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박 8일간의 칩거 여행

by 그루터기


“양성입니다. 신속검사 결과가 PCR 검사에서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이제 코로나19 확진자가 되었다. 작년 1월 20일 이후 약 2년이나 코로나19를 나름 잘 피해 다녔지만 이제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드디어 확진자 번호가 부여되었다. 주민번호, 학번, 군번에 더하여 나를 식별하는 고유번호를 하나 더 거저 얻었다.


올해 8월 하순 나는 혼자서 고향으로 귀촌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말년에 해로한 본가 단층 슬라브 양옥 건물에 새로이 둥지를 틀었다. 그동안 웬만한 장기 여행은 자제했다. 수도권에서 경조사나 종합 건강검진. 병원 진료와 검사 결과 확인 등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이곳을 벗어나지 않고 고수하기로 작정했다.


최근엔 과거 직장동료와 2박 3일 강원도 여행, 병원 검진 결과 확인, 대학 동기 저녁 모임 등 일정을 한데 모았다. 이동하는 시간과 비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예정된 일정을 별 탈 없이 순조롭게 마무리하고 마지막 날 늦은 시각에 귀향을 했다. 현직에 있을 때 법인영업 활동처럼 타이트하고 힘든 일정을 무사히 소화해 냈다. 좀 무리한 일정이었으나 큰 애로나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조짐이 보였다. 귀향한 다음 날 새벽엔 약간의 오한 있었다. 게다가 목구멍이 조금 따끔 거렸다. 마른기침을 했고 약간의 가래도 보였다. 나는 평소 알러지성 비염이 있었다. 그래서 그 증세이거나 아니면 전형적인 목감기에다 몸살로 단정했다. 이마에 내 손바닥을 여러 번 가져다 대어 보았다. 이른바 자가진단이었다. 열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균형 잡힌 식사와 휴식을 취하며 하루 이틀이 지나면 잦아들 것으로 보았다. 3일째 날이 밝았다. 별 차도가 없었다. 이틀간의 칩거를 마치고 오늘은 어떻게든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혹시 코로나19에 감염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생겨났다. 그러나 우선 열이 없었기 때문에 감기 몸살 쪽에 무게를 더 두었다. 최근 정기 건강 검진 결과도 손에 넣었다. 옥천 읍내에서 개업 중인 고교 동기 내과 전문의를 찾아 나설까도 했다. 아니면 이 기회에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대전 소재 병원으로 내과와 비뇨기과 병원을 아예 옮겨 다닐 까도 했다.


일단 요즘 떨어진 식욕을 되돌리기 위해 읍내 단골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집을 나서기 전 고교 동기 내과 전문의에게 우선 자문을 구했다. 증상만으로 코로나 19 감염 여부를 판단은 어려운 일이다. 무증상 감염부터 다양한 증상이 있으니 우선 선별 진료소를 찾아 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유받았다. 결과가 음성으로 나올 경우 감기 증상이 중증이면 감기 치료를 받고 경증이면 종합감기약을 복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고교 절친 동기라 하지만 개업의는 매우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신 원장은 내가 평소 구하는 자문마다 친절하고 성의 있게 답변에 응했다. 이래서 이번에도 신 원장의 권유에 따르기로 했다. 옥천이나 대전으로 병원 행차를 할까도 했다. 그러나 결코 녹록한 상황이 아

닌 것 같았다. 기동력 있는 대처가 필요해 보였다. 식당 안주인에게 내과 병원 소개를 받았다. 병원 입구에 세워둔 체온계를 36.4도란 양호한 수치로 무사히 통과했다. 일단 발열이 없으니 코로나 19에 감염된 것은 아닐 거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이윽고 마주 앉은 원장에게 나는 발열이 없으니 감기약이나 어서 처방을 해달라고 보챘다.


“그동안 오한이 났을 텐데요...”

나의 양쪽 귀 입구에다 접촉식 체온계를 차례로 꽂았다.

“그 봐요 열이 있잖아요. 38도입니다. 즉시 선별 검사소로 달려가 검사를 받으세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약 2년이란 세월 동안 그 많은 음식점과 주점, 찻집, 심지어 병원을 아무런 이상이 없이 자유롭게 통과했던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거에 신뢰가 무너졌다. ‘비접촉성 체온계’는 결코 믿을 수 없다는 신 원장의 귀띔을 얼마 후 들을 수 있었다.


