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먹거리와 식생활 1편)
"재벌 회장도 하루에 세끼를 먹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나다"라고 아버지는 늘 일렀다. 세상 살며 무리하게 너무 욕심을 내지 말라는 타이름이었다. 300번지 8인 대가족인 우리는 한 끼에 보통 한 되의 식량이 필요했다. 친척 친지 지인 집에 유학 등 이런저런 이유로 얹혀살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경우 그에 대한 현물보상 기준은 한 달 에 쌀 2말이 관행이었다. 현금보상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 그런데 이는 주식 이외에 기타 부식 비용 등을 김 안 하여 실제 소비량의 2배를 건넸다. 일종의 부식 비용에 대한 보상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어쨌거나 우리 집은 1달에 쌀 한 가마니가 필요했다.
쌀이 귀하고 비싸던 시절 보리쌀은 두 번의 과정을 거쳐야 최종 밥상에 오를 수 있었다. 300번지 툇마루 아래쪽에 자리 잡은 정지(부엌) 문을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고 들어섰다. 내가 까치발을 세우고 기를 쓰며 오른손을 최대한 뻗어야 깽신히(간신히) 닿았다. 이런 높이에 대나무 소쿠리가 별도의 채반 안에 담겨 천장부터 내려온 기다란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약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엔 초벌 삶은 보리쌀이 소복이 쌓여 있었고 뚜껑으로 엄호를 받고 있었다. 호시탐탐 이를 노리는 쥐 파리 모기 등의 침입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우선 한 번 삶은 보리쌀을 무쇠솥에 7할 정도 고루 평평하게 깔았다. 그 한가운데 3할 정도의 을 쌀을 섞어 넣은 후 풀무의 힘을 빈 왕겨 불로 밥을 지었다. 300번지 가장이자 가장 어른인 아버지 밥을 먼저 챙겼다. 오랜 기간 사용하여 네모난 부분이 이제 7할 정도밖에 남지 않은 묵직한 스텐 주걱으로,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채웠다. 보리밥으로 사방이 둘러 싸인 섬 한가운데 분화구에 빼곡히 얼굴을 내민 쌀밥을 마저 채웠다. 다른 식구들 몫은 쌀, 보리밥을 모두 골고루 섞어 무차별로 밥그릇에 채워 넣었다.
300번지 본채의 안방에 열외 한 명 없이 전가족이 옹기종기 모였다. 아들 셋은 아버지를 모시고 결코 고급스럽지 않은 옻칠이 된 시커먼 색의 접이식 네모난 밥상에, 세 자매는 어머니를 모시고 두레밥 상의 축소판인 아래 받침대가 원추형으로 된 알루미늄 재질의 밥상으로 2개 조 원팀 방식의 식사를 했다. 막내가 태어니기 전엔 내 밥그릇에, 그 후엔 유아기를 벗어난 막내의 밥그릇에 아버지는 쌀밥을 몇 수저 덜어서 채워주었다.
3일에 한번 정도는 분식이 주메뉴가 되었다. 어머니가 기다란 나무 홍두깨로 직접 밀어 만든 ‘누룽 국수’나 5일 장터에서 구입하거나 국숫집에서 뽑아온 재료로 만든 ‘잔치국수’가 대세였다. 한 세기의 혁명적인 발명품으로 꼽아 별로 손색이 없었다. 아주 획기적인 전천후 국민 간식인 ‘라면’이 등장했다. 일반 국수 대비 수준과 맛이 한 단계 높고 고가인 라면을 섞어 이른바 ‘혼합 국수’라는 새로운 메뉴가 탄생했다. 대략 배합 비율은 라면(3) :국수(7)가 되었다. ‘내리사랑’이라 누나들과 형은 동생들에게 꼬불꼬불한 면발 라면 몇 가닥이라도 양보를 했다.
