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동 맞은편 4호실은 의예과 2년 생도 석만형이 살았다. 내가 이 하숙집으로 입주 당시엔 빈방이었으나 최근 의대생을 새로운 방의 임자로 맞이했다. 룸메가 없는 독방을 썼다. 최소한 유급은 면하고 더 나아가 유능한 전문의가 되기 위해 시험 시즌은 물론 평소에도 학습에 매진했다. 의학계열 학과에선 유급이란 것을 구경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바로 좌측 방과 벽을 맞대고 있는 특실 음대 신입 여학생 윤서가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금 같은 망국적인 의학계열로의 쏠림 현상은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장차 안정적이고 고수익이 보장되는 직업을 가질 가능성이 거의 확실했다. 평소 다른 생도들과는 소통이 많지 않았다. 4호실 보다는 강의실이나 도서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특실의 주인은 음대 피아노 전공 부산 출신 신입 여학생 윤서였다. 일찍이 고교시절 여객기 신세를 지어가며 자신이 목표로 한 대학의 음대 교수에게 고액 개인 레슨을 받았다. 드디어 입학에 성공했다. 고교ㆍ대학 진학 시 한 번의 재수도 경험하지 않은 데다 초등학교를 한해 먼저 입학했다. 같은 학번인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이런 이유로 나는 '법대 아저씨'라고 불렸는데 그리 싫지는 않았다. 세상이 천지개벽할 만큼 바뀐 지금 같으면야 그보다 좀 새로운 버전인 '법대 오라버니'정도가 기대치였다.
나는 윤서와 종철 형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듣게 되었다. 자신을 음대에 보내기 위해 레슨비와 등록금 하숙비 등이 버거워 집안 기둥 하나가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엄살을 떨었다. 동생도 조만간 대학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나머지 기둥 하나도 마저 뽑아 동생 진학에 충당하면 되겠다’는 농담에 ‘아저씨는 이미 날아가버린 기둥을 다시 찾아와야지 그런 말씀은 당치도 않다’고 재치 있게 받아넘겼다. 상아탑을 우골탑으로 바뀌어 부르던 시절이었다. 지방에서 수도 서울로 대학 유학을 보낸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형제가 여럿인 경우 이에 대한 부담은 더욱 녹록지 않았다.
같은 주소지 한 지붕 아래서 한 솥밥을 먹는 생도 중 의대, 치대, 한의대생이 모두 있다 보니 윤서는 생도 당사자는 물론 동료나 선후배에 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모습은 내 눈에도 쉽게 들어왔다. 이러다 보니 상준형은 장차 자신의 과후배들이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후배를 눈여겨본 후 자신에게 귀띔을 해주면 참고하겠노라는 재미있는 제안도 했다.
이에 반해 2호실 한의대 태호형은 이러한 윤서에게 ‘제발 현실을 제대로 보라’는 등 까칠한 코멘트도 서슴지 않았다. 음대생은 자신의 전공 분야 이외에선 다른 단과 대생과 견줄 때 평균 수준에 미달된다고 디스 했다. 윤서는 이에 비분강개하기는커녕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 결코 감정적이 아닌 유연하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대학 야구계에 국보급 투수라는 좀 과도한 평가를 받는 선수가 자신과 종씨라고 자랑했다. 그리 미 워보이 지는 않았다. 윤서는 자신과 전공은 다른 입학 동기인 나를 비롯하여 모든 생도들의 호칭을 ‘아저씨’로 통일했다. 미팅이나 소개팅이란 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나에게 법대 아저씨는 캠퍼스 시절 내내 데이트도 한 번하지 못할 것이라는 근거가 별로 없는 무책임한 예언도 했다.
점심식사 후 오후 강의를 들으러 등용문을 지나 교시탑 인근까지 동행할 기회가 왔다. 나의 걸음걸이가 너무 빠르다며 여학생이나 동반자에 대한 나름 배려가 부족함을 질책했다. 큰 악의가 없어 보였다. 나는 이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난 고교ㆍ대학 진학 시 한 개씩 도합 두해나 늦다 보니 주위를 돌볼 겨를이 없다. 일생의 전반기 지상 과업이 된 국가고시 최종 합격을 위해 학업에 매진해야 한다. 대학의 낭만이니 어쩌니 이런 걸 살필 기회가 없소이다.’
나의 혼잣말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 여학생 윤서는 교회에서 만나 나의 법대 3년 선배와 백년가약을 맺는 뜻밖의 이변(?)이 일어났다. 무릇 세상일이란 함부로 예단할 것이 아니었다.
선배는 백여만 명의 열성적인 신도를 인도하는 엄청난 레벨의 선교자가 되었다. 한때 나에게 열심히 전도를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한 이력이 있었다. 나는 애초 신앙심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 캐릭터 인지도 몰랐다.
윤서는 성악과 동기와 선배들이 노래 연습 시 피아노 반주를 종종 해주었다.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점심ㆍ저녁식사를 대접받았노라며 미리 안주인에게 연락을 했다. 식사 준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하숙집 생도들이 매달 안주인에게 선불로 건네는 하숙비는 2인 1실은 8만 원, 독방은 12만 원이었다.
