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 1번지 하숙생 시대(2편)

by 그루터기


늦여름을 지나 초가을 문턱에 때 아닌 궂은비가 내렸다. 오랫동안 불기운이 끊어진 아궁이에 연탄불을 지폈다. 상준형은 방바닥에 깔린 요의 귀퉁이 한쪽을 들어 올리며 내손을 끌어다가 댔다. 이는 한옥마을 하숙촌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며 안주인의 배려에 고마움을 표했다.


안방 소속 주인집 아들 광철 형은 외모, 체격 연령에 불구하고 어쩔수 없는 막내였다. 어느 집안이나 막내는 고유한 캐릭터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였다. 부모로부터 다른 형제 대비 보다 두텁고 각별한 사랑과 배려를 받는다. 이 막내 광철 형도 예외가 아니었다. 2년제 모 전문대 재학 중 군대를 마치고 복학을 망설이는 중이었다. 연세가 지긋한 이 집의 안주인인 자신의 어머니가 힘든 육체노동으로 하숙집을 꾸려 생계를 이어가는데 얹혀사는 형국이었다.


광철 형은 과일이나 기타 주전부리 등 간식을 즐겼다. 다른 생도들이나 외부인이 보는 곳에서 버젓이 자랑하듯 했다. 내 기준에 비출 때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기에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밥상머리 교육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이를 눈치챈 안주인은 우리 아이는 막내라서 그런 것 같다며 박 군이 이해를 바란다며 사정 이야기를 건넸다.


3호실에 기거 중인 장기 하숙생, 정외과 졸업생 선배 종철형 재학 시절 그 효력이 다한 신분증에 증명사진을 자기의 것으로 교체했다. 광철 형은 자신을 대학생으로 사칭했다. 대학생용 가방을 들고 냉장고용 탈취제를 파는 알바를 했다.


굴지의 백화점, 대형마트, 동네 편의점 등 유통체인이 그물망처럼 발달한 지금과 달랐다. 당시엔 이 냉장고용 탈취제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일단 아이템 선정에 성공한 셈이었다. 당시 고교 졸업생 중 대학 진학 비율이 10%에 채 미치지 못했다. 주부들로선 대학생이라 하면 한번 접어주었다. 제법 용돈벌이가 되었다. 더구나 인터넷 혁명 이후 온라인 상거래가 대세가 된 현 상황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당시로선 이런 패턴이 어느 정도 먹히던 시절이었다. 사립대 학생증은 공문서는 결코 아니다. 주민증이나 운전면허증처럼 국가나 지자체가 발급한 것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사문서 위조 및 동 행사죄 정도에 해당했다.


내가 거의 유일하게 즐기는 잡기인 장기 대국의 단골 파트너는 광철 형이었다. 승부는 10승 1패 수준으로 늘 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대국 시 사용하는 시간은 광철 형이 나의 두세배였다. 장고를 이어갔다. 프로경기가 아니라 형이 마음껏 시간을 쓰도록 나는 양해를 했다.


내가 가끔 조그만 작전을 폈다. 예컨대 졸 하나를 희생시키며 이에 대한 대가로 국면을 전환시키는 기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형은 초기엔 이에 말려들기 일쑤였다. "이게 왜 내 앞에서 걸구 적거리지?"라는 관용구를 입에 자주 올렸다. 결국은 내가 파놓은 함정에 빠졌다. 나중엔 몇 차례 화를 입은 경험을 교훈으로 삼았다. 그래서 내가 ‘수’를 부리더라도 손쉽게 잘 말려들지 않았다. 장족의 발전을 했다. 졸이나 다른 ‘군사’를 하나하나 희생시키는 대신 상대 진영을 초토화시키면 형은 결국 조기에 돌을 던졌다.


“프로권투에서 세계타이틀 보유자의 전적 155전 152승 3패를 예로 들면서 자신이 대국에서 번번이 깨지지만 11번의 경기중 상대방에게 1패 정도를 안길 수 있는 게 자랑스럽다. 상대로선 그 1패가 아주 치욕적인 이력이 된다”

는 나름 독특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내보였다. 그러니 대국은 계속 성사가 되었다. 이런 세기적인 대국을 코앞에서 상준형은 지켜보았다. 상준형은 내가 평소 말수가 적은 것과 달리 이런 장기 대국에선 말이 제법 늘고 호쾌하게 웃기도 한다며 놀려댔다.


광철 형은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에 다녔다. 최근 세례를 받았다. 안수 기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알리려 약식 간증을 하러 다녔다. 평소의 행동거지와 믿음 사이엔 상당한 괴리가 있어 보이는 건 나뿐이 아니었다. 광철 형은 내게 잘 늙지 않을 스타일이라며 가끔 덕담도 건넸다.


2호실 경수형은 나의 고교 7년 선배였다. 모 지방대 사회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에 가담한 대가로 제적을 당하여 강제로 군에 입대했다. 형의 신상을 훤히 알고 있던 중대장이 개인면담을 요청했다. 고교와 대학 등 그 정도의 스펙이면 대학을 가기에 충분하니 틈틈이 준비를 하여 다시 진학할 것을 종용받았다.

이에 경수형은 군 복무와 전역 후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매진했다. 덕분에 모교 2부대 ●○경영학과에 당당히 적을 올렸다.

400미터 트랙을 충분히 담고도 공간에 여유가 넉넉했다. 이름도 그에 걸맞게 지어진 모교 대운동장 메인스탠드 정면이었다. 거친 각목과 베니어판으로 임시구조물을 만들어냈다. 이 "합격자 명단 게시판" 한 곳을 차지한 본인의 수험번호와 이름을 자신 있게 가리켰다. "이 사람이 누군가는 잘 모르지만 아주 멋진 놈이고 향후 아주 크게 될 거다"라고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주경야독의 고달픈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자신에 대한 자축의 퍼포먼스였다.


