 오늘 집안 행사가 있어서 얼굴만 보이고 귀가하겠다고 했다. 계양산 입구에서 옥 점장은 평소와 달리 쿨하게 이를 허락했다. 여직원은 작은 소원을 이뤘다. 하지만 강대리에겐 이 또한 두 번째 낭패였다.
행사 처음부터 종료 시까지 소소한 잔 심부름은 당연히 서무팀 몫이었다. 이럼에도 게다가 서무 남직원은 자신은 타업무가 '주'가 되고 서무는 '종'이라며 마치 강대리의 상전처럼 식탁 앞에 편히 자리를 잡았다. 다른 직원들을 위해 서빙을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오히려 서빙을 받을 기세였다. 세 번째 꼭지의 황당한 상황이었다. 그저 강대리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뒤치다꺼리를 모두 덤터기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이었고 트리플 크라운을 짧은 시간 안에 쉽게 달성했다.
강대리는 점장으로부터 갖가지 크고 작은 질책을 받았다. 아래 직속 부하직원에게도 동시에 배신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강대리는 본래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지만 이런 상황이니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상급 책임자는 물론 동일 직급 다른 동료의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이러다 보니 강대리는 점심식사도 편히 마치지 못했다. 내일 이후의 지점 생활이 더 큰 걱정이 되었다. 옥 점장으로부터 닥칠 후환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충전이나 힐링은커녕 스트레스만 잔뜩 껴안고 귀가를 했다. 주말 이후 첫 근무일인 월요일 아침 사무실로 향한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라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주간 책임자 미팅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각 팀별로 전주 시행 사항과 금주 계획을 간략하게 발표를 마쳤다. 드디어 점장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점장은 강대리 관련 일 이외엔 아예 안중에 없었다. 본부부서 근무 시부터 빅 사이즈의 폼나는 탁상 일지를 사용하는 강대리와 달랐다. 점장은 본인의 탁상 일지를 부임 후 가까운 문구점에서 장만했다. 그 사이즈는 강대리 소장품의 반 정도에 그쳤다. 이 작은 사이즈의 탁상 일지의 오늘자 메모 공간엔 10개 내외의 꼭지를 이미 빼곡하게 적어놓은 게 쉽게 눈에 들어왔다. 해당 면엔 추가로 메모할 여유 공간은 없었다. 미팅 이전에 벼르고 별러 이미 작정을 하고 나선 것이 분명했다.
‘어이 강대리, 이게 말이야’로 드디어 포문을 열었다. 지난 주말 체육대회 해프닝 건은 물론 그동안 미진하거나 점장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목록을 모두 추려 놓은 듯했다. 거칠게 풀자면 강대리를 깨기 위한 항목을 총동원한 것으로 보였다. 강대리로선 별 뾰족한 선택지가 없었다. 점장은 미팅 시간의 대부분을 강대리를 나무라고 호통치고 깨는데 할애했다.
옥 점장의 강대리에 대한 지적, 질책, 훈계가 일단락되는 데는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이 필요했다. 본래 천성이나 캐릭터가 강대리는 누구에게 대한 100% 예스맨은 절대 아니었다. 잦은 정기ㆍ비정기 미팅 시간마다 강대리는, ‘적자생존’이라는 걸 이미 거의 20년이나 앞당겨 예견하는 혜안이 있었다. 점장 본인의 수많은 지시ㆍ지적사항을 거의 빠뜨리지 않고 잘 받아 적었다. 그럼에도 나중을 보면 실제 제대로 이행한 실적은 아주 형편없다고 옥 점장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강대리를 질책했다.
점장이 오늘 언급한 10개 내외 꼭지마다 강대리는 ‘이것은 이래서, 저것은 저래서’라고 상황설명을 했다. 물론 점장이 보기엔 항명에 가까웠다. 점장의 주장에 대한 강대리로선 나름 합당한 논거를 들어 맞섰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강대리의 이러한 대응에 회의장은 갑자기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향후론 시정하겠습니다, 다음엔 더 치밀하게 준비하여 지난 주말 같은 시행착오는 없도록 하겠습니다’를 이어가도 점장의 노여움이 누그러지길 기대하기엔 부족했다. 그런데 감히 이런 초급 책임자 주제에 "게기는" 풍경이 연출되어 파란이 일었다. 강대리의 강경한 대응에 점장은 몹시 당황했다.
강대리의 예상과 달리 점장은 재반박을 하거나 더 이상의 질책을 어어가지 않았다. 지금 같은 직장이나 세상의 분위기에 비추면 당장 내일의 출근 가능 여부를 걱정해야 했다. 강대리가 스스로 돌아보아도 좀 오버한 게 아닌가 생각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니 스트레스의 총량은 좀 줄었다.
길고도 긴박했던 주간 회의를 마치고 점장실을 나서는 강대리의 직속 상급자 한차장은 향후론 점장 말에 반박하지 말고 그저 듣고 있으라는 고언을 잊지 않았다. 오늘 같은 일이 쌓여 혹시 ‘화’나 ‘불이익’이 돌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강대리가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직장 생활을 여기까지 이어오는데 강 부장은 여러 가지 죽을 고비 등 크고 작은 많은 허들을 넘었다. ‘옥이사 치하에서도 견디었는데 이 정도쯤이야’하는 자신감의 원천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이를 하사한 옥이사에게 강 부장은 오늘도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