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월동준비와 겨울나기 2편 완)

by 그루터기


건축자재로 쓰기엔 외형이나 품질이 못 미치는 원목 등은 땔감으로 활용하였다. 이런 땔감을 챙기러 300번지 가족은 화목이 짱짱하게 들어선 ‘소골’로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지인이나 목상들을 통해 원목 상태로 구입을 했다. 지금 지근거리에 사는 한 고향 친구는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아주 나이 어린 본인 전용 어린이 지게도 따로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친구는 아버지를 비롯한 당신의 아들들 모두는 화목을‘챙기러’(나무를 하러) 나섰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당시의 녹록지 않은 친구네 살림살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모탕을 아래 받침목으로 하여 원목을 땔감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하게 장작 패기를 했다. 어깨너머로 배워 어설프기는 하지만 역시 나도 동참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우선 원목을 세로로 세워 반으로 쪼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한가운데를 정확히 조준하여 찍어 도끼날과 원목이 일체가 되어야 했다. 한꺼번에 온 힘을 한데 모아‘쫘아악’ 쪼개지는 소리에 희열까지 느꼈다.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갔다. 커다란 윷가락처럼 두 동강을 낸 후 추가로 1/4 정도로 한번 더 잘게 도끼질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작업이 완성된 장작개비는 300번지 초가 안방 오른쪽 모퉁이 인근 굴뚝과 토종닭 보금자리 아래에 보기 좋게 차곡차곡 쌓았다. 세월이 흐른 후 TV 등에 등장하는, 권투선수들이‘장작 패기’로 몸만들기 하는 것은 노동보다는 운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가을걷이 후 탈곡을 마친 짚단을 구입하여 월동 준비의 일환으로 짚가리를 쌓았다. 상추 등 모든 수확이 끝난 300번지 두엄 밭 인근 텃밭으로 짚가리 터를 이미 정했다. 아래부터 성인 남자 길이의 1.5배 수준 높이까지는 직사각형으로 평탄하게 쌓고 최종 마무는 피라미드 지붕 방식이었다. 이 짚가리는 비상, 예비용 땔감이었다. 짚가리란 짚단을 올려 쌓은 더미를 말했다.


초등 4학년 때 관내를 떠나 타 지역으로 전학을 가게 된 교감선생님 막내아들이 300번지 초가로 놀러 왔다. 호기심이 작동한 친구는 짚가리 전면 왼쪽 바닥에 보이는 작은 구멍에 손을 넣었는데 아뿔싸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들쥐에게 손가락을 물리는 봉변을 당했다.


김장을 마치면 곡괭이와 삽을 동원하여 300번지 초가 꽃밭 전면 돌로 만든 울타리와 수평으로 서너 개의 김칫독 구덩이를 파냈다. 300번지 시대엔 관내에서 아무리 재력이 있는 집안이라도 냉장고는 꿈을 꾸지 못했다. 지상보다 기온 변화가 덜한 땅속의 김장독은 냉장고 기능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었다. 조상의 지혜 중 하나였다. 단지 가장 윗부분 둘레 바로 아래까지 묻고 이어 뚜껑을 덮었다. 그 위엔 초가지붕 이영을 엮듯이 하여 덮개로 활용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로부터 완충역할을 했다. 당시 겨울철엔 삼한사온 사이클이 있어 비교적 따뜻한 날 김장김치가 너무 일찍 발효되거나 쉬는 것을 막으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배추 김장에 반드시 필요한 무채를 썰어 넣고 깍두기를 만들고 남은 통무를 겨우내 보관하는 방법이 구덩이를 파서 땅속 공간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100개 내외의 통무를 일정한 깊이의 평탄한 장소에 더미로 보관했다. 출입구를 만들고 지푸라기 뭉치로 덮개를 만들어 틀어막았다. 상단부는 사람의 묘보다는 낮은 높이의 흙무덤을 쌓고 지푸라기로 만든 초가집 이엉처럼 덮었다. 외부의 찬 기온으로부터 차단하는 역할이 충분히 가능했다.


