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리 300번지 시대(안방 생활 스케치, 2편 완)
18세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 가리지 않고 해 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가장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은 전혀 없었다. 조그마한 조상 산소에 딸린 텃밭 정도 이외 한 뙈기의 전답도 없었다. 주로 사업을 했다. 종잣돈은 사채 등을 조달하여 해결했다. 신용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여 상당한 인맥을 자랑했다. 사업상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아 귀가가 늦은 날이 많았다.
초겨을 저녁 늦은 시각 삽짝 문 인근 쪽에서 나는 헛기침 소리에 우리 형제들은 안방 문을 후다닥 열어젖힌 후 툇마루로 나섰다. ‘아버지, 이제 다녀오세요?’라고 큰소리로 성량을 뻐기며 합창을 했다. ‘어구, 그래 우리 아들들, 오늘도 많이 놀고 공부 잘했지?’라며 반갑게 대꾸했다.
당시 어머니가 우리에게 가르친 아버지 맞이 인사말에 의문이 갔다. 그저 쉽게 생각하면 될 것을, 난이도가 너무 높은 것으로 미리 예단했다. 아버지는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사연을 따져 묻는 걸로 오해했다. 쉬운 문제는 쉽게 생각하여 풀고 난이도가 좀 높은 문제는 좀 더 깊게 생각하면 될 것을... 그런데 이런 오해는 나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저녁 진지는 드셨어요?”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답변이 떨어짐과 동시에 형제들은 또 한 번 달음박질 경쟁을 했다. 저녁 진지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보존하기 위해 장롱 이불속 깊숙이 숨겨두었다. 뚜껑을 굳게 닫아 놓은 아버지의 저녁 진지를 조금이라도 먼저 꺼내 검은색 옻칠로 단장된 네모난 밥상 위에 올리기 경쟁이었다. 서로 밀고 당기는 바람에 밥그릇은 방바닥에 떨어져 밥을 쏟아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초등 범생이인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는 학교 지침(?)을 신앙처럼 받들었다. 부엉이도 울다 지친 동지 전후의 길고 긴 겨울밤, 일찍 잠자리에 든 나는 부서럭 거리는 소리에 잠시 눈을 떴다. 나만을 왕따 시킨 형과 누나들이 야식으로 물오징어 국을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흡입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물론 형제자매들 죄다 똑같이 좋아하는 음식을 나만 왕따 시키다니 커다란 배신감이 들었다. 숫기가 워낙 없고 넉살도 좋지 않은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멋쩍기도 하여 길고 긴 잠을 그대로 이어갔다.
내륙지방의 작은 분지에선 해산물이라곤 기껏해야 물오징어, 냉동 꽁치, 동태, 염장한 젓갈류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조개젓이나 새우젓은 네모난 나무 상자에 담아 어깨에 들러매고 돌아다니며 손님을 찾아 나서는 행상을 만날 수 있었다.
안방 한가운데 오랜만에 모인 형제들이 윷놀이 판을 벌였다. 당시 초등 저학년생인 나를 그나마 배려한 것이었다. 말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전략에 따라 승패가 갈리기도 했다. 상대는 세 살 위인 형이었는데 앞서 나간 나의 말이 잡힐 위기에 놓였다.
