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력과 인품은 과연 비례할까?

by 그루터기

“사장님, 이것 얼마인가요? “ “ 예 세어 보세요” 평소와 다름없이 오늘도 편 사장은 자신의 바지 아래 앞쪽 두 개의 주머니와 양복저고리 안쪽 주머니에서 일만 원권 현금 다발과 자투리를 주섬주섬 모두 꺼내어 강 과장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매우 바쁘니 빠른 시간 내에 입금처리를 해달라고 덧붙였다. 강 과장이 보기엔 편 사장이 이제껏 시간 여유가 있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강 과장은 창구 여직원의 힘을 빌고 지폐계수기의 도움을 받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주어진 미션을 완료했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현금의 양이 많다 보니 다발로 된 온전한 묶음을 풀어서 다시 카운트하는 절차는 생략을 했다. “사장님, 여기 입금 처리되었습니다.” 라며 통장 등을 건네 주어 일단 업무처리는 종료되었다. 우리 지점 영업장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일찍이 바쁘다는 말을 했다. 업무가 종료되었음에도 편 사장은 곧 돌아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창구 여직원은 사무실을 들어서자마자 강 과장에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주거래 은행 지점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단다. 어제 우리 지점에서 넘겨받은 현금 시재 일만 원권 다발 중 한 곳에서 넉장이나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순간 강 과장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필시 편 사장부터 넘겨받은 현금다발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보고를 받은 지점장은 ‘강 과장,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아주 강도 높게 질책을 했다. 당일 현장에서 즉시 확인을 한 후 손님에게 말을 했어야 하지, 정확하고 냉정해야 할 금융기관 직원이 기본이 되지 않은 것이라며 더 이상의 말을 잇지 못하게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강 과장은 다른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님을 감지했다. 자신의 지갑에서 일만 원권 넉 장을 미련 없이 꺼내어 창구 여직원에게 건넸다. 이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지점 사무실에서 멀리 떨어 지지 않은 편 사장 사무실에 퇴근길에 들렀다. 사실관계라도 알고 있으라는 의미로 사건의 개요를 꺼냈다. 그러자 편 사장은 지점장의 호통보다 훨씬 강도 높은 꾸지람을 했다. 이 정도에서 이번 일과 관련하여 강 과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국내 유수한 출판사 대리점을 꾸려가는 편 사장은 당점 정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화장실로 직행하여 볼 일부터 마치곤 했다. 이어 자신의 자산관리자인 강 과장에게 업무처리를 맡겼다. 이어 지점장실의 쿠션이 좋은 편안한 의자의 신세를 지어 조간신문을 적어도 한 시간 이상 탐독을 한 후 돌아가곤 했다. 매우 바쁘니 빠른 업무처리를 해달라는 부탁과 달리 업무 처리 후 에도 장시간 지점장실에 머무르는 걸 보면 앞 뒤가 잘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수세식 화장실의 물도 아끼려고 우리 사무실의 화장실을 매일 어김없이 이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번 현금시재 부족에 따른 강 과장의 대납 사건이 생긴 이후엔 우리 직원들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편 사장이 입금처리를 부탁할 경우 자투리는 물론이었다. 현금 띠지를 한가운데 묶어 담당자의 결재인을 날인한 온전한 현금 다발 뭉치마저도 예외 없이 이를 풀어헤친 후 다시 카운트하기로 했다. 이후에도 때론 온전한 다발이라고 우리에게 건넨 곳에서 서너 장의 지폐가 부족한 경우

가 종종 일어났다. 현금 부족 사실을 현장에서 즉시 알리면 편 사장은 그제야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이어 부족 분을 채워주곤 했다. 어찌 보면 우리 직원들을 테스트하는 것 같았고 조금은 비겁해 보였다. 온전한 현금 다발에서 현금 시재 부족이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니 지난번 현금 부족 건이 아마도 편 사장의 현금 뭉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심증이 더욱 굳어졌다.


작금의 금융기관 현실보다는 강도가 약했지만 당시도 개인이나 지점별 영업실적 평가는 있었다. 편 사장의 거래규모가 상당하다 보니 강 과장은 VVIP 고객으로 대접할 수밖에 없었다. 인품도 있고 좀 투명하여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는 고객이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터였다. 그러나 여러 부문에서 흠결이 있고 관리자와 케미가 덜 맞더라도 자신에게 배정된 고객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금융기관 직원이란 고객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편 사장의 평소 스타일과 행태 등에 관해 강 과장은 이미 면밀하게 파악한 지 오래였다. 편 사장은 우리 지점 정문을 들어 서자 마자 우선 화장실로 직행을 했다. 본인 사무실에서 볼 일를 보는 것보다 소량이지만 지하수라도 아끼려는 의도로 보였다. 바쁘니까 업무처리를 즉시 해달라 부탁을 늘 해 놓고선 지점장실에선 지점장과 이러저러한 환담을 이어가며 최소한 1시간 이상을 노닥거렸다. 여러 개의 신문을 탐독하는 것으로 보아선 전혀 바쁜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 또한 자신의 사무실 신문 구독료를 아끼려는 의도로 보였다. 이럼에도 강 과장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개인 실적 평가를 무시할 수 없다 보니 제대로 된 고객 관리를 했다.