밥 물 술이 나의 3대 주력 먹거리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300번지 시대에도 밥 이외의 분식이나 기타 별식을 즐기지 않아 어머니를 더욱 힘들게 했다. 동지 즈음엔 팥죽으로 한 끼를 갈음함 직도 한데 나 때문에 따로 집밥을 챙겨야했다. 식성도 융통성이 부족했다. 양곡상이 오랜동안 생업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겉보리쌀 => 쌀보리 쌀 => 누른 보리쌀 등의 족보도 기억할 수 있었다.
권위주의 시대인 고교시절 땐 혼분식을 권장(강요)하였다. 관리대장까지 만들어 담임선생이 체킹을 했다. 거의 모두 미달이고 충족이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도시락을 지참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미달 판정을 받았다.
모 재벌 회장처럼 아버지는 밥상머리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은 이른바 점호시간이었다. 따라서 누나들이 가장 힘들어했다. 부득이한 사유로 밥을 먹지 않더라도 식사 장소에 정위치해야 했다. 보통의 수저보다 길이는 짧고 좀 더 움뿍 패인 이른바 ‘미제 숟가락’을 형은 나에게 물려주었다. 유아들에겐 거의 만병통치약인 포롱환 등 알약을 물에 이겨서 복용 시엔 별도의 숟가락이 등장했다. 형에게 내가 물려받은 수저보다 좀 더 움푹 파인 또 다른 ‘투약 전용’ 수저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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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많은 가족인 우리 식구들은 식수를 많이 마시기도 했다. 식사 중에 모자란 숭늉을 추가로 조달하는 일은 어머니나 누나들 몫이었다. 살림 형편을 잘 모르는 내가 모처럼 나섰다. 행주가 담기고 솥 바닥의 누룽지를 굵어 모으는 용도로 오랜 기간 사용되어 삼분지 일 정도가 달아버린 스텐 밥주걱도 눈에 들어왔다. 설거지를 기다리던 물을 자신 있게 날아왔다. 가족 모두가 맛있게 마신 후에야 사태 파악이 되었다. 혹시라도 혼쭐을 날거란 예상과 달리 ‘그런 물이 오히려 건강에 보탬이 되는 거란다’는 순발력이 뛰어난 아버지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300번지 시대 관내엔 푸줏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정육점이 한 곳 밖에 없었다. 당연히 독점 영업이었다. 여러 곳의 정육점이 있는 읍내도 고기를 부위별로 구분하여 팔지는 않았다. 관내보다 형편은 훨씬 나았다. 그렇다고 돼지고기 몇 근을 사겠다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 읍내까지 나간다는 건 쉽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정육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육점 주인장과 아버지는 동갑인 친구 사이였다. 오랜 기간 동안 사업을 이어온 아버지는 양대 명절이 다가오면 그동안 신세 진 분들에게 답례 시 이곳을 많이 이용하는 아주 큰 단골고객이었다. 따라서 항상 그나마 부위별 고기를 구입할 수 있는 나름의 편의를 누렸다. 이런 인연이 전혀 없는 관내 면민들은 정육점 측의 일방적인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허연색을 띠고 기름기가 대부분인 비계 부분이 많은 돼지고기 몇 점이 질서 없이 둥둥 떠다니고 국물이 많은 ‘돼 지고가 국’과는 달랐다.
퇴옥살(찌개용 순살코기)과 호박을 삐져 말린 호박꼬지, 두부, 들기름에 볶은 김치를 버무리고 지져 내 입맛에 맞춘 300번지 태생 ‘어머니표 김치찌개’를 오늘도 맛있게 먹었다. 돼지 고깃국에서 볼 수 있는 비계가 많은 부위와는 아주 달랐다. 이 퇴옥살은 아버지가 친구인 정육점 주인장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조달했다. 두부는 도회지의 그것과 달리 훨씬 밀도가 높고 아주 ‘마딘(소비하는데 오래 걸리는)’ 것만 사용했다. 쫑쫑 썰어 넣은 김치를 볶을 때 넣는 들기름은 관내 보뚝 뒤편에 자리 잡은 전퉁 재래식 기름 짜는 집에 들러 일정한 공정을 거쳐 짜 온 토종이었다. 호박꼬지는 요리 전에 물에 일정 시간 담갔다가 투하했다.
