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관동 시대와 100일간 금주 기도(2편, 완)
평소 나는 오전 6시 전후로 기상을 했다. 자취집 건물 마당 귀퉁이에 따로 자리 잡은 재래식 화장실을 들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참 웬일일까. 볼일을 마치고 화장지로 깔끔한 마무리를 하던 중 적지 않은 양의 시뻘건 피가 화장지에 묻어 나오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기겁을 했다.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이 된 나는 매형 군대 동기인 개업 약사를 찾았다. 사태의 줄거리를 들은 약사는 ‘장출혈’이니 술은 절대로 마시지 말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생존을 장담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진단과 처방이었다. 10일 분의 조제약을 건네받았다. 당시는 물론 의약분업이란 것이 없었으니 병원에 갈 생각은 아예 없었다. 약국에서 상대적으로 손쉽게 해결하고자 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금주령은 나에겐 비상계엄 보다도 더 큰 충격이었다. 약 1년 전 모교 부속 의료원 치과병원에서 치대 선배의 배려로 난생처음 스케일링이란 걸 거의 무상으로 선물 받았다. 나에게 당시 선배의 주문 사항이 향후 2주일간의 금주령이었던 기억이 번쩍 떠올랐다.
아예 처음부터 이런저런 것을 의식하지 않고 일상생활을 이어가다 술을 마실 기회가 없어 결과적으로 2주 간의 금주란 걸 달성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작정하고 금주 기간을 2주일 채우는 것은 만만치 않다는 걸 이미 체험한 바 있었다.
이런 사태에 관하여 여러 루트를 통해 아버지는 보고받았다. 붉은색 밑줄이 그어진 그야말로 옛날식 양식의 편지지에 다섯 쪽 분량의 장문의 글을 손수 큼지막한 포인트로 적어 보냈다. “둘째야 건강이 최고란다. 건강이 먼저이지 공부가 무어 대수인가. 술은 절대 마시지 말고 치료를 잘 받아 하루빨리 완쾌되도록 하거라”는 구구절절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게 모정과는 또 다른 부성애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단한 결심을 했다. 향후 무조건 무기한 금주를 선언했다.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술자리에 가지 않는 것이 실천의 첫걸음이란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만만치 않았다.
분기에 한 번 정도 소집되는 교내의 고교 동문 모임에 나는 역사적인 소명의식이라도 있는 것처럼 개근을 했다.
‘선후배님 제가 사정상 술을 마시지 못하니 이해 좀 해주세요’라는 게 내 단골 멘트가 되었다. 술 대신에 그 흔한 콜라나 사이다 등 널린 음료수라도 마시면 될 걸 맹물만 홀짝거린 이유를 지금까지도 몰랐다. 모임의 살림살이를 걱정해서도 아니고 아마 ‘세련되지 못함’, ‘요령부족’ 이런 쪽에 가까웠다.
안주만 먹고 맹물만 마셔대니 이는 헌법상의 가장 중요한 기본권 중의 하나인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내 고교 동문 모임 등 정기적인 모임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스로 주도적으로 술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금주의 목표 달성이 한결 쉬울 듯했다. 그러에도 나름 멋있거나 호탕한 선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각각 고교 1년, 2년 후배와 3인 모임을 수시로 만들었다. 선배는 영물(영원한 물주)이라 했듯이 술자리 계산은 당연히 내 몫이었다.
금주의 첫째 목표였던 100일 기도에서 약 20여 일이 모자란 비 오는 토요일 오후 6시 무렵이었다. 복학생과 같은 집 같은 방에서 하숙을 같이 하던 동기를 따라 선후배 포함 도합 대여섯 명이 모였다. 모교의 후문 쪽 비탈길을 따라 하숙집으로 발길을 모았다. 요즈음 일부 지방 출신들이 가끔 사용하는 용어로 좀 꿀꿀했던 것이었다.
아이돌보다는 성악가 수준에 가까웠다. 음색과 가창력에서 결코 남 못지않았던 친구였다.
별로 가격이 나가지 않는 슬리퍼에다 맨발을 대충 끼우고 반바지에 허름한 티셔츠를 걸쳤다. 방금 전에 그친 빗물로 고여있는 작은 물 웅덩이를 질퍽거리기도 하면서 동시 동작으로 한 가닥 멋지게 뽑았다.
주로 소리를 다스리는 음치인 나는 물론 다른 보통 수준의 친구도 따라 부르기엔 쉽지 않은 ‘가슴앓이’로 노래 실력을 한껏 뽐냈다. 저 친구가 술을 마시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참느라 가슴을 앓고 있는 내 마음을 어쩌면 저렇게 소름 끼칠 정도로 잘 알고 있는지.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마음을 ~ 아 어쩌란 말이냐 이 아픈 가슴을~"
그런데 잠시 후가 더 문제였다. 당연히 예견된 코스였다. 당시 국신 양주 어쩌고 하면서 가성비가 높다는 이유 등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캡틴큐’가 메인 메뉴였다. 새우깡 양파깡 기타 약간의 오징어 대구포 등의 안주로 술판이 벌어졌다. 캡틴큐를 많이 마시면 양주병을 두르고 있는 종이에 나오는 인물처럼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농담이 돌았다. 술병 뚜껑이나, 소주잔보다 사이즈가 약간 작고 몸매가 날렵한 양주잔으로 주거니 받기니 하는 풍경이 바로 눈앞에 벌어졌다. 물론 나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다.