어머니는 부엌칼을 쥔 오른팔을 끝까지 쭉 뻗어 대기 중인 통 무를 무작위로 푹 찍어내어 무 국 등 반찬을 올렸다. 형제들도 호기심에 심부름을 자청하여 이 정도는 충분히 해냈다.


300번지 가족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딸린 널지 않은 금양 임야와 자그마한 밭뙈기 이외엔 나락 논은 아예 없었다. 나중 300번지를 떠난 이후 풍찬노숙하여 사업으로 아버지는 차츰 농토를 사들였다.


면 소재지의 다른 부락에 사는 큰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땅을 빌어 벼, 보리, 기타 야채 등의 농사를 짓는 이른바 소작을 했다. 감자나 고구마도 재배하였다. 감자는 고구마와 달리 겨우내 보관을 하지 않았다. 늦가을 수확한 고구마를 보관하는 방식으로‘고구마 통가리’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안방 한 모퉁이에 마련했다


성인 엄지손가락 정도 굵기의 수수깡을 엮어 두르고 성인 남자 키의 1.5배 높이가 되는 원통형의 생고구마 수납공간을 만들었다. 가공하지 않은 고구마를 하나 가득 채우는데 쌀 가마니 5개 정도의 용량은 족히 되었다. 설날이나 겨울방학 중 큰집에 들를 경우 큰아버지는 풀 베는 낫을 동원하여 껍데기를 아주 정교하게 깎아 낸 옅은 노란빛을 띤 깔끔한 흰색 생고구마를 건네주었다. 시원하고 아주 담백한 맛이 일품인데 지금은 대표적인 웰빙 음식으로 섬유질 덩어리였다.


쇠죽을 끓인 후 아직 불씨가 죽지 않고 숱이 되어버린 장작더미의 잔해와 아직 거친 수준의 재를 활용하여 만들어 내는 구운 고구마도 맛볼 수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노란 속살을 드러낸 이 고구마는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배추김치를 세로로 쭈우욱 찢어 올려 먹었다. 이에 동치미를 곁들이면 더욱 환상적인 조합이었다.

고모부 애장품인 놋쇠 화로 안의 재에 묻힌 고구마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호박(물) 고구마는 생으로, 밤고구마는 굽거나 찌어서 먹는 게 제격이었다. 생고구마를 눈 더미 안에 한나절 정도 묻은 후 꺼내면 살 어름이 둥둥 떠다니는 동치미 국의 무를 씹을 때 즐기는 아삭아삭한 맛과 유사했다. 이 또한 고구마의 다른 절정 메뉴였다. 끼니 걱정까지 해야 할 정도로 살림이 어렵던 시절 밥 대신 고구마를 식사에 갈음하기도 했다. 무쇠 솥 안의 쌀, 보리쌀 위에 고구마를 올려 찌어 냈다. 어린 시절 고구마에 너무 질린 나머지 지금은 간식으로도 눈길을 주지 않는 친구도 있다.


300번지 취학 전 유년기 형제들의 손장난,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바램 등으로 헤어진 방 문풍지 교체와 정비작업을 늦가을 정도에 했다. 문틀에 남은 낡은 문종이 등을 물에 불려 깨끗이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모기장과 유사한 잘디 잘은 체크무늬 푸른색 질긴 천을 새 것으로 풀칠하여 문짝에다 꼼꼼하게 붙였다. 그 위에 문종이라 부르는 한지를 사각 둘레에 너비 5센티미터 내외의 여유를 두고 방문 틀 면적보다 크게 붙였다. 문고리 인근엔 마른 국화꽃 잎사귀를 한지 아래에 균형 있게 배치했다. 결코 녹록하지 않은 살림살이 시절 하나의 운치 있는 여유였다.


지금 전기다리미로 작업 시 사용하는 스프레이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맑은 맹물을 하나 가득 입에 물었다가 푸하고 내뿜었다. 한지가 주름이 없이 팽팽하게 잘 달라붙게 하였다.

따스한 햇볕에다 부드러운 바람으로 금상첨화가 되는 300번지 앞마당에 내어 널어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아주 저명한 시인이 이미 적었지만 ‘바람에 문 풍치 우는 소리’는 지금은 조그만 운치이지만 300번지 시대엔 냉혹한 생활고였다.


