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 1번지 하숙생 시대 (3편)

by 그루터기



2호실 태호형은 1호실 상준 형과 지방 명문 고교 동기였다. 학번으론 한 해 아래고 한의학과 본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평소 학점 취득이나 교과 성적에 연연하지 않았다. 시험 일정이 임박해서야 몰아치기 벼락공부를 했다. 시험대비용 긴급 페이퍼의 신세도 지는 만만디 스타일이었다. 같은 과 동기 두세 명이 2호실에 거의 상주했다. 라면을 사들고 와선 하숙집 주방 취사도구의 도움을 받아 정규 식사에 갈음했다. 강의가 빈 시간이면 늘 이런 행태를 반복했다. 시험 시즌이 아닌 평소엔 기타 반주로 당시 가장 핫한 노래를 합창했다. 이러니 2호실은 직업 음악인들의 사설 연습실을 방불케 했다. 다른 방 생도들에 대한 배려는 아예 기대할 수 없었다. 베니어판으로 방 사이의 벽을 친 덕분에 방음은 전혀 불가능했다. 이러다 보니 1호실의 나는 이러한 열약한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도서관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2호실은 다른 방 대비 세간을 하나 더 갖추었다. 비록 최신품은 아니었다. 세상에 나온 지 제법 세월이 지난 빛바랜 ‘비키니 옷장’이 방 한구석을 차지했다. 이 부문만은 다는 방 대비 형편이 좀 나았다. 다른 방은 평상복은 일정한 높이에 줄지어 박힌 못을 옷걸이 대용으로 사용했다. 내의 등은 각자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공간에 고이 보관했다.


다른 방 생도들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호형은 동기 두세 명과 어울려 통기타의 반주에 맞추어 최신 대중가요는 물론 명곡 팝송 등을 하숙집이 떠나갈 정도로 불러댔다.

기악이 본래 전공이 아니었다. 애초 타고난 음악적 재능 덕분에 1호실 카세트 테이프를 돌려 들려오는 노랫소리만을 듣고 악보도 없이 즉석에서 기타 연주를 거뜬히 해냈다. 대단한 재능을 자랑했다. ‘곡을 손쉽게 따낸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그룹 스모키의 "What can I do?"도 거뜬히 즉석 연주를 해냈다. 아주 맛갈난 허스키 보이스에다 대단한 가창력을 자랑하는 이영화의 ‘실비오는 소리에’ 란 노래도 금세 따라잡았다. 한의학에서 대중음악 내지 실용음악으로 전공을 갈아타도 앞날에 그리 큰 리스크가 없을 듯했다.


태호형은 초저녁을 지나 자정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각, 후다닥 한옥 목재 대문을 열어젖히고 어디론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얼마 후 정체불명의 물건 한 아름을 안고 2호실로 돌아왔다. 인근 건축 공사 현장에 널린 콘크리트 벽돌 몇 개를 책상 위에 재주 있게 배치했다. 금세 근사한 수제 책꽂이가 탄생했다.


법대 동기생들이 청량리 로터리 인근에 자리한 중소백화점의 한 개의 홀을 빌었다. 당시 유행되던 이른바 ‘고팅행사’를 마련했다. 나도 이에 동참해달라는 과대표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다음이 더욱 문제였다. 나는 본래 춤이나 노래 등 예체능엔 젬병이란 사실을 고백했다. 2호실 태호형은 어떠한 조그마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춤과 노래 부문에서 단기완성 개인 과외지도 강사로 나설 의향이 있다고 했다.


내가 12월 이후 둥지를 다른 곳으로 옮긴 후 다음 해 여름 방학임에도 귀향을 포기한 채 도서관을 다닐 때였다. 태호형과 ‘굴러 공 당구장’ 앞에서 우연히 조우했다. 참으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한다며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하여 회기동 내 최초 하숙집 인근으로 다시 둥지를 옮겼다. 정도가 심한 축농증으로 고생 중인 동기 룸메를 대동하고 태호 형을 찾아 나섰다. 친구는 자신의 지병에 대한 한약 처방전을 거저 얻었다. 이에 동기 룸메는 대단한 횡재를 했노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당시 범생이 대명사로 불리던 내 눈엔 태호형을 롤모델로 꼽기엔 부족했다. 길고 긴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다보았다. 태호형은 사실 시야가 상당히 넓었고 본래의 전공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였다. 대인관계에서 다양한 인맥을 쌓을 능력도 충분히 갖추었다. 조직 생활에 꼭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훌륭한 캐릭터로 보였다.


3호실 정외과를 졸업한 선배 종철 형은 서울역 맞은편에 자리한 DW빌딩에 사무실을 둔 화장품 제조 중견 업체로 출퇴근했다. 대학 졸업 후 일자리를 찾았음에도 캠퍼스 타운을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이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캠퍼스타운 내에선 여러 부문에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인근의 풍광 등 분위기도 양호했다. 그동안 많이 익숙해져 편안했고 직장 밀집 지역이나 도심의 번화가 대비 저렴한 거주비용 등 때문이었다.