PCR 검사 결과는 내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증상이 가볍지 않았고 번복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보건소 직원은 즉각 ‘역학조사’에 돌입했다. 11월 19일부터 26일까지 만 일주일간의 나의 동선은 순식간에 낱낱이 까발려졌다. 3개의 신용카드 사용 내역의 추적은 기본이었다. 승용차의 동선도 살폈다. 2박 3일 강원도 여행 시 총무을 맡았던 동료의 신용카드 사용 내역은 동선 파악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소지한 신용카드와 내 얼굴을 즉석에서 촬영했다. 벌써 나는 흉악범의 반열에 올랐다. 코로나19 감염증과 무관한 예민한 개인정보까지 캐어 물었다. 배우자와 자녀의 거주지, 직업, 심지어 종교가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는 분명 과잉대처였다.


나 때문에 추가로 다른 사람에게 감염되는 것을 틀어막는 것이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였다. 그동안 내가 접촉한 사람, 방문한 장소 시각 등을 순수히 입 밖으로 내었다. 접촉자들의 연락처를 알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무섭고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되었다. 졸지에 슈퍼스타에 등극했다.


나의 기억력에다 보건소 직원의 정보 검색 능력이 상승 작용을 했다. 약 2시간 반 동안의 역학조사가 완료되었다. 밀접, 단순 접촉자로 나누어 그에 맞는 적절한 조치도 마쳤다. 전광석화 같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오래전 이스라엘 군대의 ‘엠테베 작전’이 연상되었다.


“저는 혼자서 귀촌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자가격리가 가능한데요.”

“고령이고 고혈압 등 기저질환이 있기 때문에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의 생각이나 판단은 아무 쓸모가 없었고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고위험군의 확진자로 낙인이 찍혔다. 그저 행정기관의 처분에 따라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자가격리 시 자신들이 떠안아야 되는 자잘한 일거리를 병원으로 넘기려는 숨은 의도도 보였다. 수도권과 달리 병상에 여유가 있어 어렵지 않게 입원이 확정되었다.


“이 시간 이후 다른 곳에 들르면 아주 큰일이 납니다. 자택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쉬시고 내일

구급차를 이용해 병원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추가 안내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확진자 신분인 나는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 이 시각 이후론 헌법이 보장한 신체나

거주 이전의 자유는 모두 박탈된 것이었다.

돌이켜 보니 2박 3일간 강원도 여행 중 한 동료는 여행 첫날밤 극심한 근육통을 호소했다.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밤새 끙끙 앓았다. 보건소 직원은 바로 이 친구를 이른바 ‘연결고리’이자 ‘진원지’로 지목했다.


확진자인 나로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강원도 여행 일행과 여행을 마친 다음날 모임을 가진 대학 동기 7명, 그리고 잠깐 얼굴을 마주했던 고향 절친 탁 사장에게 긴급히 알렸다. 내가 양성 판정을 받았으니 빠른 시간 내에 선별 검사를 받으라고 강력하게 호소했다. 나의 밀접 접촉자 11명 중 10명은 연락이 닿았다. 아예 증상이 없다거나 가벼운 감기 증세가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이후 검사의 실행 여부는 각자의 판단과 몫이었다.


시쳇말로 ‘뒷골이 땡기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갑자기 몰려왔다. 현직에 있을 때 많이 접한 ‘블랙컨슈머’가 머리에 떠올랐다. 민원을 일삼아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는 사례를 나는 많이 겪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라는 요지의 문구를 단체방에 올리고 문자로 전송도 하고 또는 직접 통화로 전하는 등 아주 기민하게 움직였다. 나의 단골 미장원장은 ‘괜찮습니다.’에서 ‘선생님, 아이 이 것 어떡하지요?’ 라며 반응하는 온도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결국 나중에 음성 판정을 받은 후에야 진정 모드로 잦아들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생존과 먹고사는 생업에 직접 관련된 문제였다. 그러니 평소 친근, 유대, 친밀도의 정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모든 이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고 비난이라는 집중포화를 맞았다. 그렇다고 이런 상대에게 서운함을 내보이거나 상대를 또 나무랄 일은 더욱 아니었다. 본인은 물론 가족이나 기타 이후의 접촉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보통인으로선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현직에 있을 때 블랙컨슈머에게 시달리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 때문에 양

성 판정을 받은 사람 중 일부는 자영업자의 일시 휴업에 따른 손해배상이나 다른 생업 종사자의 일실이익의 배상을 요구해올 기세였다. 내가 방역 준칙만 제대로 지켰다면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건소 직원은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런 경우엔 국가에서 따로 손실 보상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최근에 밥맛은 있느냐, 냄새는 잘 맡느냐’ 보건소 직원은 나에게 미각, 후각 상실 여부까지 물었다. 진도가 이미 많이 나갔는가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라디오 수사극으로 그 이름을 날렸던 ‘형사 반장’의 비장하고 긴박한 시그널 배경음악이 깔리는 듯했다. 구급차에서 내리자 이미 방호복으로 완전 무장한 간호사 2명이 대기 중이었다. 먼저 신분확인을 했다.