조국수호에 여념이 없는 국군장병 아저씨들은 1식 3 찬이 원칙이었다. 최전방 근무자들은 이른바 "리스크 프리미엄"을 받아 4 찬이 었다. 지금은 더욱 많이 개선되었다고들 한다. 300번지 가족들이 겨울을 나는 동안 반찬 콘텐츠는 장병 아저씨들의 그것보다 양호했지만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간장 고추장 된장은 반찬이라 기 보다는 기본양념이었다.


1 인당 GDP라는 지표도 제대로 발표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는 개도국이라는 대접을 받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국가 간의 교역량이나 어떤 다른 지표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10~12위 정도에 랭크된다. 이는 역사에 유래 없는 비약적인 압축성장의 덕분이었다.


비닐하우스 등이 일반화되기 훨씬 이전이었다. 중학교 농업 시간에 등장하는 "촉진ㆍ억제재배"등은 당연히 어려웠고 제철 음식만을 먹을 수 있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야채나 푸성귀 등을 구경할 수는 없었다. 김장김치를 기본으로 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하여 겨우내 꾸준히 먹고 지냈다. 배추 김장김치는 매끼 한 번도 빠질 수 없는 고정 메뉴였다. 김치와 콩나물을 섞어 끓인 "김치 콩나물국"도 거의 개근을 했다. 깍두기도 구경하기 쉽고 김치 전은 별식으로 어렵지 않게 마련이 되었다.


어머니는 부엌칼을 쥔 오른손을 무 구덩이 입구 안으로 쭉 뻗어 대기 중인 생무를 찍어 꺼냈다. 김장 김치를 담글 때처럼 무를 채 썰어 들기름을 붓고 달달 볶다 물을 부어 끓여내는 담백한"무국"외에 부엌칼로 삐져 낸 무조각으로 같은 코스를 밟는 ‘제2의 무국’도 있었다.


나는 어린데도 불구하고 순 토종 국내산 빛깔도 고운 고춧가루를 뿌려 넣어 즐겨 먹었다. 많은 재료가 동원되지 않는 심플한 요리였지만 아주 대단한 웰빙 음식이었다.


다른 기회에 이미 적은 바 있는 ‘콩나물밥’에 버금가는 ‘무밥’도 등장했다. 콩나물을 바닥에 깐 후 쌀 보리쌀을 그 위에 덮는 콩나물밥과 달리 썬 무를 덮어 깔고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뜨리기도 했다. 무 자체의 수분 때문에 밥물의 조절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완성된 무밥을 양념간장으로 비볐다. 양념간장의 성공 여부가 키포인트가 됨은 콩나물밥과 마찬가지였다. 반찬이라기보다는 주식에 가까웠다.


가공하지 않는 생무 껍데기를 벗긴 상태로 아작아작 씹으면 아주 시원하여 갈증 해소가 되었다. 아주 깔끔한 식감을 느낄 수 있어 이 또한 단독 메뉴로도 손색이 없었다. 바람이 들어 구멍이 숭숭 뚫린 무나 이른바 씽이 박혀 질긴 무는 아깝기는 하지만 300번지‘조선 토종 꺼먹 돼지’에 양보를 했다.


김장 배추김치를 쫑쫑 썰어 들기름을 부어 달달 볶아내는 김치 볶음도 그 본적은 김장김치였다. 300번지를 떠난 지 많은 세월이 흐르지 않은 중학교 1학년 점심시간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같은 교실 안의 본인 좌석 위치와 관계없이 관내 같은 부락 친구들끼리 한데 모여 도시락을 먹었다. 부락 규모의 편차가 심했고 소재지 친구들은 예닐곱 명이 한데 모였다. 관내 치안을 총괄하는 지서장의 장남은 오늘도 가루 커피 병 본래의 용도가 다한 빈 유리병에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김치 볶음’을 가득 담아왔다. 친구들의 젓가락을 들고 조금이라도 먼저 많이 가져가려고 불꽃 튀는 접전을 벌였다. 젓가락 간의 충돌사고는 예삿일이 되어 금세 바닥이 들어 났다. 금속성 시끄러운 소리가 오랜동안 귓전을 맴도는데 친구 어머니의 뛰어난 손맛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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