나의 입학 동기도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비슷한 사례를 종종 보았다. 특정 친구는 모교 관련 회사로 직장을 잡았고 캠퍼스 커플도 되었다. 모교 인근에 아예 터를 잡고 살았다. 이런 방식이 부동산 등을 통한 재산증식 등에선 어느 정도 불이익이 있더라도 후일 뒤돌아 보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종철 형은 두꺼운 검은색 뿔테 안경에 감색 정장을 즐겨 입었다. 교수 내지 대기업 간부 모습의 화이트칼라 전형이었다. 정경대학장인 R교수가 자신을 사윗감으로 점지한 거로 보인다는 회고도 했다. 캠퍼스에 대한 향수, 애착이 많았다. 학자로서 성공하여 대학에 남는 걸 생업으로 하고 싶었던 로망이 있었나 보다.


자신의 룸메이자 후배인 건축공학과 2년생도 민열형과는 케미가 별로 좋지 않았다. 종철 형은 자신이 잘 풀렸으면 총리 정도는 거뜬히 넘볼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생도가 모두 모인 밥상머리에서 농담 삼아 던졌다. 늘 이 정도의 대목에서 민열형은 제동을 걸었다. 본인은 향후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도 너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받아넘겼다. 두 사람 간의 긴장은 계속되었다. 학번의 간극이 제법 되는데도 불구하고 서로 간에 케미가 좋지 않았다. 정체성에서 공통분모가 적었다. 성향ㆍ성격의 차이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3호실은 1, 2호실과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3호실 건축공학도 2년생 민열형은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하기로 작정을 했단다. 유신정권 끝물 시절은 각종 이념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던 전성기였다. 웬만한 수준의 서적은 당연히 판매가 금지되는 이른바 ‘금서목록’에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렸다. 이념서적만을 주로 취급하는 사회과학 전문서점도 등장했다. 일단 세상에 빛을 본 후 판금이 된 서적들은 암암리에 유통이 되었다. 손님들 눈에 쉽게 띄는 책꽂이엔 그 모습을 당당히 드러낼 수 없었다. 원매자가 꼬치꼬치 물어 찾으면 초등시절 소풍지 보물찾기 놀이에서 후후 불어가며 흙먼지를 떨어내어 끄집어내 듯했다. 다락방이나 지하실 한구석에 몸을 숨긴 곳에서 뽑아내어 쉬쉬하며 건네주었다.


18년간의 1인 장기집권 시대가 있었기에 이러한 군사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화ㆍ재야세력도 더욱 기반이 공고해지는 아이러니도 있었다. 7년 내외의 군 복무를 장교생활로 마감한 후 오랜 기간 언론기관에 몸을 담았다. 수도 서울 소재 모대학교 신방과 교수로 재직 중인 심 교수의 저서는 대학가에서 폭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초기의 저서들이 판금 조치되었음에도 꾸준히 집필활동을 이어갔다.


비록 박사학위는 없었지만 현실을 매우 냉철하게 분석하고 비판하며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몇 안 되는 이른바 훌륭한 지식인이라고 했다. 법대 직속 선배 충호형의 심 교수에 대한 극찬이었다.


반드시 운동권에 몸을 담고 있는 학생이 아니라도 이른바 플래시맨(신입생)이 되면 문ㆍ이과생을 가리지 않고 이 심 교수의 책자 한 권 정도는 탐독하는 것이 당시 대세였다. 대학생의 최소한의 체면치레이기도 했다. 3호실 민열형도 역시 이 대열에서 국외자나 문외한이 되기는 싫었다. 최근 세상에 그 모습을 간신히 드러낸 심 교수의 "○상과 ●성" 이란 책을 넉넉지 않은 용돈을 쪼개서 통독을 했다. 18여 년의 장기 군사정귄의 주인공이 살아 있을 때가 지금보다 어쩌면 더욱 인기가 높았을 것 같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았을 거라는 상준형의 코멘트는 일리가 있었다.


어깨너머로 저간의 사정을 지켜보던 나도 심 교수의 저서를 마냥 무시해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법학을 전공하는 명색이 사화과학도였다. 사회현상이나 조국통일 민족발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해결방안 등 거창한 어젠다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이런 방면에 문외한이 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민열형은 이미 대학생의 교양필수 사회과학서적의 반열에 오른 이 교재를 숙독을 한 다음 조그마한 고민에 빠졌다. 평소 술값이나 용돈 부족에 시달리던 중 이 서적을 계속 소장하기를 포기하고 중고 가격으라도 되팔아 현금을 챙기기를 원했다.


이에 선뜻 나서 내가 민열형과 흥정을 하여 책의 소유권을 넘겨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으련만’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형 서점으로 직접 달려가 누구의 손때도 전혀 묻지 않은 새 책만을 손에 넣는 방식을 고집했다.

3,800원의 정가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정도는 할인하여 책을 넘겨받고선 민열형에게 고맙다는 찬사 정도는 받을 수 있었거늘 나에겐 융통성이라곤 약에 쓰려도 없었다. 당시 나는 주택을 거주 수단이 아닌 소유나 투자 목적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 지금 재산증식 수단으로 각광을 받는 강남의 똘똘한 아파트 한 채로 인식했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결코 영원한 소유란 개념은 없었는데도 그랬다. 임차 개념으로 접근해야 함에도 이에 미치지 못했다. 나의 정체성에 비추어 당연한 결론이었다.


얼마 후 캠퍼스 후문 인근으로 둥지를 옮겨갔다. 나는 당시 심 교수의 저작물을 잉크 냄새도 싱그러운 새책으로 손에 넣었다. 정가 3,800원의 해당 책자는 물론 심 교수의 잇단 다른 저서도 시차를 두고 모두 구하여 개인 장서의 소장 목록에 자랑스럽게 당당히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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