형은 자신의 고교 후배인 나에게 캠퍼스 생활이나 기타 세상살이에 관해 지혜나 노하우를 수시로 전해주었다. 이러한 끔찍한 후배 사랑에 대해 모든 생도들은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장조카와 같이 대학을 다니다 보니 장형으로부터 하숙비ㆍ책값ㆍ용돈 등을 지원받는 게 녹록지 않았다. 가끔 밀린 하숙비를 놓고 주방에서 안주인과 협의를 하는 현장을 의도치 않게 목격했다. 선배의 자존심에 행여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80년 잠깐 동안의 서울의 봄이 신군부 세력의 군홧발에 짓밟혀 허망하게 무산되던 시절의 한가운데를 생도들은 모두 관통했다. 4월 초 학내 비리 척결 등을 내세우며 법대생이 주도한 교내 시위가 5월 중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으로 1학기 내내 다시 강의를 재개하지 못했다.


옅은 푸른빛까지 발하는 예리한 단도로 착검을 한 M16 자동소총을 경계총자세로 근무 중이었다. 특전사 현역병 둘이서 모교 등용문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선배는 나를 대동한 채 ●○의료원 정문 좌측 한편의 허술한 울타리를 넘어 중앙도서관에 당당히 들어갔다. 형은 경제적 형편이 여의치 않은 학생에게 우선 할당하는 ‘근로장학생’의 혜택을 받았다. 형은 도서관 사서의 보조역을 맡았다.


역사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고대 로마시대의 파르테논 신전과 구조와 외모가 아주 흡사했다. 모교 본관 건물 정문 오른쪽 한편에 접이식으로 마련했다. 붉은색의 "주차금지" 팻말이 버젓이 자리를 지켰다. 그럼에도 당대 최고급 외제 브랜드 승용차는 표지판의 취지를 내로란듯 무시했다. 아이러리하게도 바로 그 자리는 특정 승용차의 지정주차구역이 되었다.


이 승용차의 임자는 만년 이인자의 역할을 오랜 세월 해오던 일세의 풍운아가 한 때 자신의 부하였음을 자랑스럽게 말하던 모교 교수였다. 학부에선 일본정치학 한 과목만 강의했다. 내가 졸업반 시절이었다. 취업 시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려면 평점을 끌어올리야 했다. 법대 전공과목 대비 상대적으로 학점이 후하다고 알려진 그 교수의 강의를 나중에 복학생 선배들은 찾아 몰려다녔다.


본인이 일본 유학시절, 나중엔 해당국의 총리대신까지 지낸 적이 있는"나카소네"와 같은 지붕 아래의 하숙집에서 같이 지냈다. 이것을 하나의 자랑스러운 인연으로 끄집어냈다. 기회가 되면 지금도 "어이 자네 나카소네인가? 난 ○점●인데" 라며 통화도 한다. 그 정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너스레를 떨어댔다.

‘이스트포인트’라고도 불리는 학교 출신 최교수는 만연 이인자 보다 자신의 기수가 훨씬 앞섬을 수시로 내세웠다.


학생은 물론 일반직원이나 교수들도 교문 출입이 거의 통제되던 비상계엄 치하였다. 이 최교수는 특전사 경계병의 가장 깍듯한 예우인 ‘받들어 총’을 받으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캠퍼스를 드나들고 누볐다. 일본정치학 강의 시간엔 교과서의 진도는 나 몰라라 하고 자신의 군대생활과 일본 유학시절의 에피소드로 가득 채웠다.


80년대 초 지구촌 전역엔 이른바 민주화 바람이 불어닥쳤다. 동구 유럽의 폴란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수형은 오랫동안 노동ㆍ민주화운동을 이끌던 ‘레흐 바웬사’를 평소 자신의 롤모델이라 했다. 군용 야전상의 중고품을 구해선 알맞게 탈색된 상태로 즐겨 걸치고 다녔다. 이름에 걸맞게 기다랗게 세로로 좌석이 배치된 ‘동굴 다방’에선 고교 동문 모임을 가끔 가졌다. ‘대한민국의 바웬사’를 자칭하고 나섰다. 법대 3년 선배 충호형은 폴란드의 경수가 아닌 대한민국의 경수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며 추임새를 넣었다.


모래내와 모교 정문 앞을 오가는 134번 노선버스 정류장 인근에 자리 잡았다. 모교의 역사와 영욕을 같이 해온 선술집 ‘교차로’에 생도들이 모였다. 몇몇 이서 어묵 국물을 우려내어 조리한 라면과 꼬마김밥을 간식으로 나누었다. 젊은 날의 그 많은 고민과 포부, 캠퍼스 생활의 낭만을 논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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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형은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 후배 철우는 반드시 국가고시에 최종 합격하여 자신의 소신을 펼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제법 세월이 흘러 형은 일자리를 잡은 후였지만 나는 아직도 수험생활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내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법대 전용 도서관 지정석을 찾았다. 책값에 보태라며 형은 나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넸다. 꼬끝이 찡했다.


80년 짧은 서울의 봄이었다.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군홧발로 처참히 짓밟혔다. 이 일이 있기 약 1주일 전이었다. 경수형은 서울 소재 대학생의 서울역 앞 연합 시위 현장에 나타나 이에 적극 가담했다. 결코 크기가 작지 않은 돌을 진압 세력 쪽으로 굴렸다는 걸 실토했다. 형은 하숙집 안주인을 잠시 면담한 뒤 행선지를 전혀 알리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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