삼시 세끼는 안방에 모여 커다란 직사각형 포마이카 앉은뱅이 식탁(밥상) 위에 반찬을 올렸다. 전자 밥솥에 담긴 밥을 우윳빛 뽀얀 색 사기 재질의 공깃밥에 채웠다. 군대의 식기 당번처럼 순번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었다. 랜덤으로 밥통 근처에 앉은 생도가 수고를 했다. 식탁 표면엔 군데군데 나무의 옹이처럼 옻칠이 벗겨져 베니어판 조직이 약간씩 도드라 솟았다.
국이나 찌개를 비롯하여 반찬 수가 부족한 편은 아니었다. 생선구이는 ‘임연수’가 단골로 올랐다. 당시 한옥 하숙촌을 누비던 리어카 장수나 인근 재래시장에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생선이었다. 1호실 상준형은 내가 나중에 결혼을 해서 식탁에 이 ‘임연수’라는 생선이 올라오면 즉시 밥상을 통째로 내던져 버리겠노라고 했다. 당시 이 생선은 다른 품목 대비 저가였다. 아무리 좋은 반찬 메뉴라도 토종 한국인이 매끼 먹어도 물리지 않는 김치나 된장과 좀 달랐다.
안주인의 대표 주특기 메뉴는 돼지고기를 넣고 김장 담그는 날 보쌈용 김치처럼 포기김치를 세로로 길게 찢어 보글보글 끓여내는 김치찌개였다. 이것이 밥상에 오르는 날이면 상준형은 "캬! 소주 한잔 해야 되는 거 아니야?"라고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소주병을 추진했으면 하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나는 골목 입구 가게에서 눈썹이 휘날리며 소주 한 병을 즉시 조달했다. 당시 대학촌 주점에선 2살 배기 두꺼비 한 병당 300원을 받았다. 동네 상점의 소매가는 이보다 낮았다. 주로 내가 소주를 혼자서 지속적으로 조달했다. 큰 부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 소리도 던졌다.
안주인의 김치찌개 솜씨가 명불허전이라며 상준형은 기회 가 있을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 본인의 반려자에게 이 솜씨를 전수받을 기회를 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각자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곳을 떠나는 생도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날은 삼계탕 특식으로 회식을 하는 날이었다. 남아 있는 집토끼라도 확실이 잡겠다는 안주인의 독특한 전략이었다. 삼계탕 회식이 있는 날 밥통 가까이 자리한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공기에 밥을 담아냈다. 순간 안주인은 지청구를 했다. 삼계탕용 닭의 몸통 깊숙이 찹쌀을 채워 넣는다는 작은 상식도 나는 몰랐다. 왜 시키지 않는 일을 하느냐며 나무람에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중국과 수교가 없던 시절이다 보니 모든 식자재는 토종 국산이었다. 김치도 안주인이 손수 담갔다. 노란색 2리터들이 커다란 주전자엔 재래시장에서 구해온 거칠게 볶은 보리를 끓여낸 보리차가 담겼다. 이 주전자와 사기 재질의 투박한 물컵이 주방과 1호실 사이의 좁은 나무 마루 위에 정위치 했다. 탄산음료나 다른 인스턴트 음료와 견줄 때 웰빙음식이었다. 때론 이 물컵을 맥주잔으로 전용했다. 음대생 윤서는 물컵으로 쓰려다 맥주 냄새가 난다며 엄살을 부렸다.
안주인은 1호실의 상준형을 최 선생님으로 호칭하는데 반해 나는 박 군으로 불렀다. 연식이 별 차이가 없는데도 그러다 보니 서운했다. 치과대학을 마치면 치과의사가 되는 게 거의 확실하니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를 뭉뚱 거려 선생님으로 통칭하는 기준에 따르는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법대를 졸업하고선 법관이 될 가능성이 치대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서운함이 좀 줄지 않았다. 안주인 왈, ‘최 선생님은 전공(과)이 좋아서 ~~’라고 가끔 혼잣말을 했다. 이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고교시절부터 어느 정도의 하숙 생활의 이력이 있는 나로선 이 생활의 통상적인 시스템에 관해선 나름 어느 정도 반열에 올라 있었다. 하숙비는 선불이며 빨래는 당연히 본인이 해결해야 한다는 정도는 이미 기본이었다. 특히나 속옷 세탁의 경우엔 맞은편 음대 여학생의 눈을 피해 마당 한편의 수돗가에서 얼른 해치웠다.
한여름 한창의 무더위를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 수도꼭지에 끼워진 고무호스를 이용한 간이 샤워도 가끔 감행했다. 이 때도 여학생의 동태 파악이 우선이었다.
상준형이 세탁비누 두 장을 들고 들어와선 마당 한편의 수돗가에 이르러 옷가지를 주섬 주섬 챙겨 이윽고 빨래를 하려는 모션을 취했다. 안주인은 자신에게 맡기라는 말을 하며 짙은 고동색의 너른 고무 대야에 가로 홈이 많은 나무 재질의 발레판을 걸치고 비누를 치댄 후 부지런히 문질렀다. 이도 이른바 일종의 ‘관존민비’인가, 장래의 치과의사 선생님에 대한 예우로 보였다.
나는 혼자서도 이미 이 정도 빨래는 너끈이 해낼 수 있음을 모든 생도들에게 가끔 보여주었다.
입학 동기를 비롯한 다른 친구, 고향에서 나를 찾는 전화에 ‘박군, 전화!’ 라며 무뚝뚝하게 외치는 것과 정반대로 상준형에겐 ‘최 선생님, 전화받으세요’라고 했다. 이러한 차별 대우에 일일이 묻고 따지기는 쉽지 않았다.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더욱이 헌법소원 대상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