본부에서 내려지거나 지점 자체에서 고객 배포용으로 제작한 고객 사은품(판촉물)을 어느 다른 고객보다 먼저 그리고 충분히 가져다 안기곤 했다. 이런 강 과장의 편 사장에 대한 지극한 고객관리는, 지점 전체를 이끌고 모든 평가부문에서 무한 책임을 지는 지점장의 입장에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한 가장 기본적인 임무에 불과했다. 과연 재력과 인품은 비례하지 않거나 별개라는 생각이 항상 떠오르나 강 과장으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다.


오늘 오후 3시경 전표철을 접어들고 지점장실로 들어서던 강 과장은 기겁을 했다. 중소기업 양 회장의 최근 거래가 일어난 “편의 거래”의 미비사항을 보완하려던 참이었다. 전표철의 해당 부분을 찾고자 이리저리 뒤적이던 강 과장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하마터면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A 상품에서 A+ 상품으로 대체 입금 처리할 것을 B에서 A+ 로 잘못 대체 처리된 것이 이제야 발견되었다. 언제든지 입출금이 가능한 수시 입출금식 상품인 A와 달리 B 상품은 입금일로부터 최소한 1개월이 경과되기 전에 인출 시엔 ‘환매수수료’란 일종의 페널티를 물게 되어 있는 기간물이었다. 모든 상품 계정에서 예탁금을 인출하고자 하면 통장, 거래 인감이 날인된 출금전표와 비밀번호의 입력이 필요한 것이 기본이었다. 이 것이 원칙이기는 한데 법인명의 계좌나 개인 VVIP 고객의 경우엔 일정한 제약 하에 부득이하게 예외를 인정하는 ‘편의 거래 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 경우 고객의 거래 의사가 확인되는 것이 기본 전제임은 물론이었다.


인감이나 통장이 없는 경우라도 영업점 책임자 2인 이상이 크로스로 체킹하고 연대하여 거래

를 일으키고 영업점장이 최종 승인을 하면 정당한 거래로 인정되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거래

에서 벗어난 예외적이고 제한적으로 부득이한 상황에서 대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한 제도였다. 정상적인 거래와 달리 사고 발생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보니 업무 처리 직원과 승인하는 책임자 간의 상호 크로스 체킹 등의 나름 견제 장치도 있었다. 실제로 이 편의 거래제도를 악용하는 직원 탓에 대형 금전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양 회장의 이번 건은 강 과장이 고객의 예탁금을 횡령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었다. 환매수수료가 없는 A 계좌에서 A+ 계좌로 대체 입금 처리를 해야 할 것을 환매수수료를 징구하는 B계좌에서 인출하여 대체 입금처리를 했다. 그래서 환매수수료만큼 고객 예탁금에서 차감되어 고객의 손실로 귀속된 것이었다. 그 차액 부분만큼 회사의 수익으로 계상되고 이와는 정반대로 고객의 잔고에서 차감되어 결과적으로 고객은 손실을 보았다.


인감의 날인이 없이 이루어진 거래의 해당 출금 전표에 고객의 거래 인감을 날인하여 편의 거래의 미비는 일단 보완되었다. 강 과장은 고객의 손실금액을 당장 변상을 해야 했다. 이런 내막을 고객인 양 회장에게 이실직고했다.


“해당 금액을 제가 물어 드리겠습니다” 라 말을 이은 후 추후 절차를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강 과장의 한 달치 급여를 훌쩍 뛰어넘는 규모의 금액이다 보니 난감했다. 집사람에게 즉시 해결책을 상의했다. 일단 최근에 만기가 된 보험금으로 밀어 넣기로 했다. 직원 강 과장의 고의가 아닌 실수로 발생한 사건이다 보니 이에 대한 구제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 정식 문서로 ‘전산 원부 정정(MFC)’을 요청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전산 원부를 정정하여 회사의 수입으로 귀속된 차액을 원상 복구하는 방법이었다. 결국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강 과장은 고객에게 변상한 금액을 돌려받게 되었다. 그나마 참 다행이었고 이로써 본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최근 강남 모 점포로부터 전입을 온 강 과장의 직속 상사인 권차장은 이 건에 관하여 코멘트를 했다. “월급쟁이인 강 과장보다 좀 여유가 있는 중소기업의 회장이라면 강 과장의 실수로 일어난 일인데, 우리 강 과장과 해당 금액을 반반 씩 부담 하세” 정도를 기대했는데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니냐고 하며 혀를 끌끌 찼다. 수도권 변두리 점포와 강남 한 복판의 점포 간의 차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해당 고객의 인품이나 스타일의 차이라고 보는 것더 옳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재력과 인품은 결코 비례하지 않음을 한번 더 체험했다.