각종 매체에서 코로나19 관련 소식을 전할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생생한 영상을 연출했다. 이동용 침대 위에 드러누운 나를 간호사들은 비닐 셀루로이드 재질의 덮개로 틀어막았다. 사방 둘레를 지퍼로 채웠다. 전신마취 후 큰 수술을 받을 때 통과해야 하듯이 수많은 출입문의 문턱을 넘었다. 훈련 상황이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나는 앞으로 이곳에서 적어도 열흘 이상 머물러

야 한다고 했다. 이곳 병실에서 바이러스나 기타

유해 물질이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공조장치

를 가동하는 ‘음압병실’에 나는 꼼짝없이 감금

되었다.


이제부터 병실 밖으로 한발 짝도 떼지 못하게 되었다.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물도 직접 들여올 수 없었다. 택배를 통해 병원 총무팀으로 주문을 하면 병원 관계자가 해당 물품을 점검한 후 개인별로 배포해주는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깡통류나 칼 철사 등 뾰족한 물건 등은 아예 처음부터 반입이 절대 금지되었다. 환자의 부상을 방지하고 간호사 등 방호복에 구멍이 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했다. 음식물도 데워서 먹어야 하는 것은 아예 접근이 금지되었다.


결코 여유가 있지 않은 5인 병실 공간에서 신체의 자유가 극도로 제한 된 상태로 열흘 이상을 근신해야 한다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재정자립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도권 지차체가 마련한 생활치료센터와 달랐다. 국립 의료 시설이기 때문에 모든 공간이나 시설이 매우 열약했다. 얇은 고무 재질의 길게 늘어뜨린 커튼이 천정 바로 아래 달린 레일을 타고 이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결코 쾌적한 환경은 아니었다. 삼시 세끼 내가 식탁에 올리던 메뉴보다 반찬의 가지 수가 많고 원가도 높아 보였으나 음식 맛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에취, 캬아악, 퉤, 콜록콜록 쿨럭쿨럭, 캬아악 퉤”

5인 병실인 이 공간은 어느 사람 혼자만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곳이 결코 아니었다. 5명이 모두 서로 협조, 양보, 배려하는 공동 시설임이 분명했다. 나의 바로 좌측 병상의 75세 환자는 이런 사실을 아예 무시해버렸다. 고혈압 등 기저질환의 정도가 보통을 넘어섰다. 우선 대화의 톤이 매우 높았다. 주위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재차 질문을 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남도 출신임을 자랑하듯이 일부러 사투리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가래를 뱉거나 기침 재채기 등이 이어질 경우 화장실을 이용하면 주위 환자에게 불편이나 부담을 충분히 줄일 수 있음에도 그저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스마튼폰을 이용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유튜브를 시청했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 성향의 콘텐츠만을 골랐다. 이어폰을 사용할 경우엔 주위 사람에게 전혀 불편이나 부담이 없을 듯했다. 병실의 구석구석까지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볼륨으로 시청을 고집했다.


도저히 견디다 못한 나는 이어폰을 건넸다. 이를 이용하여 본인 혼자서만 청취를 하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이 될 듯했다. 그러나 무슨 사연인지 이도 거절을 했다. 유튜브 시청 중간중간에도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의견엔 쌍욕을 내뱉었다.


참는데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시쳇말로’ 뚜껑이 열릴 듯’했다. 나는 정면 돌파를 하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주지 않으면서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대로 잠을 이룰 수도 없고 낮 시간에도 평상심을 찾을 수 없다고 격하게 항의를 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음압병실에서 정신병동으로 옮겨가야 할 듯했다. 이윽고 사과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예의 없는 돌출 행동은 여기서 멈추었다. 혹시 뜻하지 않은 살벌한 보복조치가 잇따를까 보아 약간 걱정도 되었다.


