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3학년 시절이었다. 나는 하숙 생활을 청산하고 여동생과 여동생의 친구, 사촌 여동생 이렇게 넷이서 허름한 단톡 주택 전셋집에서 이른바 석관동 시대를 열었다. 여동생 직장과 나의 학교까지의 출퇴근, 통학 거리를 감안하여 중간 정도에 새로이 둥지를 틀었다. 인근 연탄공장에서 가끔 바람에 실려 날라 오는 연탄 분진으로 빨래를 말리는 데 애로가 있었다. 그 정도는 참고 견디어야 했다.
내가 쓰는 방과 여동생 방은 거실을 거쳐서 오가야 할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좀 불편하였지만 전세금 규모에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내방은 주인이 기거하는 방의 정확히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오른쪽에 수세식 화장실도 있었지만 나는 세입자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긴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다. 동생들이 기거하는 방은 빛이 바랜 군청색 페인트의 철제 대문 왼쪽 안쪽에, 맞은편 오른쪽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내 방은 책상과 의자 책꽂이 이불과 요 등 침구 세트를 한쪽으로 알뜰하게 정리 정돈하면 20대의 건장한 청년 한 사람이 간신히 몸을 누일만한 공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험 준비나 아니면 밤늦게까지 술를 마신 후 귀한 손님을 누추한 이곳으로 가끔 모시곤 했다.
교양과목 시험을 같이 준비하느라고 동기와 한 번 동침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이 둥지를 찾은 또 다른 동기도 있었다. 당시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참 때 묻지 않은 고민들에 관해 둘이서 몸을 뒤척이며 긴긴밤을 꼴딱 새운 경우도 있었다.
늦은 밤 11시 중앙도서관의 시계탑 종소리와 함께 후다닥 가방을 챙겨 48번 노선버스정류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이어 하차 후 몇 걸음마저 걷다 보면 10 내지 20분 전 자정 즈음에나 자취방에 도착했다. 세입자를 위한 별도의 초인종이 없었다. 늦은 시각이기 때문에 주인집에 민폐를 끼치기 싫었다. 여동생 방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낮은 데시벨로 빛바랜 철문을 조심스럽게 두들겼다.
자정 전 후의 시각이면 곧장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하지만 허기를 달래는 일이 먼저였다.
여동생이 매일 정성껏 준비해주는 두 개의 도
시락 중 저녁용을 오후 6시 전후에 이미단숨
에 해치웠다.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몸을 지탱하기에는
야식이 필요했다. 샌드위치. 햄버거 등은 상상
할 수 없었다. 당시 국민 대중 간식인 라면이
거의 유일한 메뉴였다.
동침 예정인 친구가 있는 경우에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모든 식자재는 중국산이 아닌 오리지널 국산 토종이었다.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대파를 듬뿍 썰어 넣었다. 식욕을 돋우는 고춧가루로 빨간 색상을 맞추었다. 살림살이가 결코 녹록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단백 완전식품이라고 일컫는 계란을 라면 수와 동일하게 어김없이 투하했다. 여동생의 손맛과 정성을 버무려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주 맛깔스러운 여동생 표 라면 정식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국가기밀 수준의 사실을 어떤 루트로 입수한 한 후배는 ‘여동생이 라면도 잘 끓인다면서요? 언제 저도 한번 기회를 주실 거지요?’라고 말했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우리나라 최고 권력기관에 현역병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던 고향 친구가 이 석관동 시대에 추억을 하나 보탰다.
내가 꿈나라에게 한참 길을 헤매고 있던 새벽 4시 30분경이었다. 나의 방 맞은편에 기거하던 주인집 사모님이 나를 긴급하게 호출했다.
‘아니 이렇게 이른 새벽 시간에 누가 얼마나 긴급한 사안인지 모르지만’, 통화 전 후에 나는 ‘죄송합니다라’는 멘트를 연발했다.
요즈음 말하는 북한의 핵실험은 아니었다. 최소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비상 상황이었다. 입대 동기와 나이트클럽에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신나게 춤을 즐겼다. 문 닫는 시각까지 풀로 채우고 나서야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나의 자취방 주인집 전화번호가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고향 친구의 부름이었다.
내 방보다 공간상 결코 더 여유가 있지 않은 여동생 방으로 나는 몸을 급히 피신하고 고향 친구와 입대 동기가 짧은 토막잠이라도 이룰 수 있게 기꺼이 공간을 양보했다. 아침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는 당일 오전을 친구 일행과 동행했다.
지금도 가끔 그 사건의 기억을 일깨우면 친구는 나에게 또 그 이야기이냐며 오히려 당당하게 핀잔을 주곤 한다.
중앙도서관 시계탑의 은은한 종소리를 들으며 당일 새로운 동침자를 구해선 24시간 주점이나 포차를 거쳐 ‘사랑과 정의 같고 다른 점’ 어쩌고 하며 인생을 논했다. 그러다 자취방에 도착하면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새벽 정도에 이르는 것이 예사 일이었다.
주인집 초인종은 언감생심이고 주경야독하느라 곤한 잠에 떨어진 여동생을 차마 깨울 수는 없었다. 문무대 시절 유격의 짧은 경험을 살려 월담을 해야 했다. 뒤에서 나의 양쪽 발을 손바닥으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받치어주던 친구였다. ‘담치기 실력’이 제법이라는 듣기 싫지 않지만 성적에는 절대 반영이 되지 않는 칭찬을 받았다.
24시간 주점이나 포차를 전전하다 보니 너무나 늦은 아니 이른 시각이 되었다. 오늘은 담치기 실력을 발휘하기에도 무리였다. 이미 이른바 통행금지 제도란 것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은 여의도를 거치는 순환 37번 노선버스에서 대충 ‘게기기’로 친구와 작정을 했다. A5 용지를 세로로 2 등분한 크기에 10회용 버스 회수권이 인쇄되어 있었다. 당일은 이것을 두당 2장을 소진해야만 했다. 종점이자 시발점에 가서 다시 1장을 안내양에게 내밀었다. 버스의 가장 뒷자리에 앉아 비몽사몽 하던 우리 일행은 안내양으로부터 ‘무어 여기가 여인숙인지 아느냐’고 핀잔을 받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