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 1번지 소재 학교와 적어도 입학 동문이라는 인연을 맺게 된 하숙생들이 몰려 기거하고 있는 곳이었다. 북촌의 한옥마을 규모에는 좀 미치지 못했다. 이 하숙촌 보금자리마다 이른바 ‘하숙인의 밤’이라는 이름을 빌어 술과 특식을 마련하고 나아가 가무도 곁들이는 낯설지 않은 행사가 줄을 이었다.
내 보금자리가 된 지 제법 세월이 흐른 하숙집에도 이런 이벤트를 해보자는 의견이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회비는, 당시 대학 내 고교 동문회비 공식 기준이 된 ‘3,000원 + 알파’를 누군가 먼저 제안했다. 이에 모든 생도들이 토를 달지 않고 동의했다.
4호실 의예과 2년 생도 민구형은 알파를 2,000원으로 스스로 판단하여 기꺼이 자그마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작금의 사태와 달리 당시로선 이른바 의학계열로의 쏠림현상이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다른 단과대학 대비 수업 연한이나 등록금을 비롯한 실험ㆍ실습비 책값 등에서 월등히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의대생의 경우 이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이 대체로 나아 보였다.
치대생 1호실 상준형, 한의대생 2호실 태호형이 알파를 부담했는지 여부는 아직도 미제로 남았다. 이미 중견기업에서 어엿하게 자리 잡은 3호실 종철 형은 단위가 한 단계 위인 종이돈 한 장을 쾌척했다. 선배로서 이름값을 충분히 해냈다.
저녁식사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마쳤다. 이후 자연스럽게 공복감을 느낄만한 시각인 오후 10경 모든 생도들은 안방의 기다란 직사각형의 접이식 밥상 앞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둘러앉았다.
세상에 처음 모습을 보인 지 많지 않은 세월이 지난, 당대엔 아주 획기적이고 쇼킹한 먹거리로 자리매김했다. 다국적 기업 제품 ‘후라이드 치킨’ 서너 마리가 밥상 위의 로열 존을 차지했다. 소주 맥주 각종 음료수 등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깍두기보다 약간 작은 사이즈의 무를 식초에 담갔다. 이를 네모난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윗부분은 비닐로 밀봉했다. 이런 치킨의 사이드 메뉴도 예닐곱 게 나뒹굴었다. 토종 한국인의 필수 먹거리인 김치도 정규 세끼 식사 자리가 아니지만 당연히 빠트릴 수 없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돈 후 드디어 장기자랑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음주와 달리 가무 부문에서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나로선 고난의 행군코스에 들어선 셈이었다.
고스톱판의 순번이 아닌 ‘장유유서’가 기준이었다. 우리의 보금자리 안주인이 먼저였다. 소주를 비워
낸 유리병에 숟가락을 꽂아 만든 즉석 마이크를 먼저 잡을 기회가 왔다. 모든 생도들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찬송가로 한곡 을 뽑았다. 분위기에 썩 어울리는 선택은 아니었다.
이제나 저제나 본인의 차례를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던 나는 이 역대급 위기를 어떻게 해서라도 벗어나려고 머리를 짜냈다. 이런 경우 늘 볼일을 핑계로 잠시 자리를 비우기도 했지만 오늘은 도저히 빠져나갈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노래방 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가사를 완벽히 알고 있는 노래를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스크린 했다. 한 때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누렸던 이종용의 ‘너’를 진땀을 흘려가며 겨우 겨우 마무리했다.
같은 자리의 다른 생도들의 비웃음이나 빈정거 럼이 나오지 않는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아니면 진인사하고 대천
명, 무어 이런 좋은 말도 떠올랐다. 신입생이라는
이유로 많이 접어 주 것으로 보였다.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라고 외치야 할 것 같았다.
피아노가 전공인 특실 막내 여학생 윤서를 끝으로 합격 여부와 별다른 포상이 없는 노래 경연대회는 무사히 종료되었다. 무릇 노래란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사람이 불러야 주인공은 물론 관중도 괴롭지 않으련만 나에겐 이것이 평생 떨치지 못하는 커다란 핸디캡이었다. 달리 벗어날 길은 없었다.
소방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생도들 모두는 모교 정문인 등용문 인근으로 짧은 시간 내에 몰려들었다. 역사와 전통을 따지더라도 다른 건물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체육대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목제 체육관이 화염에 휩싸였다. 결국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현장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두세 주간의 시간이 지난 후 화재의 원인에 관해 모교의 또 다른 자랑거리의 하나인 학교신문 ‘대학주보’에 관련 기사가 올라왔다. 소설에나 나올만한 내용이었다. 독자들을 한번 더 놀라게 했다. ‘어느 떠돌이 소녀의 방화’란 큰 글씨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 기사 제목 자체가 글쓰기에 좋은 또 하나의 소재였다.