구릿빛의 건강한 얼굴에다 다부진 체구를 자랑하며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한 사장은 오늘도 웃음 띤 표정으로 우리 사무실로 들어섰다. 가족 명의로 분산 가입한 여러 개의 통장을 들고 한 달치의 이자를 찾으러 왔다. 평생 우직하게 땅을 일궈 농사를 짓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듯이 농사일 이외 다른 분야엔 한 번도 곁눈질하지 않았다. 박 과장의 관리고객이 보니 강 과장으로선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한 사장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달 한 번씩 내점 하여 이자를 찾는데 인출한 금액 중 일부를 떼어서 창구 직원들에게 간식라도 챙기라고 뜻을 건네는데 매달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결코 많지 않은 금액으로 커다란 선행을 베풀었다. 서로 간에 결코 부담이 될 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앞에서 이른바 있는 편사장이나 양 회장의 처신과는 자연스럽게 대비가 되었다. 직원들 사이에 위 두 고고객과 한사장 간의 평판의 간극은 상당했다. 강 과장이 보기엔 한 사장의 자산규모는 편 사장이나 양 회장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관리자인 박 과장에겐 흔치 않은 식사 메뉴인 ‘기러기 고기’ 한 번 사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이러다 보니 관리자인 박 과장은 물론 다른 책임자나 창구 직원들이 한 사장을 모두 알아보게 되었다. 친밀감이나 유대감 등에선 편 사장이나 양 회장과는 아예 비교 대상에서 멀어졌다. 재력과 인품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 부장이 대리, 과장, 부장으로 직함이 바뀌었음에도 같은 Y점포에서 두 번이나 최장군의 자산관리자가 되었다. 최장군은 명문고교 출신에다 예비역 제독으로 아주 충성도가 높은 우량 고객이었다. 우리 회사 고위직 임직원과도 인맥이 닿았다. 최장군이 점포 문을 들어설 즈음엔 강 부장은 자리에서 부리나케 뛰쳐나가 반갑게 맞이하는 의전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었다. 강 부장과 반갑게 악수를 나눈 후엔 전 직원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는 ‘포스’부터 남 달랐다. 건장한 체구의 한창 잘 나가는 사십 대 초반의 최전방 사단장을 연상시키켰다. 한 손을 높게 치켜 흔들어 직원들의 인사에 답례를 잊지 않았다.


예탁자산 규모가 우리 점포 최상에다 3대에 걸친 가족 명의로 분산한다 보니 업무처리에 한두 시간이 걸렸다. 업무를 마친 결과물을 한눈에 쉽게 알아볼 수 있게 ‘계좌 현황 보고서’를 출력하거나 별도로 엑셀 작업을 한 관련 자료를 건넸다. 그러면 최장군은 특별한 요구 사항이 한 가지 있었다. “강 부장, 이 아래에다 멋지게 사인 한번 부탁하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별로 어려운 미션은 분명히 아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자신의 거액의 자산을 관리해온 바 있어 이미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강 부장이 자산관리자로서 해당 내용에 대한 일종의 인증을 하라는 뜻이었다. 개인적인 친분과 고객의 소중한 자산의 투명하고 정확한 관리는 별개의 것이었다.


“내가 강 부장에게 회사 내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일, 무어 승진 등에 관해 해 줄 만한 것이 없을까?”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꺼냈다. 또한 지점장 앞에선 아래 부하 직원들이 친절할 뿐 아니라 투명하고 정확한 업무처리를 잘한다고 수시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직원들을 위한 간식비도 쾌척했다. 최장군은 자신이 현 위치에 오른 것이 결코 운이 좋아서 만이 아니란 것을 여러 부문에서 보여주었다. ‘밥값이야 누가 내든지 식사를 한 번 하자’는 제안도 수시로 했고 실제로 최 장군 자신이 부담하기도 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장교 출신 입사 후배는, 정말 예비역 장성으로 ‘스타’ 값어치를 제대로 하는 고객이라고 거들었다. 강 부장이 자신의 아버지를 최근에 선산에 모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최장군은 ‘효자. 강 부장 촛대’라 일필휘지로 손수 작성한 부의 봉투를 건넸다. 강 부장은 순간 울컥했다.


이 최 장군에겐 과연 재력과 인품이 비례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현역으로 복무 중 미국으로 유학을 한 이력에다 전역한 후 민간기업의 CEO 경력이 더해지다 보니 수준 높은 매너, 품위라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더 나아가 ‘오블리스 노블리제’를 실천하는 가장 가까운 인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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