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월동준비와 겨울나기 1편)
매년 11월 말이나 12월 초엔 집안 큰 행사인 김장을 했다. 딘전똘과 너긋말을 지나 원댕이 배추 무 밭이 만주 벌판에 버금가게 너른 가을걷이가 한창인 곳으로 행차를 나섰다. 300번지 이웃 농가에서 빌려온 "수레" (달구지)를 타고 아침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
겨울철 주된 먹거리 김장재료인 배추와 무 각각 3, 2접을 뽑아 직접 실었다. 어림하여 포기수를 맞추다 보니 이랑 단위로 뽑았다. 300번지 초가집 안은 어머니는 물론 큰고모, 누나들 이웃 아주머니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비상대기 중이었다. 배추의 사이즈에 따라 한 포기를 두 쪽이나 네 쪽으로 쪼갰다.
천주교 예배소 건물 뒤편에 위치한 동네 공동 우물에서 백금 색 알루미늄 재질의 바케스로 이미 전날까지 충분한 물을 길어 놓았다. 타원형 고무‘대야’에 준비된 물을 잔뜩 들어붓고 발이 굵은 김장용 소금을 동원했다. 지푸라기를 가로 세로로 성기게 엮은 가마니를 풀어 잘 녹도록 휘 휘 저어 풀었다. 이곳에 이미 쪼개 놓은 배추를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어느 정도 배추의 숨이 죽었다 싶으면 배추 조각의 물기를 빼어냈다. 배추 머리 부분은 좀 두껍기 때문에 소금을 듬성듬성 추가로 뿌려 주기도 했다.
오후 7~8 시 초저녁에 시작하면 새벽 2~3시 정도에 아래에 깔린 것과 위의 것을 바꾸어 소금기가 포기마다 고르게 보이도록 했다. 물을 담은 대야 등으로 일정 시간 눌러 놓기도 했다. 새벽 6시 정도가 되면 배추 조각을 꺼내 나무 탁자 등 위에 차곡차곡 쟁여 쌓았다. 물기가 덜 빠졌다 싶으면 중간 부분을 꺼내 한 번 더 짰다.
배추가 주된 재료이긴 하지만 많은 종류의 양념 등이 동원되어야 맛있는 배추김치가 탄생할 수 있었다. 무채는 기본이고 고춧가루, 다진 마늘, 생강, 배, 당근, 지금의 까나리 액젓 등에 해당하는 칼로 다진 새우젓갈, 갓, 1.5 센티미터 사이즈로 비스듬하게 썰은 대파, 시원한 맛을 내는데 반드시 필요한 지렁이 모양의 해물인 "청각" 미나라 등을 버무렸다. 배추 조각의 잎사귀를 하나씩 들추고 꼼꼼하게 이 양념들을 집어(우겨) 넣는데 이를 보통 치댄다고 했다.
밀가루가 아닌 반드시 찹쌀 죽을 쑨 후 식혀서 집어넣는데 이를 ‘풀’이라고 불렀다. 각종 재료와 양념을 골고루 잘 섞어야 제 맛이 났다. 전라도식 배추김치엔 꼴뚜기, 황석어, 어리굴젓, 명태 젓 등 각종 젓갈류를 많이 동원했다. 하지만 300번지는 새우젓갈 정도가 대세가 되었다.
김장독 가장 윗부분은 배추 우거지로 덮는데 이는 백태(골마지)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군내는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잘 못 보관하는 데서 오는데 김치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골마지란 된장 간장 술 초 김치 따위 물기 많은 음식의 겉면에 생기는 곰팡이 같은 물질을 말했다.
깍두기는 무를 알맞은 네모난 크기로 썰어 담그는데 배추김치보다는 재료나 양념이 훨씬 단출하였다. 기나긴 겨울 끝자락에 시큼한 깍두기 국물은 콩나물국에 간을 맞추거나 간식으로 먹는 인절미 등의 세트 메뉴로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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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는 동치미 전용 무를 썰지 않고 통 채로 사용했다. 단무지용 무처럼 품종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의미였다. 쟁반에 소금을 깐 바닥에 무를 약간 힘을 주며 누르면서 동시에 굴리면 무가 약간 꾸들꾸들해졌다. 이어 2~3일 정도 묵힌 후 항아리 안에 차곡차곡 쟁였다. 소금물을 끓인 후 충분히 식혀서 무가 낭창낭창, 흥청흥청해지면 항아리에 들어부었다. 배추김치 못지않게 제법 많은 재료와 양념이 필요했다. 양파가루, 저민 생강, 슬러 시한 마늘, 쪽파, 대파, 갓, 미나리 등이 그것이고 면으로 된 보자기 안에 삭힌 고추(지고추), 노란색 매운 고추, 마늘, 생강 등을 담고 입구를 여몄다. 사과나 배는 채를 썰지 않고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채 씨를 빼낸 후 쪼개서 넣었다. 항아리 아래로부터 동치미용 무, 양파망 보다 훨씬 위생적인 면포 따리, 야채 등을 차곡차곡 쌓았다.
