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 1번지 하숙생 시대 (5편)

by 그루터기

음대 여학생 윤서는 하숙집의 막내아들 광철 형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생도를 ’ 아저씨‘로 통칭했다. 장가도 가지 않은 20대 건장한 청년이 듣기엔 썩 좋은 호칭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다른 좋은 마땅한 호칭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3호실 종철 선배 외엔 대략 형이라 불렀다. 이에 익숙해지는데도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고교 시절이나 사회에서 만난 선배에게 형이란 호칭을 자연스럽게 사용한 적이 별로 없었으니 이는 어쩌면 당연했다.


윤서는 우리나라 제1의 항구도시 부산 출신임은 생도들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저녁식사 시간에 오늘도 모든 생도들이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던 중이었다. 누가 먼저 나섰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쌀밥과 보리밥이 화두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고교 시절의 혼분식 장려와 도시락 점검 등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윤서는 원천적으로 ‘쌀’이라는 된소리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쌀’을 ‘살’이라고 발음했다. 마침내 쌀밥--> 살 밥에 이르렀다. 이에 재미를 붙인 모든 생도들은 막내야, ‘쌀’이라고 제대로 발음해보라고 했다. 윤서로선 그게 제대로 작동이 될 리 없었다. 더 나아가 ‘싸우다’도 ‘사우다’가 되고 말았다. 이에 모든 생도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가며 막내에게 제대로 된 발음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올 수가 없었다. 이 광경을 같은 밥상머리에서 지켜보던 나도 이 정도에서 한 수 거들어 보려는 참이었다. 그때였다. 윤서는 식사를 마저 마치지 않은 채 수저를 밥상 위로 힘껏 내동댕이쳤다.


"정말이지 밥맛이야, 재수 없어!" 란 말을 던졌다. 이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자신의 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제대로 발음을 구현하지 못한 윤서는 처음 난감한 표정에서 이제 울먹임을 넘어 제법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안주인은 드디어 한 마디 거들었다.

“그거 참, 여학생이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다. 더구나 제일 막내인데 놀려 먹는 게 그렇게도 재미있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순간 최고참 선배부터 학번이 가장 늦은 나까지 모두 머쓱해졌다.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건 나 혼자였다. 나도 이 대열에 동참하려던 직전이었다. 그 순간 윤서가 안방을 뛰쳐나가다 보니 그런 기회를 아깝게 놓쳤다.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이미지 관리에 상당한 득을 보았다.


그 이름만으로도 아주 신선하고 상큼한 Freshman(신입생) 시절의 한 학기를 허송 세 월 한 나는 매우 허탈하고 초조해졌다. 학내, 시국 시위로 1학기 강의는 기껏해야 겨우 한 달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중간ㆍ기말시험 문제지조차 구경하지 못한 채 평가를 과제물로 대체하는 참으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일생 전반기의 과업을 국가고시 최종 합격으로 일찍이 정한 바 있는 나에게 이런 엄청난 학습 결손은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10월 한글날을 맞아 나는 하나의 이벤트를 실행하기로 작정했다. 작금에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세계적인 금융위기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금융기관 스트레스 테스트’에 꼭 맞았다. 금융기관이 위기에도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는가를 사전에 점검하는 건전성 테스트 제도였다.

이른바 '공부맷집 테스트'였다.


아침식사 후 점심, 저녁시간을 각각 한 시간씩을 할애했다. 나머지 여유시간 중 하루 도합 10시간 공부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관연 가능한지, 그 난이도는 어느 정도인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하숙집과 도서관 열람실을 오고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중간에 화장실도 건너뛰어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공부를 이어가기로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 프로젝트를 알리지 않았다.


드디어 나는 나름 대단한 각오로 중앙도서관 3 열람실 한 모퉁이에 앉아 이벤트를 실행 중이었다. 그런데 2호실 태호형 동기인 선배가 같은 열람실에 자리 잡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서로 눈을 마주쳤다. 순간 이 선배는 자판기용 커피 한 잔을 하자고 나에게 제안을 했다. 나는 별로 반갑지 않았고 참으로 난감했다. 나는 본디 커피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게다가 오늘 스스로 야심 차게 진행 중인 이벤트의 성공적인 완성이 우선이었다. 선배의 티타임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이벤트 운운하기도 우스운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사연을 내보이지 못하고 버르장머리 없게(?) 결론만을 전했다.