300번지를 떠나 중학교를 졸업 후 오랜 기간 객지 생활을 하던 중 방학이나 가족모임 등으로 집을 찾을 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 대표 브랜드 상품을 내 밥상에 올렸다. 비계가 거의 없어 부담이 적고 국물도 적어 포만감에서도 유리했다. 나는 이 퇴옥살 고기를 한점 한점 고추장에 찍어 오랜 시간 씹어 진미를 즐겼다. 이런 사연을 속속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누나 둘은 가끔 나를 생각하여 어머니의 솜씨를 재연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손맛에는 미치지 못했다.
지금은 건강보조식품인 식물성 오메가의 윈 조로 알려진 참기름(A)과 들기름(B)은 300번지 시대엔 아주 소중하고 가격이 상당하게 나가는 고급 음식 첨가물이었다.
A는 나물과 야채무침용으로 B는 김치나 멸치 등을 볶거나 국 종류에 첨가했다. A가 B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비쌌다. 양자 공히 거래단위가 독특하다. 1말인 6 킬로그램 단위인데 무게나 부피 중 하나의 기준으로 정하면 될 것을 두 개를 병용했다. 품질이나 윈산지 등에 따른 변동폭이 크다 보니 부피가 한 말에 모자라거나 넘더라도 6 킬로그램을 거래단위로 한다. 국내산 기준으로 최근 시세는 A, 100,000윈 B, 50,000 윈을 호가한다. 300번지 시대에도 결코 만만한 시세는 아니었다. 1말당 짜주는 공임은 공히 8,000원 수준이다. 들깨는 껍데기가 두꺼워 가공 전의 물건 같은 양을 기준으로 비교 시 참기름이 약간 더 많이 추출이 되었다.
참기름은 대개 상표가 떨어져 나가기 전의 용도가 짐작이 불가능한 2홉들이 소주병 크기에 보관했다. 뚜껑이 변변치 않은 당시 좀 딱딱한 종이를 똘똘 말아 입구를 틀어막았다. 워낙 고가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6남매 자식 모두에게 차별 없이 하나의 숟가락에 최대 2 방울만 조심스럽게 떨궈주었다. 사람의 피보다 아깝고 마딜까요.
깨끗이 씻어 찌푸리기 등 작은 불순물을 모두 제거한 상태의 참깨를 햇볕에 충분히 말렸다. 말 단위로 광목 포대에 담고 리어카에 실어 기름 짜는 집으로 나섰다. 장작불의 힘으로 가마솥에 넣고 들들들 볶은 뒤 원통형 압착방식 기계에 조심스럽게 들어부었다. 이어 지렛대 모양의 쇠막대기를 힘껏 내렸다 풀었다를 반복 했다. 금속성 원통형 둘레에 촘촘하고 대오를 맞추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 구멍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중한 기름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아래 통 밑에 마련된 둘레 홈을 따라 쪼르르 흘러내려 한 곳으로 모였다. 천연산 기름때로 반질반질 빛나는 플라스틱 재질의 깔때기를 통해 대형 유리병에 안착했다.
기름을 모두 뽑아낸 후의 부산물인 깻묵은 기름집에서 의뢰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가끔은 선의로 일부를 돌려받기도 했다. 조금씩 심심풀이로 맛을 보았다. 관내를 관통하는 비단강 여울에서 복수(어항)를 이용하여 민물고기 어로 활동 시 고기를 유인하는 떡밥으로 사용했다. 낮은 높이의 펑퍼짐한 윈통형 캣묵 덩어리는 기름을 짜는 공정 노임의 일부로 현금 대신 받는 대물변제의 일종으로 간주했다. 이는 마치 나락 등 방아를 찧을 때 현금 대신 쌀 한 가마니 당 쌀 몇 되를 징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6 킬로그램 한 말다 겨우 기름 약 2,2리터 내외밖에 얻을 수 없었다. 엄청난 고가였고 지금으로 말하면 중저가 브랜드의 국내산 양주값에 필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