찹 쌀로 쑨 풀을 식힌 후 물에 연하게 풀어서 항아리에 들어부었다. 소금으로 간을 하며 야채 윗부분을 하얀 비닐 등으로 동여 메고 약 20 여일이 지나면 훌륭한 동치미 김치가 완성되었다. 이는 본격적인 김장 시즌보다 한 달 정도 앞서 담갔다.
300번지 시대엔 본인 소유가 아닌 밭에 키운 깻잎을 따내 가져가는 것이 그저 관행으로 용인되었다. 여름날 수박 참외서리보다는 훨씬 죄질(?)이 가볍다고 볼 수 있었다. 하루 이틀 날을 정해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들과 대여섯 분이 어울려 깻잎을 따왔다. 고들빼기나물도 곁들여 담기도 는데 이 귀하신 물건은 300번지 초가에선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깻잎을 대략 30~50장 단위로 가지런히 모아 바느질용 실로 가운데를 떠멨다. 깻잎 장아찌를 담글 때는 지금의 액젓이나 ‘조선간장(전통간장)’이 아닌 외 간장이라 불리는 샘표간장을 사용하였고 골파, 당근, 생강, 마늘, 통깨, 실고추 등 재료와 양념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간장 단지와 고추장 단지의 중간 사이즈 항아리에 차곡차곡 쟁여 쌓았다. 이 깻잎 장아찌는 엄청난 세월이 흐른 지금 웰빙 음식으로 대접받는 것과 달리 단골 도시락 반찬이 되다 보니 300번지 초가의 형제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즐겨 먹고 있는 건강 음식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시래기와 우거지는 수시로 헷갈린다. 비닐하우스 재배가 아직 일상화되지 않은 시절이다 보니 둘 다 김장철 즈음 에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시래기는 무청 부분만을 잘라내어 여자 어린이 머리를 따듯이 지푸라기로 엮어 300번지 초가 사랑방 흙벽에 걸어 말렸다. 양지가 아닌 음지를 택하여야 제대로 된 상품을 기대할 수 있었다. 우거지는 김장용 배추 바깥 부분에 푸른색의 잎사귀를 떼어내 시래기와 달리 일단 한번 데쳤다가 식은 물에 담가 보관을 했다.
고교 시절을 마친 후 괴나리봇짐을 둘러매고 무작정 상경하여 친척 누나 집에 얹혀 살 기회가 왔다. 누님은 말린 시래기를 종종 썰고 물을 자작 자작할 정도로 정교 하게 조절하여 만들어낸 ‘시래기 무침’에 토종 조선 고추장을 넣은 비빔밥을 먹곤 하였는데 지금까지 이 정도 명품요리를 찾지 못했다.
관내에서 연탄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은 두 곳 불과했다. 최종 소비자를 대상으로 소매영업을 하고 있었다. 백합 미장원 바깥 주인이 사진관 영업과 겸업을 했다. 장작 개비, 왕겨, 지푸라기 등의 땔감으론 길고 긴 한 겨울밤 방바닥의 온기를 유지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연탄이란 땔감도 필요했다. 리어카를 끌고 아버지, 형과 한 번에 300장 정도를 300번지 초가집으로 들여오는데 한 번에 두 장 씩을 나르는 연탄 운반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과 달리 한 장씩 조심스럽게 운반을 했다. 한 번에 두 장씩 나를 수 있는 집게도 300번지에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일부는 두 누나와 여동생의 기거지인 사랑방 입구의 댓돌 오른쪽 여유 공간에, 나머지는 부엌 안쪽 ‘설강’과 뒷문 사이 공간에 나누어 차곡차곡 쌓았다.
연탄가스 중독을 막기 위한 민간 조치를 했다. 국대접에 맹물을 하나 가득 채워 안방 윗목 콩나물 통 근처에 상시 비치했다. 이에 더해 안방 아래, 위 2개의 앞문과 정사각형에 가까운 쪽문 수준의 뒷문 1개의 좌측 상단 한 귀퉁이 부분에 작은 네모 모양 구멍을 냈다. 윗부분은 그대로 둔 채 이른바"ㄷ"자를 90도 좌 회전하여 칼질된 아래 부분을 위로 들어 올려 바깥공기가 드나들 수 있게 추가 안전장치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