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뙈기의 땅도 바다와 맞닿는 곳이 없는 내륙의 작은 분지가 내 출생지이다. 나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기나긴 객지 생활의 여정을 이어갔다. 그동안 자취, 하숙, 입주 알바 등 타향살이의 방식도 다양하게 경험했다.
최근까지 친척 누님 댁에 ‘입주 알바’라는 이름으로 얹혀살았다. 전철과 버스 편 각각 1, 2회의 신세를 지며 통학해야 하는 애로가 있었다. 그래서 모교 인근 한옥마을 하숙촌으로 둥지를 옮겼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모가수가 불러 유명해진 ‘하숙생’이란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할 정도로 좋아했다. 해당 노랫말을 음미해보면 우리의 삶 전부가 어쩌면 하숙생 신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새로이 둥지를 튼 하숙 생활의 하나하나 모두 어쩌면 드라마나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숙집 아주머니를 제외한 모든 하숙생(생도)과 이 집 막내아들도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인 10대 말에서 20대 후반의 인물이었다. 이들이 엮어가는 생활은 싱싱하고 활기로 가득했다.
같은 지번(주소지) 한 지붕 아래서 전공이 제 각각인 동문 생도들이 한솥밥을 먹으며 강의 종료 또는 퇴근 후 늦은 오후와 저녁시간 밤을 지나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은 결코 생소하지 않았다. 어느 종교 교리 중 하나의 꼭지인 인연설(연기설)을 검증하는 공간이었다. 이러다 보니 뜨거운 건강한 피가 끓는 젊음과 대학생활의 낭만이 어우러졌다. 아주 다양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버무려졌다.
캠퍼스 정문까지는 대략 300미터 내외였다. 편도 1 ,2차선으로 포장된 지방도를 건너 한옥마을의 한편에 자리를 했다. 붉은색 기와지붕에 목조 건물이었다. 대문 역시 원목 본래의 자연스러운 무늬를 살린 나무 재질로 된 두쪽의 커다란 문짝이었다. 한쪽은 고정시킨 채 다른 한쪽으로 평상시엔 드나들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기다란 직사각형 나무토막을 아래 나무 받침대 위에 올려 밀고 당겨 왕복하는 방식으로 문을 열고 닫았다.
대문을 들어서서 왼쪽으로 두세 걸음을 떼면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파노라마를 돌리는 방식으로 조감을 하면 주방 --> 안방-->1,2,3호실--> 재래식 화장실 --> 맞은편 4호실 --> 특실로 이어졌다.
두 개의 건물동으로 나뉘었다. 상대적으로 모래보다 시멘트를 많이 배합하여 포장한 덕분에 매끄럽고 고운 콘크리트 바닥의 마당을 자랑했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걸어도 작은 상처의 우려는 전혀 없었다. 특실 가까이엔 세면과 세탁을 할 수 있는 수도시설도 눈에 들어왔다. 좌측 뒤 편엔 옹기종기 자그마한 장독대도 자리했다.
본래 툇마루의 용도로 만들어진 곳을 결코 두껍지 않고 방음 역할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베니어판 재료로 벽을 만들어 안방을 지난 곳에 1, 2호실을 꾸몄다. 되도록 많은 생도들을 유치하기 위한 하숙집 아주머니의 전략이었다.
이러다 보니 안방과 1, 2호실 각각의 양쪽 벽은 방음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좌우측의 공간에서 생도들 간의 대화 내용을 세세한 부분은 아니라도 대략적인 내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가 입주할 당시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알리가 없었지만 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은 나의 불찰이었다. 어느 누구를 탓할 수 없었다.
생도들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1호실 상준 선배는 치의학 본과 4학년생으로 지방 명문고를 졸업했다. 모교 마지막 후기입시를 치렀다. 안경을 착용했고 비교적 단신에 무심코 남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현 보금자리로 전입 오던 첫날 대학촌 인근의
왕약국 건물 2층에 자리한 클래식 전문다방에
마주 앉아 상견례를 마쳤다. 나의 바로 맏형 연배였다. 학번으론 더욱 간극이 있었다. 선배이자 형님으로 끽듯이 모시겠노라는 나의 선제 안에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군의관으로 입대를 원했다. 그러나 기준 시력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장래를 약속한 상대가 있어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가끔 이 보금자리를 드나들었다. 한여름 무더위가 한창 위세를 떠는 복날엔 장래 처갓집의 초대로 보양 특식을 외부에서 해결하겠다는 걸 안주인께 먼저 보고하기도 했다.
상준형은 독특하게도 조ㆍ중ㆍ동이 아닌 한국일보와 영자신문 코리아헤럴드를 같이 구독했다. 영어 공부에 도움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보였다. 중간ㆍ기말시험 시즌엔 룸메인 나의 심한 코골이를 견디다 못해 동료 생도의 방으로 일시 피신했다.
6년이란 길고 긴 수업 연한에다 하숙비, 교재대 실험ㆍ실습비 용돈 등을 감당하느라 부모님이 많은 고생을 하신다며 가끔 혼잣말 보다 약간 큰 톤으로 말했다. 형제 중엔 지방대 교수요원의 길을 가는 이도 있었다. 중산층 이상 레벨 집안 출신이었다.
