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먹거리와 식생활 3편 완)
8인 대가족에다 넉넉지 않은 살림살이 때문에 우리 6남매 형제들은 군것질은 죄악시까지 했다. 간식은 당연히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친인척 어른이 300번지를 들를 때나 소풍 시즌 이외는 간식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하루 삼시 세 끼를 챙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 집은 물론 친인척 집이라도 끼니 무렵엔 들르지 말 것이며 방문 중이라도 식사시간이 되면 어서 300번지로 돌아와야 한다고 우리는 평소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다. 끼니를 걱정하는 가구들이 제법 되니 부담을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정식은 물론 간식이나 주전부리도 이동하면서 먹지 말라는 준칙도 추가되었다.
그 당시도 메인스트리트 요지 석유 배급소 집 막내아들은 잦은 군것질로 치아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아이스크림(1원) 풀빵(1) 눈깔사탕(1/2) 이불 과자, 분말 주스(5) 호떡(5) 하드(5) 뽀빠이(10) 야자(20) 라면땅(25) 금강사이다(20원) 등이 주전부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세윌이 좀 지난 후엔 보름달 빵, 팥만주 등도 등장했다. 사이즈는 작지만 팥만주라는 이름을 달고 이 세상에 나온 이 괴물은 입에 살살 녹는다는 표현으로도 한참 모자랄 정도였다. 나에겐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굴지의 제과 회사에선 여 러브랜드의 껌도 출시했다. 수업 시간에 껌을 씹는 것은 매우 무거운 죄(?)로 다스렸다. 어린이를 비롯하여 여성들은 남정네들과 달리 독특한 소리를 내는 재주도 자랑했다. 고무풍선처럼 갈 때까지 다 가보자는 식으로 불어대면 결국은 폭발했다. 그 잔해가 입 주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재미있는 장면도 자주 보았다. 이름하여 풍선껌이었다.
수업 중 껌을 씹게 되면 받게 되는 벌칙이 두려운 나머지 쉬는 시간에만 작동시켰다. 책상 상판 아래쪽 등에 소중하게 잠시 보관하는 알뜰한 살림꾼도 제법 눈에 들어왔다. 이는 세수를 하지 않거나 손톱을 제대로 깍지 않는 행실보다 훨씬 더 비위생적이고 죄질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주 화요일 아침 전교생 마당 조회 시간에 이루어지는 ‘용의 검사’ 시간에 도저히 적발할 수 없었으니 매우 불공평했다.
관내 메인스트리트의 삼거리 가게 집의 장남인 내 친구는 가게에서 취급하는 껌을 품목마다 한 통씩 모아 샘플로 품질 검사하듯이 예닐곱 조각의 껌을 한 입에 털어 넣고 건강한 어금니 자랑을 했다. 열심히 저작운동을 했다. 당분과 염분 각종 첨가물이 긴밀히 협력한 결과 입천장의 점막이 벗겨져 너덜너덜해지는 포상을 받았다.
친구네는 면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두메산골 구석진 부락의 작은 구멍가게에 물건을 공급하는 도매상 역할도 했다. 간이영수증 용지 품목 칸에 뽀빠이를 ‘꽃빠이’로 버전을 한 단계 올려 적었다.
유아기를 벗어나 초등학교 저학년생의 관심품목이었다. 회색빛에 약간 노란색 기운이 도는 알약 형태의 건강보조식품인 윈 기소(에비오제)였다. 당시 국민 간식으로 각광을 받았다.
지금 열차에서 아직도 꾸준하게 팔리고 있는 천안 호두과자와 유사한 호도 빵이란 것이 있었다. 1원에 두 개를 살 수 있었다. 초등 3년 시절 담임선생으로부터 ‘백조’ 담배를 사 오라는 분부를 받은 교감선생의 막내아들은 거스름 대신 5원어치 호도 빵을 사 왔다. 오랜 기간 입다 보니 중고가 된 점퍼 양쪽 아래 주머니의 ‘뜯어진(풀린)’ 틈으로 허락을 받지 않은 외출을 나온 호도 빵이 이리저리 공간을 ‘빠대고(나대고)’ 다녔다.
