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 (본채 안방 생활 스케치 1편)
본채에 딸린 안방에는 부모님과 아들 3형제, 사랑채의 사랑방엔 딸 3 자매가 기거했다. 식사, 가족 전체의 행사나 각종 놀이는 안방에서 이루어졌다. 툇마루 쪽에서 안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은 아랫목과 윗목 쪽 각 하나씩 2개였다. 아랫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면 아랫 문 맞은편엔 쪽문 수준의 뒤꼍으로 통하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의 문이 있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자주 열지는 않았다. 아래위 격자 문양이 있고 한지를 바른 전형적인 농촌 한옥의 출입문이었다.
본채 출입문 아래쪽은, 부엌과 통하는 공간이 있었다. 지금 중국 음식점 1층 주방에서 2층으로 음식을 올려 전달하는 장치와 유사했다. 식사나 주방 용기 등을 추가로 조달받는 창구였다. 아래쪽은 송판 대기 세 개를 가로 방향의 붙박이로 3개가 끼위져 있어 뒤지 겸 광의 출입문과 흡사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게 땔감으론 장작, 솔가지, 삭도 가지, 지푸리기, 북띠기. 왕겨 등 다양했다. 보일러 시설을 갖춘 방과 또 다르게 방안 실내 온도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들쑥날쑥하여 겨울에도 따뜻한 바닥에 훈훈한 방 공기의 꾸준한 유지는 쉽지 않았다.
아궁이로부터 구들장 사잇길 등 난방 기운이 진행하는 불길이 막히거나 장판 바로 아래 깔린 평평한 구들장들이 주저앉거나 어그러져 충분한 땔감으로도 난방효율이 많이 떨어졌다. 이럴 경우 대략 사오 년마다 대대적인 개수-보수공사를 했다. 토수 미장이 구들장 설치 전문가들의 도움이 전혀 없이 아버지가 직접 나섰다. 이 공사에 필요한 망치 쇠 떡메 도끼 먹줄자 등은 대목장인 큰 고모부 덕분에 걱정은 없었다. 뒷일 등 보조는 당연히 내 몫이었다. 구들장 공사에 필요한 사잇돌도 동네 개천이나 강가에서 조달이 가능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가장은 멀티플 에이어가 되어야 했다.
방안의 아랫목, 윗목의 온도 차가 상당했다. 취사를 마친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윗목은 ‘냉골’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한겨울 방안에서도 하얀 입김이 나왔다. 여러 가지 땔감 중 그나마 왕겨는 비교적 오랜 시간 꾸준히 난방이 유지되는 효과가 있었다. 연탄도 땔감의 일익을 담당하였지만 오랜 기간 양곡상을 이어간 아버지 덕분에 충분한 양의 왕겨의 확보가 가능했다.
300번지 조선 토종 꺼먹돼지 보금자리 옆에 위치한 헛간에 왕겨 가마니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 부엌의 "살강" 옆 공간엔 가마니에서 쏟아낸 왕겨가 작은 언덕을 만들었다.
안방에 들어서면 아랫목의 방바닥에서 3분지 1 정도 되는 높이엔 책장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한 책 진열대 내지 책 보관소가 눈에 들어왔다. 나비, 길이 각각 20 × 150 센티미터 정도의 얇은 송판 대기를 천장의 네 곳에 철사 걸이를 하여 겨우 하중을 견디고 있었다. 형제들은 이곳에 책 등 학용품을 각자 자리를 정해 차곡차곡 쌓아 활용했다. 그 위쪽엔 원통형의 기다란 원목 2개로 된 선반이 붙박이 형태로 자리했다. 간장 고추장 등의 주재료인 별로 예쁘지 않은 외모의 사각 메주 예닐곱 통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맞은편 윗목을 가로로 3분지 2 정도를 차지하는 보물이 있었다. 300번지의 역사를 대변하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장만해온 혼수품의 상징인 장롱이었다. 군 통수권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봉황에 버금가는 황새 문양이었다. 소나무 가지 위에 좌우 상단 여닫이 양쪽문 뒷면에 보이지 않게 도색 처리되었다. 이 유리 위에 데칼코마니식으로 새겨졌다. 이 여닫이 문의 안쪽엔 이브자리 몇 채와 사이사이 여유 공간엔 베개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아래엔 높이 25 × 길이 100 센티미터 정도의 서랍엔 각종 옷가지로 가득 채위져 있었다. 오른쪽 한편 아래엔 아버지의 금고(궤짝)가, 기다란 거울로 여닫이문을 한 공간엔 또 다른 옷가지 등을 걸어두었다. 형제들에게 가끔 "서프라이즈"목적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기도 한 아늑한 공간이었다.