18년간의 1인 군사독재 체제가 종식되었으나
80년 봄 잠깐 동안의 서울의 봄마저 신군부의 군홧발에 무너졌다. 문민정부는 요원했다. 사실상 군사정권이 또 연장되었다. 대학생은 1 ~ 3학년은 1주일에 4시간의 군사훈련을 교련과목이란 이름으로 이수해야 했다. 이도 모자라 1ㆍ2학년은 각각 9박 10일간의 문무대 병영 훈련과 3박 4일간의 전방 경계 훈련이란 좀 더 강화된 커리큘럼이 도입되었다.
같은 해 11월 중하순경 나의 입학 동기 남학생들도 수도권 소재 다른 대학생들과 다를 바 없이 문무대에 입소를 했다. 2학기 초가을 날 가정대 여학생과 법대 남학생들 간에 이루어진 남이섬 야유회란 이벤트의 후유증(?)이 일어났다.
문무대 입소를 위해 준비된 관광버스가 교시탑과 본관 분수대 사이의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섰다. 기록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입영 장정을 배웅하는 장면을 방불케 했다. 실제 캠퍼스 생활을 잠시 접고 군에 입대하는 친구들을 환송이라도 하듯이 가정대 여학생들은 야유회 당시 자신들의 법대 남학생 파트너를 찾아 나섰다.
간식거리를 비롯하여 절절한 사연을 담은 은밀한 서신을 꽁꽁 묵어낸 보따리를 건넸다. 야유회 당시 자신의 파트너 남학생을 배웅하는 눈물겨운 마당이 벌어졌다. 다행히도 나는 여러 핑계를 들어 야유회에 합류하지 않은 덕분에 이런 신파극(?)에 주연이나 조연으로 등장하지는 못하고 엑스트라 신세였다. 이를 천만다행이라고 보아야 할지 몰랐다.
9박 10일간의 짧지 않은 기간 중 미국엔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배우 출신의 첫 대통령이란 소식을 부대 안의 구대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리이건’이 아니라 ‘레이건’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추후 레이거노믹스라는 공급 중시 경제학에 기반을 둔 국정을 펼쳤고 신보수를 자칭했다. 신문과 방송 등 매스컴이 차단된 상태에서 부대 밖의 소식을 간신히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접하였다. 일상의 소소한 자유의 소중함을 체험했다.
우리 단과대학 생도들의 훈련을 전담했던 두 구대장은 각각 ‘삼겹살’과 ‘참새“라는 별칭도 얻었다.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캐릭터를 갖고 있었다. 불침번 근무 중 딴전을 피웠다고 내 절친은 얼차려를 받았다. 그 이름도 생소한 ’ 올챙이 포복‘이었다.
각개 전투장의 조교는 ’ 학생들 자세 잘 나오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낮은 포복을 이어가던 중 조교는 별안간 나를 지목하여 일으켜 세웠다. 혹시 얼차려를 받을까 우려했다. 그런데 내가 FM대로 자세를 취했다고 뜻밖의 칭찬을 했다. 나머지 코스를 면제받았다.
9박 10일간의 미션을 마무리한 나는 주점 등 다른 곳을 들르지 않고 보금자리로 직행했다. 심신의 피로를 풀기 위해 평소와 달리 2호실의 신세를 지어 낮잠을 청했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에 금세 잠자리를 떨고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내무반에 대기 중이던 병력들은 모두 어디 갔느냐"는 웃지 못할 잠꼬대를 했다. 보금자리 선배 생도들은 아니 그 며칠간 바뀐 환경에서 있었다고 벌써 그러느나며 나를 마음껏 놀렸다. 참으로 세뇌교육의 무서운 힘을 느꼈다.
당일 저녁 밥상머리에 앉아 모든 생도들이 도란도란 맛있게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노상방뇨’가 아닌 느닷없는 ‘고성방가’를 또렷하게 들었다. 9박 10일간의 미션을 무사히 마친 나와 같은 학번의 20대 초반의 건장한 남자 신입생이었다. 이른바 뒤풀이를 마친 후 같은 한옥마을 하숙촌의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하던 중이었다.
본인이 가진 역량을 총동원하여 치열하고도 리얼한 감정을 노래에 실었다. 6. 25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그려낸 것으로 보이는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맛깔나게 개사했다. 이른바 문무대송 이었다. 이를 20대 초반 젊은 청년의 우렁찬 목소리로 불러 젖혔다.
"빡빡 기는 각개전투, 피● 싸는 유격훈련 ~~ 당신은 원위치에 그 얼마나 ○●○이 쳤소? ~~ 한 많은 병영생활"로 마무리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관람객을 대상으로 펼치는 단독 공연 무대인양 맘껏 본인의 역량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 이 노랫소리는 하늘 높이 솟아 올라 별똥별이 되어 모든 생도들의 보금자리인 하숙집의 장독대 위에 떨어졌다.
** 시인 김광규 님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차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