이 환자는 간호사와 대화 중에도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물었다. 잘 들리지 않는지 목소리의 톤을 계속 높였다. ‘그럼 간호사는 하는 일이 무엇이여?’ 참으로 무례한 응대였다. 간호사는 그럼에도 신경질이나 짜증을 전혀 내지 않았고 친절하고 인내심 있는 태도를 이어갔다. 말로만 듣던 ‘백의의 천사“에 다름이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이런 비호감 캐리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 오른쪽 하나 건너편의 병상엔 정말 마음씨 좋은 어르신이 치료를 받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병실에도 조기 퇴원자가 나왔다. 이후 3일간은 자택에서 추가 격리를 하는 조건이었다. 이 기회에 환자 모든 이는 서로의 사는 곳을 물었다. 조기 퇴원자는 가까운 청주 시내가 사는 곳이라 했다. 내가 영동에서 왔노라고 하자 전형적인 호인형 어르신은 자신은 고향이 옥천이라고 말을 받았다. 나와 이 어르신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편안하고 격의 없는 아주 우호적인 사이가 되었다.

내가 현역 시절의 ’ 영업마인드‘가 갑자기 또 발동되었다. ’ 작가’라 새겨진 명함을 먼저 건넸다. 브런치 어플을 설치하고 구독자 등록도 하고 64편의 글마다 ‘좋아요 “를 눌러달라는 부탁도 마쳤다. 이 어르신은 한의원장이었다. 내가 퇴원하는 날엔 나의 대학 선배임을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좋은 인연도 찾았으니 뜻밖의 수확이었다.


내가 퇴원하기 전날 우리 병실엔 추가로 2명의 환자가 들어섰다. 그중 한 사람은 한의원장과 고향이 같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선배라고 했다. 이 분은 한시 작가였다. 어제 나와 한의원장간에 일어났던 절차를 똑같이 밟았다. 이번 코로라 19 감염사태에 두 분의 좋은 인연을 얻은 것은 작지 않은 행운이었다.


“코로 들여 마시고 입으로 후 ~~~뱉고...” 백의의 천사인 간호사는 나의 왼쪽 환자를 오늘도 정성껏 보살폈다.


난생처음 ’ 구급차 전세‘라는 과분한 혜택을 누린 입원 당시와는 달랐다. 퇴원 시는 각자 알아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내 보금자리와 이곳 청주는 버스나 열차 등 대중교통으로는 연결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청주에 살고 있는 고향 동기의 신세를 지기로 했다.


퇴원 절차도 간단하지 않았다. 평소 외출복을 소독을 마친후 한 시간여나 기다린 다음 환자복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소지품도 일일이 항균 티슈로 문질러 소독을 마쳤다. 병원에서 별도로 건넨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아 입구를 밀봉한 후 다시 한번 더 소독을 해야 했다. 미리 간호사와 교신을 한 후 간이 방호복과 수술용 장갑을 끼고 전신 소독을 한 번 더 마친 후 미로와 같은 코스를

거쳐 이제 응급실 앞에 섰다. 나는드디어 신체

거주이전의 자유를 돌려받았다.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편안하고 쾌적하게 이동을 마쳤다. 다른 동기와 셋이서 ’ 사제 밥“을 오

랜만에 맛볼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선 ‘골프 라운딩’을 이르는 ‘운동이나 한 번 하자’는 말이 우리 고향에선 언제부터인가 ‘둘레길 한 번 걷자”는 말로 굳어졌다. 친구 일행과 오늘은 운동도 마쳤다. 마침 저녁 시간에 잡힌 고향 친구 시골 모임에도 참석했다. 가벼운 ‘소맥 폭탄주”를 몇 잔 들이켰다. 해방감을 만끽했다.


“확진되기 전 날 친구분 밭에서 대파, 무, 배추 등을 수확하러 가기 전에 만난 이웃 어르신과는 바로 집 앞이니까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나누셨지요?”

“아니지요 마스크는 확실하게 썼습니다.”


보건소 직원은 역학 조사를 하던 중 나에게 유도성 심문을 했다. 확진 전에 나는 방역 준칙을 제대로 지켰다. 동선 파악도 짧은 시간 내에 제대로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그나마 추가 감염자를 줄일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정치인 등 커다란 죄를 저지른 형사피의자들이 포토라인이나 기자들에 둘러 싸여 상투적으로

들려주는 멘트가 갑자기 떠올랐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조사에 성실히 응하겠습니다.”

나는 나름 역학조사에 성실히 응한 코로나 19 확진자가 되었다.


생명, 생업, 생존에 직접 관련이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고향 죽마고우, 끈끈한 대학 동기, 오랜 기간 한 솥밥을 먹었던 직장 동료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격리되어 생업을 중단해야 하고 내 가족도 고통을 겪고 불안에 떨어야 하니, 각자는 인간 본래의 ’ 이기심“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기적인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그럼에도 이들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비난할 자격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어쩌다 나는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었는지 자괴감도 들었다.


나는 드디어 ‘위대한 일상’으로 돌아 올 수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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