윗목 장롱 바로 좌측 모퉁이 구석진 네모난 공간이었다. 이곳엔 국민 부식인 콩나물을 직접 키워내는 콩나물 재배 공장이 있었다. 한글 자음 "ㅅ"(시옷) 중 왼쪽 윗부분 삐침이 좀 길게 뻗어나간 받침대(삼발이)를 짙은 고동색으로 된 너비가 여유 있는 물받이용 대야 위에 균형 잡히게 척 걸쳐놓았다. 마치 사람의 얼굴 양쪽에 붙어 있는 귀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바깥 표면의 재질이 결코 말끔하지 않은 투박한 원통형의 시루를 올렸다. 문자 등이 지워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악수 표 밀가루’ 포대를 사각으로 잘라낸, "바쁘제"와 유사한 광목으로 항상 축축한 상태로 덮어두었다. 못을 박아 만든 것이 아닌, 본디부터 그런 형태로 자라난 원목 "ㅅ", (시옷) 받침대(삼발이)를 대야에 무게 중심을 잘 잡아 조심스럽게 올렸다. 원목 윗부분이 평평하지 않은 관계로 한층 더 조심하여 시루를 올려야 했다.
재래식 우물에서 두레박 역할을 하는 공교롭게도 밥그릇과 국대접과 기능과 크기가 중간 정도 되는 은색 스테인리스 그릇을 이용했다. 지나는 형제들마다 무료하면 대야에 항상 대기 중인 우물물을 수시로 콩나물(콩)에다 부어댔다. 새우깡에 손이 절로 가듯이 이렇게 들어붓다 보면 처음엔 아주 눈곱만 한 싹만 보일락 말락 하던 것이 어느새 장정 고봉밥처럼 시루 위로 거의 다 자란 콩나물 무더기가 소복이 올라왔다.
들어붓는 물마다 금세 그 물 모두가 몽땅 아래로 흘러내렸다. 콩나물이 자라는 모습이 매일매일 하루 단위로 관찰되지는 않았다. 마치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보름 정도 지나면 일취윌장하여 콩나물시루 위로 쑥 올라왔다. 이런 것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미량이 차곡차곡 쌓여 치사량이 된다고 하거나, "서서히 그러나 철저하게 물든다"라고 하여야 할까 구분이 쉽지 않았다. 참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들어붓는 물마다 금세 몽땅 아래로 빠져나가도 세월이 가면 그래도 콩은 자라서 키 큰 콩나물이 되었다."
거의 다 자란 콩나물이라는 하나의 식자재로 별식을 마련했다. 뿌리 끝을 잘라내고 대가리 부분의 옅은 회색빛의 껍데기를 벗겨내며 쭉정이를 골라내는 일련의 과정을 ‘다듬는다’고 했다. 다른 야채나 식자재 등도 물론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콩나물 이외에 추가 식자재가 들어가지 않으니 레시피가 너무나 간단했다. ‘콩나물밥 전용 양념간장’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어찌 보면 메인과 사이드 메뉴가 바뀐 셈이었다. 토종 조선간장에 쪽파를 쫑쫑 썰어 넣고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도 추가했다. 형편에 때라 김 부스러기도 넣었다.
정성껏 다듬어진 콩나물을 가마솥 바닥에 가지런히 깔고 쌀, 보리쌀 등을 앉히는데 콩나물이 품고 있는 물기를 감안하여 밥물을 약간 줄여야 했다. 콩나물을 흔들어 사이사이에 쌀이 섞이도록 하는데 이는 밥이 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드디어 모두가 고대하던 콩나물밥이 탄생했다. 넉넉하게 너른 넙적한 양푼에다 듬푹 담아 전용 간장을 원하는 만큼 덜어 넣고 골고루 섞이도록 야지리 비볐다. 요리를 만드는데 소요되는 시간과 품에 비해 양푼을 비우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평소 마늘만큼 좋아하는 음식으로 토종 찹쌀고추장을 꼽았다. 나는 다른 식구들과 달리 콩나물밥 전용 간장에다 고추장을 추가했다.
중학교 시절엔 도시락 반찬으로 고추장 한 가지만 달랑 준비해 가는 경우도 있었다. 햇찹쌀로 만든 빛깔 고운 고추장만을 기름이 잘잘 흐르는 햅쌀밥에 뭉텅 덜어 넣고 뚜껑을 닫은 채 사방으로 마구 흔들어댔다. 어느덧 근사한 ‘고추장 단독 비빔밥’이 되었다. 무릇 밥을 비비는 공정에 관해서 지인의 어깨너머로 하나의 팁을 배운 적이 있었다. 처음 큰 덩어리 등은 주걱이나 숟가락 등을 사용한 다음 일정한 수준이 되면 젓가락을 활용했다. 그러면 작고 구석진 곳까지 야지리 섞이게 할 수 있었다. 생활의 작은 지혜였다.
내가 엄청난 고추장 마니아라는 기밀을 일찍이 알아챈 어머니는 내 몫으로 별도의 고추장 독을 매년 마련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