‘영준아 여기 그대로 있으면 잡힐 것 같으니 어서 빨리 도망가렴’ 어깨를 툭치며 누나는 야구 주루 코치를 자임하고 나섰다. 영문도 모르는 나는 엉겁결에 방바닥 자리를 벌떡 차고 일어나 윷놀이 경기장을 벗어났다. 윗목 왼쪽 모퉁이의 콩나물 재배 공장 옆 작은 공간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안절부절못하며 주루코치의 다음 사인 지시를 기다렸다. 여차하면 안방 윗문을 열어젖히고 툇마루와 마당을 거쳐 삽작문 밖까지 나설 각오도 되어 있었다. 순간 누나들과 형은 요절복통을 했다. 방바닥을 두들기고 손뼉을 치는 등 야단법석이었다. 사태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그 경위에 대한 정확한 설명 내지 해명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당시 그 사태의 내막을 정확히 알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웬만한 재력이 되는 집안 아니면 당시 개인이 라디오를 소장한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에 대한 그럴듯한 좋은 대안이 등장했다. 부락마다 이장댁에 상당한 용량과 성능을 자랑하는 라디오 전축 등 오디오 세트를 국가에서 지원 보급하여 관련 시설을 설치했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가입자를 모집하여 유선 스피커를 보급했다. 방송을 유선으로 송출했다. 지금은 24시간 전일제 방송이 일상이 되었지만 당시엔 하루 6시간 내외는 프로그램 편성이 아예 없었다.
태풍이나 대형화재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 등 자연재해 시에 정규 방송 송출을 중단 후 가입자에게 긴급사항과 대책을 신속히 알리어 그 피해를 줄이는 엄청난 역할을 했다. 때론 지역주민의 민윈성 공지사항을 긴급히 전달했다. 그 쓰임새는 점점 위력을 발휘하여 가입자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줄무늬 반팔 티셔츠에 검은색 반바지를 입은 6살 배기 용성이네 둘째 아들을 찾는 다든가 150근 나가는 도복이네 조선 토종 꺼먹돼지가 집을 나갔다는 등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문제는 특정한 사유로 방송콘텐츠의 송출이 일시 중단될 경우였다. 짙은 군청색의 둥그런 모양에 테두리에서 가운데 부분으로 약간 움푹하게 패인 또 하나의 둥근 원부분에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스피커였다. 이것이 ‘요물 성 괴물’로 감쪽같이 딸 바꿈 했다.
방송 송출이 없는 이 취약 시간대에 이 스피커는 유선 전화기 역할을 충분하고 훌륭하게 거뜬히 해냈다. ‘필요가 발명(발견)을 이룬다’고 했던가, 이런 획기적인 사실을 알아차린 가입자 가족들은 유선 전화기를 별도의 가입비와 요금을 부담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마음껏 유용했다. 당시 사춘기의 한가운데 있던 사촌 형은 이를 여자 친구들과 연락하는 수단으로 그 쓰임새를 한층 넓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물론 지정 전화번호를 다이얼로 돌리거나 버튼을 눌러 통화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가입자들이 동시에 대화를 주고받는 다중 통화도 가능했다. 제삼자의 방해가 없으면 두 사람 만의 은밀한 대화도 충분했다. 도청의 가능성은 열려 있었으나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스피커 몸통 아래 부착된 나사식 버튼을 좌우로 돌려 볼륨도 조절할 수 있었다. 우리 300번지는 이 요물형 괴물을 안방 중앙 툇마루 쪽 벽 상단 중앙에 신줏단지처럼 항상 정중히 모시고 지냈다.
300번지 툇마루 위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오른쪽 상단 꼭짓점 부분 귀퉁이가 세모 형태로 조금 떨어져 나갔다. 곱돌 색상의 회색에다 옅은 푸른빛이 감도는 윗부분 표면이 반질반질한 화강암 재질이었다. 다듬돌이었다. 그 뒤쪽엔 다듬이용 방망이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무더운 여름 한낮에 다듬돌을 베고 누우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더위가 순식간에 싹 가셨다. 그런데 이 디딤돌을 베개 삼는 낮잠은 절대 금물이었다. 혈액순환에 이상이 생겨 안면근육이 틀어지거나 입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호도의 딱딱한 껍질을 깨뜨려 그 고소한 알맹이를 먹고자 호도 알을 다듬돌 위에 올려놓고선 한 손으로 호도 알이 움직이지 않게 잘 붙들었다. 방망이로 조심스럽게 내리쳐야 했다. 힘과 속도 타이밍을 잘 조절해야 하는 요령이 필요함은 비단 ‘호도 까기’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었다.