대중가요 노래말이기도 한 ‘비가 개인 오후’에다, 실제 내용물이야 어쨌건 양주에다, 조금 전에 나의 폐부를 마꾸 찔러댔던 가슴앓이 가사 등이 어우러졌다. 나의 마지막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자리였다.
고지가 바로 저기이고 여기까지 잘 참아 왔는데 마음을 다시 한번 더 다독거렸다. 꼴깍꼴깍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는 워낙 데시벨이 커 하숙집 담을 충분히 넘기고도 남았다.
일생일대의 큰 위기를 겨우 겨우 넘긴 내가 승리한 또 하루로 기록되었다.
자신과의 처음 약속 기간인 100일간 금주의 금자탑이 완성되었다. 그럼에도 재래식 화장실을 가기가 두려운 상황은 계속되었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거의 매일 구경했다. 출혈이 매일 지속된 건 아니었다. 띄엄띄엄 이어졌다. 병원에 한번 가 보았으면 한 방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텐데 참 무모했다. 집주인 몰래 가끔 내방 오른쪽에 자리한 수세식 화장실에 가면 괜찮을까 하는 말도 되지 않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즉시 실행을 해 보았지만 출혈 상황은 더욱 적나라하게 이어졌다. 심리적 위축감은 한층 더해갔다.
그래서 나는 100일 금주 목표를 달성한 기념도 할 겸 정말로 그렇게도 마시고 싶었던 술을 일단 ‘테스트 음주’라는 핑계로 실행했다. 예전 정치인 양김이 오랜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그런 기쁨이
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이든지 시도하는 게 낫다 "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술을 마신 다음이라도 피곤하지 않고 컨디션이 좋은 날은 시뻘건 친구하고 만날 일이 없었다. 당연히 그 반대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시뻘건 친구가 찾아왔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나의 병명은 장출혈이 아닌 치질임이 밝혀졌다.
이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역사적 사실에 버금가는 위대한 일이었다고 나는 스스로 위로를 했다. 최근 약 6년 전 나는 전문병원을 찾아 근본적인 치료수단인 수술로 이 문제를 깔끔히 정리했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같이 지내온 시뻘건 친구와는 영원한 결별을 했다.
콘서트나 뮤지컬 공연 등 휘날레 이전에 앙코르이나 커튼콜이라는 것이 있다. 석관동 시대에도 이런 게 없으면 좀 밋밋할 것 같았다.
대학 3학년 2학기 시작 직전이었다.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만한 형편이 되지 않아 부득이 캠퍼스 생활을 일단 접고 카투사에 지원한 친구가 있었다. 환송회라는 핑계로 당일 나의 동침자로 내정을 했다. 48번 버스정류장 바로 인근에 자리한 곳을 두 번째 술자리로 정했다.
친구는 입대 전 2학기 등록을 할 목적으로 자기 앞 수표 1장을 주머니에 소중하게 꼬불치고 상경했다. 즐겁게 술자리를 파한 후 내 방에서 동침을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도서관으로, 친구는 아침 일찍부터 어제의 그 주점으로 행선지가 갈렸다. 귀가 길에 나는 혹시 친구가 입대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 기분이나 또는 홧김에 자기 앞 수표를 헐어서 현금화하지 않았을 가하는 큰 걱정을 했다. 그것을 확인차 다시 그곳에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내 걱정은 다행히도 기우였다.
매년 12월 마지막 주엔 방송사마다 특집으로 이름은 다르지만 ‘10대 가수상’, ‘가요왕’이라는 연말 특별프로그램을 성대하게 마련했다. 내 방과는 거실을 건너 좀 떨어진 좁은 방에 여동생 여동생 친구 사촌 여동생이 기거했다. 색이 바랜 군청색 페인트의 철제 대문 안쪽 왼편에 자리 잡고 있어 대문 밖에서도 동네 인근 불량배들이 여차하면 딴생각을 품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취약했다. 게다가 아낙네들만이 모여 있었으니 그 걱정은 더 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젊은 아낙네의 아주 높은 하이 톤의 금속성 비명이 내 고막을 찢었다. 이야, 이거 평소의 걱정대로 터질 게 터졌구나 하며 나는 우사인 볼트처럼 빠른 달음박질을 해서 동생 방으로 돌진했다.
“왜? 무슨 일이 있어?” 순간 방안을 살폈지만 외부 침입자는 없었고 잠시 전과 달리 평온을 되찾은 뒤였다.
사촌 여동생을 열렬한 팬으로 두고 수많은 사람에게 우상으로까지 추앙을 받던 가수 이용이 연말 가수왕으로 뽑히는 순간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당시 그 가수의 히트곡으로 기억되는 ‘잊혀진 계절’과 달리 석관동 시대가 결코 나에겐 ‘절대 잊히지 않는 계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