문학적 소양과 재능이 있어 비록 짧기는 하지만 가끔 습작 수준의 글을 적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다른 생도들의 나에 대한 평가와 달랐다. 자신이 관찰해본 바에 의하면 과격하기는커녕 아주 차분하고 섬세하며 때론 여성적인 면도 찾아볼 수 있다는 촌평을 했다. 나는 이를 결코 서운하거나 비우호적으로 듣지 않았다.
맞은편 동의 특실을 혼자 차지하고 있는 음대 신입 여학생 윤서에겐 법대 아저씨하고 데이트를 한번 하는 게 어떻겠냐고 웃으며 권유했다. 장차 앞날이 유망해 보이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니 내 사인을 미리 받아놓아야겠다는 농담도 건넸다.
교내 이슈 또는 시국 시위에 관한 본인의 견해를 가끔 내보이기도 했다. 교내 시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자신의 입학 동기는 결국 유급이라는 불이익을 받았다며 시위에 가담하더라도 대열의 최전선에 서지말고 2선 내지 3선 정도에 머물 것을 넌지시 권했다.
점심식사를 하러 보금자리로 복귀하던 중 편도 1차선을 무단 횡단한 죄목으로 파출소에 잠시 붙잡혀 있다는 급한 전갈을 나에게 보내왔다. 두꺼운 표지의 전공 책자 안쪽에 고이 숨겨둔 지폐 한 장을 들고 면회를 갔다. 일선 경찰과 막후 협상이 잘 되었는지 곧 자유의 몸으로 풀려났다. 단기간에 많은 실적을 올리기 위한 집중 단속 기간에 엮인 것으로 보였다.
상준 선배의 1호실 룸메인 나는 여러 가지 사연으로 고교와 대학 진학 시에 남들보다 한해씩 늦어졌다. 최근 먼 친척 누님 댁에 얹혀살다 여의치 않아 이곳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2호실 고교 7년 선배 경수 형의 소개로 이곳으로 왔다.
좌고우면 하지 말고 인생 전반기의 지상과제가 된 국가고시의 최종 합격을 위하여 일로매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다. ‘낭만 유보, 인생 담보’라는 비장한 슬로건을 내걸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직진만 해야 했다. 대학생 기본 교양인 당구에도 아예 입문하지 않았다. 미팅은 사양했다. 영화 관람 등 예체능 각종 여흥엔 가급적 시간을 할애하지 않기로 비장한 다짐을 했다.
가곡 대중가요 팝송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미 직업 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 8척 장신 고향 절친의 소개로 카세트용 빈 테이프에 내가 담고 싶은 노래를 동네 전파사에 의뢰하여 원하는 곡을 녹음했다. 형이 구입 당시부터 이미 중고이던 카세트라디오 & 레코더를 활용하여 이 노래들을 즐겨 듣는 것이 그나마 나의 작은 낙이었다.
1호실 룸메 상준형은 이에 대부분 조용한 여성 취향의 노래들이라는 평가를 했다. 이 와달리 2호실 경수형은 본인이 좋아하는 섹터와 부합되는 교집합이 매우 많다며 1호실로 건너와 종종 같이 감상했다.
4월 초부터 법대생들이 주도한 학내 시위와 5월 중순 이후 시국으로 전환된 대규모 시위로 잦은 휴강ㆍ휴교가 반복되고 장기화되었다. 1학기엔 약 1개월 정도 정상적인 수강으로 만족해야 하는 참으로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경제학과 생도는 한 학기 단위로 수업시간과 등록금을 분석하여 시간당 수강료의 통계를 내기도 했다. 작금에 이슈가 된 등록금 반환 소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궁금했다.
나는 침구류인 이불과 요가 마땅치 않았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구입한 목화솜으로 손수 꾸며준 부피와 무게가 부담스러운 한 채의 솜이불을 가져왔다. 이를 세로로 길게 접어 요와 이불의 역할을 동시에 해결했다. 독특한 잠자리 대형을 고안해냈다.
5월 중순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었다. 모든 대학교의 문을 닫도록 하는 휴교령과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를 해산하는 초헌법적인 조치였다. 이 것이 신군부 최고의 실력자에 의해서 벼락같이 내려졌다. 이러한 내용의 기사가 1면 상단에 대문짝만 하게 인쇄되었다. 아직도 윤전기의 짙은 잉크 냄새가 덜 가신 조간신문을 새벽 일찍이 펼쳐 들었다. 순간 젊은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나는 ‘●○●이를 죽여라’를 연발했다. 18년간의 장기 1인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진 것이 엊그제인데 또 다른 신군부정권이 그 뒤를 이어갈 것이 분명했다. 이런 현실이 매우 안타깝고 조국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는 여기서 접어야 하는지 피 끓는 20대 초반의 법학도로선 고민이 깊었다. 심한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꼈다. 현재 돌아가는 꼬락서니로 보아선 민족의 발전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이라는 지상 최대 과제의 실현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에 3호실 종철 선배는 나를 과격하다고 생도들이 모두 둘러앉은 아침밥상에서 코멘트를 했다. 룸메 상준형이 '철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라고 이번에도 나를 비호를 하고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