술이라 하면 관내에서 막걸리 소주 정종 맥주 배갈(고량주) 등을 볼 수 있었다. 모리미 원액에 도가(양조장)에 설치된 펌프 물을 쏟아 희석하면 막걸리가 되었다. 이는 대동강 물을 팔아먹던 봉이 김선달이 연상되었다. 도가 앞마당 너른 공간에 커다란 직사각형의 멍석 위엔 술을 만드는 주된 재료인 ‘고두밥’이 나무 밀개로 밀어 고른 두께로 널려 있었다. 청풍명월을 자랑하는 고향의 무공해 햇볕에 말리기 위해서였다. 감시인이 없는 틈을 타 한 두 주먹씩 양쪽 주머니에 집어넣고 조금씩 아껴먹는 맛은 짜릿했다. 웬만한 과자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수분이 적어 꼬들꼬들하다 하여 ‘고두밥’이라고 이름이 붙었나 보았다. 삼시 세끼 정식도 수분의 정도 따라 된밥 vs 진밥으로 나누곤 했다. 나이가 들수록 수분이 많은 진밥을 대체로 선호한다고들 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이른 아침 시각에 대포로 해장이나 한잔 하세라고 하는 경우 대부분 막걸리를 일렀다. 통일벼 등 다수확 품종이 나오기 전엔 쌀의 공급이 수요에 모자랐다.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지며 밀가루 막걸리에서 쌀막걸리 시대가 열렸다. ‘기쁠 희’ 자나 ‘사발 복자’가 한자로 새겨지고 높이
는 얕지만 반경은 제법 너른 사기 잔 하나에 10원이면 마실 수 있었다. ‘오포대(사이렌대)’ 집 주점에선 기본 서비스 안주로 열무김치를 대령했다. 면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부락일수록 맛소금과 김장용 소금 중간 입자 크기의 소금으로 열무김치를 대신했다. 이도 도농 격차의 자그마한 사례였다.
모내기 철이나 나락 매상 작업을 대대적으로 하는 경우 2되들이 노란색 알루미늄 주전자에 모리미를 받아오라는 아버지의 분부를 받았다. 논둑길을 걸으며 주전자 주둥이를 조심스럽게 홀짝홀짝 흡입하게 되다 보니 가랑비에 옷이 젖었다. 병에 담겨 봉인된 상태가 아닌 소주도 일부 보급 형태이던 시절 나무 재질의 네모난 되빡으로 퍼내어 주전자에 직접 담거나 깔때기를 활용하여 긴 유리병에 받아왔다.
정종은 양대 명절에 제주로 애용되었다. 취업을 하였거나 명절 때 귀향 시 대자 정종과 굴비 한 두릅은 참으로 궁합이 잘 맞는 음식 선물이었다. 고향을 찾기 위해 올라선 비둘기호 열차의 출입문은 없는 출입구에서 매달려 여행을 했다. ‘선데이서울’은 국민도서가 된 지 이미 오래였다.
초등학교 여름 방학 즈음 우리 가족은 300번지를 떠나 관내 메스트 리트로 진입을 했다. 큰 누나가 신발 담배 술 과자 등을 취급하는 영업을 개시했다. 당시 담배는 전매 품목이었고 관내 면소재지엔 우리를 포함하여 판매소가 두 곳밖에 없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담배를 배정받았다. 전매청 직원은 내 친구 집에서 하루 정도 묵으면서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네는 프리미엄을 받았다. 소가 끄는 달구지와 달리 관내에선 좀처럼 구경이 쉽지 않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로 담배를 실어 날랐다.
많은 브랜드 중 구입하는데 가장 어려움이 있는 담배는 봉초라고 불리기도 하는 ‘풍넌초’(6원)였다. 이는 공급에 비해 항상 수요가 넘쳤다. 그러니 이 품목을 가게마다 할당을 했다. 예약판매에다 별로 인기도 없는 다른 브랜드를 끼워 팔기도 했다. 겨울철에 화롯불로 불을 붙이는 기다란 곰방대 전용 담배였다. 이 귀중한 보물 덩어리를 배분하는 날은 명절 귀향 열차표를 구입하러 길게 늘어선 줄을 방불케 했다.
나는 담배를 많이 팔아본 것과 달리 태어난 이래 호기심에 장난 삼아도 한 번도 흡입해 본 적이 없다. 20살 전후까지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던 나에게 약간 빈정거리던 주위 친구들도 30살이 가까워지자 결국 오히려 부러워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고향 친구를 통틀어 가장 장신이었다. 비단강 건너 동네가 출생지인 친구의 군입대 환송연 자리에서 담배를 한번 흡입해 보라는 친구의 귄 유조차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비흡연자이지만 담배 심부름의 경험이 많았다. 더욱이 누나가 꾸려나가는 담배 가게에서 제법 오랫동안 많은 담배를 팔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웬만한 애연가 못지않게 브랜드명이나 족보를 어느 정도 꿸 수 있다. 담배값도 제대로 모르는 이른바 ‘간첩’으로 의심받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담뱃갑의 가로 : 세로 길이의 비율이 미술 시간에 등장하는 이른바 ‘황금비율’에 해당된다고 세 살 터울인 형이 나에게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