나는 비록 이벤트엔 성공을 했지만 조그마한 후폭풍을 감수해야 했다. 얼마 후 2호실 나의 고교 선배 경수형을 거쳐 한마디 지적을 전달받았다. 후배는 사람은 선해 보이는데 좀 사회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완곡한 전언을 들었다. 지난번 도서관 열람실 티타임 제안 거절 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도 당시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음에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결국 하루 10시간 동안 연속해서 공부 시간 확보를 해보니 견딜만하다는 생각에 좀 뿌듯했다. 나의 공부 맷집도 그리 부족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차츰 그 기록을 늘려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세상 일이란 것이 모두 만만치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학교 내외의 사정으로 휴강과 휴교가 장기화되었다. 1학기엔 다시 학교 문을 열지 못하고 9월 초가 되어서야 새로운 학기 시작과 제대로 된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것이 소문을 넘어 정설이 되었다. 이러다 보니 언제 강의가 재개될지 예측이 쉽지 않았다.


학적을 둔 생도들은 직장인과 달리 적지 않은 하숙비의 부담을 덜고자 대부분 낙향을 했다.

이에 안주인의 경제적인 타격은 무시 못할 정도였다. 교육ㆍ행정대학원 등 이른바 특수대학원생들은 시국 시위에 적극적인 가담은 물론 참여 내지 관심이 적은 것으로 보였다. 정부 당국은 여름방학 기간을 활용하여 특수대학원부터 점차 정상적인 학사일정을 이어가도록 허용했다. 이에 안주인은 기존 생도들의 빈방에 이들 단기 하숙생을 유치하여 경제적 손실을 어느 정도 만회했다. 나의 1호실 맞은편 특실 음대생 윤서는 2학기 개강 직전에야 상경했다. 자신의 방을 다른 사람이 일시 사용한 흔적을 금세 알아차렸다. 좀 개운치 않은 반응을 보였는데 안주인의 소명을 듣고선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거듭되는 휴강과 휴교기간 나는 낙향하여 아버지의 벼농사와 인삼 관련 사업을 도왔다. 최근에 객토 작업이 마무리된 딘 전돌 느티나무를 두른 10마지기 남짓한 문전옥답의 땅 고르기 작업이 그 주요 임무였다. 인삼 캐러 가는 일도 그에 못지않는 또 하나의 미션이었다.


수강 신청한 모든 교과목을 필답고사 대신 과제물로 대체하기로 했다. 보기 드문 역대급 사태가 벌어졌다. 과제물 준비에 시간이 결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 2학기나 돼서야 정상적인 강의가 예상ㆍ기대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께 2주간의 과제물 작성에 필요한 시간 확보가 필요하다는 저간의 사정을 알려 쾌히 허락을 받았다. 개강 예상 일로부터 약 보름 전에 미리 하숙집으로 급하게 복귀했다.


휴교령이 내리진 상황이다 보니 통상의 방학 기간과 달리 캠퍼스의 도서관 열람실도 이용할 수 없었다. 사설 독서실 등은 별로 이용해본 적도 없고 선호하지 않았다. 작금의 코로나 19 확진자처럼 하숙집에 틀어 박히는 이른바 ’ 방콕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 나는 약 15일간 하숙집 문밖을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다. 무시 못할 기록을 세우며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과제물을 집중하여 마무리했다.


이 하숙집에 새로 둥지를 틀기 전에 나는 친척 누나 집에 입주 알바라는 이름으로 얹혀살았다. 이곳으로 둥지를 옮겨 오기 얼마 전이었다. 누나와 서울 시내 중심가인 남대문 시장 인근 중소형 백화점인 ’ 새로나‘라는 곳에 들러 춘추용 점퍼 하나를 마련했다.

옅은 푸른 빛깔에 흰색(회색) 점무늬도 섞였다. 과제물 작성이란 고난의 행군 중간중간마다 이 쑥색톤 점퍼를 걸치고선 곱게 콘크리트로 포장된 앞마당을 산책하듯 어슬렁거렸다.


"박군, 그거 어디에서 장만했어?”

이 집 안주인은 이 옷이 아주 딱 마음에 들었나 보았다. 자신의 막내아들에게 하나 사주어야겠다고 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이 물건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학창 시절 자취와 하숙 생활을 섞어가며 거주지를 자주 바꾸는 이른바 뜨내기 신세가 되다 보니 미처 챙기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물건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비록 길고 긴 세월 덕분에 이미 구닥다리 패션이 되었더라도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기꺼이 얼른 양팔을 꿰어 걸치고선 당시처럼 이슬비(여우비)가 오락가락하는 오솔길이라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걷고 싶다. 사람의 취향이나 캐릭터는 세월이 지나도 좀체 잘 바뀌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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